언젠가 우에노의 박물관에서 메이지 초기 문명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흐린 오후, 나는 그 전시회 각방을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당시의 판화가 진열된 마지막 방에 들어갔을 때, 그 유리 선반 앞에 서서 낡은 동판화 몇 장을 바라보는 한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노신사는 키가 말쑥하게 크고 어딘가 풍류가 느껴지는 노인으로 매무새가 단정한 검은 양복에 품위 있는 보울러 햇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곧장 사오 일 전에 어떤 모임 자리서 소개받은 혼다 자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까워진지 얼마 안 된 나도 자작이 교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 탓에 가서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러자 혼다 자작도 내 발소리가 귀에 들린 건지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 반백의 수염에 둘러싸인 입술에 힐끔 미소의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작게 보울러 햇을 들어 올리며 "안녕하세요"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했다. 나는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껴 말없이 맞인사를 하며 자작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다 자작은 장년 시절의 미모가 느지막한 저녁의 빛처럼 살이 처진 얼굴 어딘가에 떠올라 있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 얼굴에는 귀족 계급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마음 밑바닥의 고생이 음울한 음영을 반영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번에도 오늘처럼 검은 유일색 속에서 둔한 빛을 내뿜고 있는 커다란 진주 넥타이핀을 자작 본인의 마음처럼 바라본 기억이 있었다……
"이 동판화는 어떤가요? 츠키지의 거주지 그림――인 듯하군요. 그림이 꽤나 교묘하지 않나요? 그런 데다 명암도 상당히 재밌게 만들어졌죠."
자작은 작은 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지팡이의 얇은 은손잡이로 유리 선반 안 그림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모와 같은 파도를 새긴 도쿄만, 여러 깃발이 나부끼는 증기선, 거리를 걷는 서양 남녀의 모습. 그리고 양옥관 위 하늘에 가지를 뻗고 있는 히로시게를 연상케 하는 소나무――그 안에는 소재와 기법이 공통된 일종의 양화절충이 메이지 초기의 예술 특유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조화는 그 이후로 영원히 우리의 예술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우리가 생활하는 도쿄서도 사라졌다.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 츠키지의 주거지 그림은 비단 동판화로서만 흥미로운 게 아니라 보탄이나 카라지시가 그린 인력거나 유리 창문가의 게이샤 사진 등이 개화를 자랑하던 시기를 떠올려 한 층 더 그립다고 말했다. 자작은 역시나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들었으나 조용히 그 유리 선반 앞을 떠나 옆에 전시된 타이소 요시토시의 우키요에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 요시토시를 보시지요. 양복을 입은 키쿠고로와 이쵸카에시를 한 한시로가 둥근 달 아래서 비극을 연기하고 있는 참이지요. 이걸 보면 한층 더 그 시대가――그 에도인지 도쿄인지 구분가지 않는 밤과 낮이 하나 된 듯한 시대가 눈앞에 고스란히 떠오르는 거 같지 않나요?"
나는 혼다 자작이 지금은 교제를 싫어하는 걸로 통해도 그 시절엔 서양에서 돌아온 재능인으로 관계만 아니라 민간서도 이따금 이름을 알렸단 소문 또한 들었다. 그러니 이 인기척 없는 진열실에서 유리 선반 안에 있는 당시의 판화에 둘러싸여 자작의 말을 듣는 건 한없이 지당하며 또 어울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런 지당한 일이 조금의 반발심을 주어 나는 자작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화제를 당시서 떼어내 일반적인 우키요에의 발달로 옮겨가려 했다. 하지만 혼다 자작은 은손잡이로 요시토시의 우키요에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특히 저는 이런 판화를 보고 있으면 삼사십 년 전의 그 시절이 마치 어제처럼만 느껴집니다. 지금도 신문을 펼쳐보면 로쿠메이칸의 무도회 기사를 볼 듯하죠. 사실 방금 전 이 진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저는 이미 당대 인간이 모두 되살아나 저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걷고 있는――그리고 그 유령이 이따금 우리의 귀에 입술을 얹고 조용히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그런 괴상한 생각을 도무지 떨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양복을 입은 키쿠고로는 너무나 제 친구와 닮아 있어서 이 얼굴 앞에 섰을 때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듯한 반쯤 꺼림칙한 그리움마저 느꼈습니다. 어떻습니까. 싫지 않으시면 그 친구 이야기라도 해드릴까요?"
혼다 자작은 일부러 시선을 돌리며 내 의중을 신경 쓰듯이 침착하지 않은 분위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난 번 자작과 만났을 때 소개해준 내 친구가 "이 녀석은 소설가에요.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주세요"하고 부탁한 걸 떠올렸다. 또 그런 말이 없더라도 나는 어느 틈엔가 자작의 회고적 영탄에 이끌려 가능하면 당장이라도 자작과 둘이서 과거의 안갯속에 감쳐진 "일등 벽돌"의 화려한 시가지를 향해 마차를 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고개를 숙이며 기꺼이 "부탁드립니다"하고 상대를 재촉했다.
"그럼 저기로 가실까요."
자작의 말을 따라 우리는 진열실 한가운데에 자리한 어떤 벤치로 향해 같이 앉았다. 방에서는 이제 누구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단지 주위의 수많은 유리 선반이 흐린 하늘의 차가운 빛 속에서 옛스러움을 두른 동판화나 우키요에를 적막히 걸어두고 있을 뿐이었다. 혼다 자작은 은 손잡이에 턱을 얹고서 한동안 가만히 자작 자신의 "기억"만 같은 진열실을 둘러보았으나 이윽고 나를 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 친구란 건 미우라 나오키란 남자로 제가 프랑스에서 돌아 오는 배 안에서 우연히 친해진 사이였죠. 나이는 저와 같은 스물다섯이었는데 저 요시토시의 키쿠고로와 같이 색이 하얗고 얼굴이 가늘며 긴 머리를 중앙서 가른 참으로 메이지 초기의 문명이 사람이 된 듯한 신사였습니다. 긴 항해 동안 어느 틈엔가 친해져 귀국 후에도 서로 일주일은 방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지요."
"미우라의 부모는 시타야 근방의 대지주로 그가 프랑스로 건너감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아가셨다 합니다. 외동아들이었던 그는 상당한 자본가가 된 셈이지요. 제가 친해졌을 때만 해도 그의 생활은 도리 없이 제X은행에 출근하는 것 이외에는 항상 가진 걸로 놀기만 하는 꽤나 형편 좋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귀국하지 얼마 안 돼 부모대부터 살던 료고쿠햣본구이 근처의 저택에 그럴싸한 서양풍 서재를 새로 지어 꽤나 사치스럽게 생활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저기 걸린 동판화 중 한 장을 보는 듯이 그 방의 모습이 고스란히 떠오르는군요. 큰 강에 접한 프랑스풍 창문, 끝자락에 금을 넣은 하얀 천장, 붉은 모로코 가죽 의자와 장의자, 벽에 걸린 나폴레옹 1세의 초상화, 조각이 새겨진 커다란 흑단 책장, 거울이 달린 대리석 난로, 그 위에 놓인 아버지께서 남기신 소나무 분재――모든 게 어떤 오래된 새로움을 느끼게 하며 음울할 정도로 현란했죠. 다시 형용하자면 어딘가 조율이 잘못된 악기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역시나 그 시대 다운 서재였습니다. 심지어 미우라는 그런 걸 둘러싼 채 항상 나폴레옹 1세 아래서 자리를 잡아 유키조로이 따위를 소매를 맞댄 채 위고의 오리엔탈 같은 걸 읽고 있으니 정말로 저기 있는 동판화서나 볼 법한 광경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따금 커다란 범선이 프랑스식 창문 바깥을 지나는 걸 참 신기하다는 양 바라본 기억이 있군요."
"미우라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더라도 동년배 청년처럼 신바시나 야나기바시에 발을 들이는 기미는 없었습니다. 단지 매일 이 신축 서재에 틀어박혀 은행가라기보다는 은거가라 해야 할 법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로는 그의 허약한 채질이 모둔 비위생을 용납하지 않은 탓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또 하나론 그의 성품과 감정이 당대의 물질적인 풍조와 정반대로 남들 이상으로 순수하며 이상적인 경향을 두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고독에 정착되게 된 거겠지요. 실제로 모범적인 개화의 신사였던 미우라가 그가 산 시대와 다소 색채가 달랐던 건 이 이상적 성품과 감정만으로 되려 한 시대 전의 정치적 몽상가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증거로 그와 제가 둘이서 어딘가의 극장서 하는 신푸렌의 쿄겐을 보러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오노 텟페이가 자해하는 막이 내린 뒤의 일로 기억하는데 그가 대뜸 저를 보더니 '너는 저 사람들에게 동정할 수 있어?'하고 진지하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서양에서 돌아온 후로 모든 구식 폐습을 싫어할 적이었기에 '아니, 동정은 못 하겠네. 폐도령이 내려졌다고 봉기하는 녀석들은 자멸하는 게 당연하지 싶어'하고 지극히 냉담히 대답했지요. 그러자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그야 저 사람들의 주장은 잘못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이 그 주장에 목숨을 내놓는 태도는 동정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봐'하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다시 한 번 '그럼 너는 저 사람들처럼 메이지란 시대를 신화시대로 되돌리자는 어린애 같은 꿈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거야?'하고 웃으며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진지하게 '설령 어린애 같은 꿈이라도 제가 믿는 바에 목숨을 마칠 수 있다면 나는 바라는 바야'하고 딱 잘라 대답했지요. 그때는 그런 그의 말도 단순히 한때뿐인 말로 여겨 별로 깊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만 이제 와 생각하면 그 말에는 상처투성이인 후년의 운명이 연기처럼 그림자를 두르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시겠죠."
"어찌 되었든 미우라는 어떤 일에나 이러한 태도를 고수하였으니 결혼 문제에도 '나는 사랑Amour 없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하고 아무리 좋은 혼담이 와도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거절해버렸습니다. 심지어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게 평범한 연애하고는 또 달라서 꽤나 그의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나타나도 '아무래도 내 마음에 불순한 구석이 있는 듯하니까'하고 말하며 끝내 결혼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그런 걸 옆에서 보고 있자니 너무나 답답해서 때로는 저도 옆에서 '그야 너처럼 구석구석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서야 행주좌와 하나 쉽겠어? 그러니까 세상은 어차피 이상처럼 안 된다고 포기하고 적당한 후보로 만족해버려'하고 오지랖을 부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미우라는 그때마다 되려 애처롭단 눈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그럴 거였으면 이 나이까지 독신을 고집하진 않았지'하고 도통 상대해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친구야 그 말로 포기하더라도 친척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병약한 그가 만에 하나 혈통을 끊어 놓을까 보통 걱정이 아니었는지 하다못해 첩이라도 두는 게 어떻냐고 권한 모양이지만 애당초 그런 충고를 들을 미우라가 아닙니다. 아뇨, 듣기는 고사하고 그는 그 첩 소리를 듣는 걸 굉장히 싫어해서 평소에도 저를 붙들고는 '아무리 개화해본들 일본에서는 첩이란 게 공공연히 퍼져 있잖아'하고 비웃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귀국 후 이삼 년 동안 그는 매일 그 나폴레옹 1세 아래서 끈기 좋게 책만 읽을 뿐으로 언제쯤 그가 말하는 소위 '사랑 있는 결혼'을 할지는 저희 친구들도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어떤 정치적 용건으로 한동안 조선 경성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리 잡은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하던 미우라의 결혼 통보를 받게 됐지 뭡니까. 그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대략 상상이 가실 테지요. 하지만 놀란 동시에 저는 드디어 그에게도 사랑하는 상대가 생겼다고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접장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여 단지 후지이 카츠미라는 어용상인의 딸과 혼담을 가졌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받은 편지에 따르면 그는 어느 날 산책하는 겸 야나기시마의 하기데라에 들렀는데 그때 마침 그의 저택에 출입하는 골동품 상인이 후지이 부녀와 함께 찾아왔고, 함께 경내를 걷는 사이에 서로 마음에 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한 게, 당시의 하기데라는 아직 니오몬도 초가지붕이며 '젖은 사람을 비웃는 법 없어라 빗속의 하기'란 바쇼 옹의 구도 아직 남아 있는 정말로 운치 있는 곳이니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이 우연찮게 만나기엔 딱 좋은 무대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외출할 때면 반드시 파리풍 양복을 입으며 한없이 개화의 신사로 굴던 미우라치고는 너무나 틀에 박혀 있어서 결혼 통보를 읽고 미소 짓고 있던 저도 간질간질한 느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물론 혼담의 중개인이 그 골동품 상인이란 것도 바로 알 수 있겠지요. 그게 또 다행히 그 자리서 이야기가 정리되어 표면상의 중개인을 구하자마자 곧장 그 가을에 혼례도 막힘없이 치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부부 사이가 좋은 건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제가 특히 웃기면서도 부럽다 생각한 건 그만큼 냉정한 학자 체질인 미우라가 결혼 후에는 근황을 보고하는 편지 속에도 거의 다른 사람 같은 쾌활함을 드러내고 있단 점이었습니다."
"그쯤 받아 본 그의 편지는 지금도 제가 보관 중이지요. 그걸 하나하나 다시 읽어 보면 그 시절의 그가 웃는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미우라는 아이같이 기뻐하며 일상생활을 자세히 또 끈기 좋게 적어 보내주었습니다. 올해는 나팔꽃 재배에 실패했다느니 우에노의 요양원에 기부를 의뢰받았다느니 장마로 책 중 대부분이 곰팡이 피었다느니 고용한 인력거꾼이 파상풍에 걸렸다느니 미야코자서 서양 미술을 봤다느니 쿠라마에에 화재가 있었다느니――하나하나 열거하면 도무지 끝이 없는데 개중에서 가장 기뻤던 건 그가 고세다 호바이 화백에게 의뢰해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초상화는 그가 가졌던 나폴레옹 1세 대신에 서재 벽에 걸렸으니 저도 훗날에 볼 수 있었지요. 머리를 묶은 카츠미 부인이 금실로 자수를 넣은 검은 옷을 입고 장미 꽃다발을 손에 든 채로 거울 앞에 서있는 걸 옆에서 그린 모습이었죠. 하지만 그건 볼 수 있어도 당시의 유쾌한 미우라 본인은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혼다 자작은 그렇게 말하고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나는 자작이 조선 경성서 돌아왔을 때 미우라가 사고로 죽은 게 아닐까 싶어 저도 모르게 불안한 눈초리를 상대의 얼굴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자작도 곧 그런 불안을 느꼈는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꼭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가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래저래 일 년 가량 지나 제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니 미우라는 역시나 참으로 침착한 아뇨, 되려 전보다 더 음울한 인간이 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이는 제가 신바시 정차장에 마중 나온 그와 오랜만에 손을 맞잡은 시점부터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아뇨, 보다 정확히는 알아차렸다기보다도 그 지독한 냉정함이 마음에 걸렸다 해야 할 테지요. 실제로 저는 그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왜 그래, 몸이라도 안 좋아?'하고 물을 정도로 의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되려 제가 의아해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며 자신만 아니라 아내도 지극히 건강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듣고 보니 아무리 '사랑 있는 결혼'을 했다 한들 고작 일 년만에 그의 성품이나 감정 따위가 변할 리도 없으니 저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럼 빛 때문에 얼굴이 안 좋아 보였나 보지'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그게 도무지 웃을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는――이 음울한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그의 번민을 느낄 때까지는 대략 두세 달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순서상 일단 그의 아내를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지요."
"제가 처음으로 미우라의 아내와 만난 건 경성에서 온지 얼마 안 되어 오카와바타에 자리한 그의 저택으로 초대받아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을 때였습니다. 듣기로는 아내는 미우라와 동년배였다는데 몸집이 작은 탓인지 누구에게나 두세 살은 어려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눈썹이 짙고 혈색이 잘 도는 둥근 얼굴이며 그날 밤에는 나비와 새가 그려진 옛된 수진 오비를 하고 있었으니 당시의 말로 형용하자면 참 고등한 느낌을 주었지요. 하지만 미우라가 사랑하는 상대이며 제가 상상한 부인에 비하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물론 어딘가라는 정도지 저 스스로도 그 이유를 또렷이 알았던 건 아닙니다. 특히 제 예상을 꼬인 건 이번에 미우라와 다시 만난 걸 시작으로 번번이 경험햇기에 물론 당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딱히 그렇다고 그의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이 식어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밝은 공기 램프의 빛을 두른 채 한동안 음식을 즐기는 동안 그의 아내가 가진 발랄한 재능에 감복할 정도였습니다. 소위 때리면 울린다는 게 아마 그런 대응을 말하는 걸 테죠. '사모님께서는 일본보다 프랑스에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요'――기어코 저는 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마저 해버렸습니다. 그러지 미우라도 잔을 기울이며 '거 봐, 내가 이렇게 말한다 했지?'하고 놀리듯이 끼어들었습니다만 그렇게 놀리는 말이 순간 제 귀에는 재미 없는 울림으로 들린 건 과연 저만의 착각이었을까요. 아뇨, 이때 반쯤 원망스럽게 그를 올려다 본 카츠미 부인의 눈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요염함을 거둔 것처럼 보인 게 과연 저의 나쁜 추측이었을까요. 어찌 되었든 저는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의 평생이 번개처럼 빛나는 걸 느껴야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제가 미우라 평생의 비극에 마주한 첫 순간이었습니다만 당시는 저도 물론 아주 짧은 불안한 그림자가 머리를 잠시 스쳤을 뿐으로 그 후에는 다시 미우라를 상대로 북적이며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날 밤도 말 그대로 하룻저녁의 만찬을 즐기고 그의 집을 떠나면서 오카와타바의 강바람에 술냄새를 풍기며 역시나 그를 위해 소위 '사랑 있는 결혼'에 성공한 일을 몇 번이나 조용히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 지난(저는 그동안에도 그들 부부와 종종 왕래를 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친구인 어떤 닥터의 권유를 받아 마침 오덴노카나부미를 하고 있던 신토미자에 관람을 갔습니다. 그때 반대편 관람석 안에 미우라 부인께서 계신 걸 보았지요. 그쯤에 저는 연극을 보러 갈 때면 반드시 안경오페라 글래스를 가지고 갔는데, 부인께서도 그 둥근 유리 안에 불타는 듯한 융단을 앞에 두고 계셨던 겁니다. 장미로 보이는 꽃을 머리에 꽂고서 밋밋한 색의 반팔 위에 하얀 턱밑을 쉬고 계셨는데 제가 그 모습을 보는 동시에 역시나 아름다운 눈을 들고서 가볍게 목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저도 안경을 낮추어 그 목례에 답을 했지요. 그러자 미우라 부인은 어째서인지 다시 제게 황급히 인사를 하지 뭡니까. 심지어 그 인사가 앞전 번과 달리 굉장히 당황스러운 듯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첫 인사가 저를 향한 게 아닌 걸 알았으니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 인사 상대를 찾아야 했지요. 바로 옆자리서 화려한 정장을 입은 남자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젊은 남자 또한 카츠미 부인의 인사 상대를 찾으려 했던 걸 테지요. 향이 강한 담배를 물고서 저희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지 뭡니까. 덕분에 눈이 딱 맞았습니다. 저는 그 까무잡잡한 얼굴서 무언가 불쾌한 기색을 느꼈기에 곧장 눈을 돌리며 다시 안경을 올리며 별생각 없이 반대편 자리를 보았는데, 미우라 부인의 옆에 다른 여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나라야마의 여권론자――그렇게 말하면 들어 보신 적이 있을 테지요. 당시 상당한 명성을 지녔던 나라야마란 대변인의 부인으로 남녀동권을 열심히 주장하여 이런저런 풍평이 끊이지 않았던 여자입니다. 저는 그런 나라야마 부인이 검은 몬츠키를 입고 금테두리의 안경을 쓴 채로 마치 후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우라 부인과 앉아 있는 걸 보니 무어라 말로 못할 불길한 예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여권론자는 골격이 두드러지는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하고 끝없이 목깃을 신경 쓰면서 저희가 있는 방향에――보다 정확히는 아마 옆에 자리한 정장 남자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대 위 키쿠고로나 사단지를 보는 것보다 미우라 부인과 정장 남자, 나라야마 부인을 신경 쓰는데 더 많은 연극 시간을 빼앗겼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북적이는 하야시나 벚나무 가지가 걸린 세계에 자리해 있음에도 마음만큼은 전혀 따로 놀며 꺼림칙한 색채를 두른 상상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니 중간막이 끝나고 두 여자가 건너편 자리서 사라졌을 때, 저는 정말로 어깨서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습니다. 물론 여자들은 없어졌어도 정장만은 역시나 옆자리서 끝없이 담배를 태우며 이따금 저희를 바라보았습니다만 셋 중 둘이 사라진 상황에선 이전만큼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억측이 굉장히 심한 것처럼 들릴가요. 하지만 이건 젊은 남자의 까무잡잡한 얼굴들이 묘하게 저의 반감을 샀기 때문으로 저와 그 남자 사이에는――혹은 저희와 그 남자 사이에는 처음부터 어떤 적의가 얽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 오카와에 자리한 미우라의 서재서 그 남자를 소개받았을 때에는 마치 수수께끼라도 마주한 듯한 당혹감에 가까운 감정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우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남자는 아내분의 사촌동생으로 당시 XX 방적 회사서 젊은 나이에 중용되고 있는 수완 사원이라 합니다. 확실히 그렇게 듣고 보니 테이블 위 홍차를 둘러싸고 별 볼 일 없는 작담을 나누면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도 그가 상당히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란 건 바로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꼭 뛰어난 사람이라 해서 그 인간에 대한 호오는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지요. 아뇨, 저는 몇 번이나 아내분의 사촌 동생이라 소개받은 이상 연극서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는 이상할 것도 없다며 몇 번이나 호소하며 되도록 가까이하려는 노력마저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겨우 그 노력에 성공하려 하면 그는 반드시 소리를 내며 홍차를 마시거나 담뱃재를 적당히 테이블 위에 떨어트리거나 혹은 자신의 세련됨을 높은 목소리로 웃는 등 모종의 불쾌한 일을 해서 다시 저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니 그가 삼십 분 가량 지나 회사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갔을 때에는, 저는 저도 모르게 자리서 일어나 방안의 불쾌한 공기를 정화하겠단 심산으로 강에 접한 프랑스식 창문을 크게 열었습니다. 그러자 미우라는 여느 때처럼 장미 다발을 든 카츠미 부인의 액자 아래에 앉으며 '그 남자가 어지간히도 싫은가봐?'하고 나무라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정이 안 붙는데 어떻게 해. 저런 사람이 제수씨 사촌동생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야.' 미우라 '신기――하다니?' 나 '아니 왜, 사람으로서의 종류가 너무 다르잖아.' 미우라는 잠시간 아무 말도 않고 저녁빛이 감도는 오가와의 수면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이윽고 '글쎄, 그 안에 낚시줄이라도 하나 드리워봐'하고 맥락 없는 말을 꺼내는 것이었죠. 하지만 저는 단지 그 사촌동생에게서 화제가 멀어지는 게 기뻤기에 '좋아, 낚시라면 외교보다 자신이 있지'하고 불쑥 기운 차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미우라도 처음으로 웃으며 '외교보다? 그럼 나는――그래, 사랑보다는 자신이 있을지 모르겠네.' 나 '그럼 네가 제수씨 이상의 사냥감을 발견하겠단 것처럼 들리는데.' 미우라 '그럼 또 네가 부러워할 거 아냐.' 저는 그런 미우라의 말 밑바닥에서 무언가 바늘처럼 제 귀에 꽂히는 게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저녁 어둠이 드리우자 그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로 프랑스식 창문 밖에 펼쳐진 물에 반사된 빛을 끈기 좋게 바라보았습니다. 나 '그래서 낚시는 언제 갈까?' 미우라 '너 형편 좋을 때면 언제라도' 나 '그럼 내가 편지 쓸게' 그렇게 저는 천천히 붉은 모로코 가죽 의자서 일어나 말없이 그와 악수를 나누고는 이 비밀이 감도는 적막한 서재보다 더 어두운 복도에 홀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문가에 누구인지 검은 그림자가 마치 안의 상황을 훔쳐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히 자리하고 있지 뭡니까. 심지어 그 그림자는 제 모습을 보자마자 곧장 다가오셔서 '어머, 벌써 가세요?'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묻더군요. 저는 갑갑한 한 순간 후, 오늘도 장미를 머리에 꽂은 카추미 부인을 차갑게 바라보며 역시나 말없이 인사를 하고 재빨리 인력거가 놓인 현관으로 서둘렀습니다. 그때 제 심정은 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걸 테지요. 저는 단지 그 인력거가 료고쿠바시 위를 지날 때에도 끝없이 "달릴라"라는 이름을 중얼거린 걸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그 후로 미우라의 움울함에 숨겨져 있는 비밀의 냄새를 또렷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비밀의 냄새가 곧장 미워해 마땅할 간통이란 두 글자를 제 마음에 새겨준 건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 이상가인 미우라가 이혼을 단행하지 않는 걸까요. 간통 의혹은 품을지언정 그 증거가 없기 때문일까요. 혹은 증거가 있더라도 이혼을 주저할 정도로 카츠미 부인을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저는 이런 억측을 거듭하며 그와 낚시하기로 한 것도 잊은 채 편지는 썼을지언정 이래저래 보름 가량 오카와 저택에도 발을 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보름 가량이 지나 저는 또 어떤 예상지도 못한 사건을 만났기에 기어코 약속을 다 할 겸 그와 만나는 기회를 이용해 제 마음고생을 털어놓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저는 역시나 친구와 나카무라자를 보고 오던 길에 분명 땅꼬마로 통하던 아케보노신분의 친한 기자와 함께 해질녘부터 내리던 빗속을 당시 야나기바시에 있던 이쿠이네서 한 잔 기울이며 피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2층서 연주되는 옛 에도를 떠오르게 하는 먼 샤미센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잔을 나누고 있자니 그중에서도 개화의 문학자로 통하던 땅꼬마가 문득 흥에 올랐는지 경묘한 손짓을 섞으며 그 나라야마 부인의 스캔들을 재밌는 이야기마냥 들려주었습니다. 듣자하니 부인이 이전에 고베서 서양인의 첩이었다느니, 한때는 산유테이엔교를 남첩으로 두었다느니, 그 시절이 부인의 전성기라 금반지만 여섯 개나 했다느니 또 이삼 년 전부터 부조리한 빛으로 거의 손 쓸 도리가 없다느니――땅고마는 그 이외에도 여러 내막의 부정을 뒤집어 들려주었습니다만 개중에서도 제 마음에 가장 불쾌한 그림자를 드리운 건 근래엔 어딘가의 젊은 새신부가 나라야마하고 붙어 다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심지어 그 새신부는 이따금 여권론자와 함께 스진 근방에 남자를 데리고 잠을 자고 온다지 뭡니까. 저는 그걸 들었을 때 밝아져야 하는 술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울적한 미우라의 모습이 고집스레 눈앞에서 벗어나지 않아 의리로도 밝은 웃음을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닥터는 일찍부터 제 심정을 알아주었는지 교묘히 상대의 말을 들어 어느 틈엔가 화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숨을 내쉬고 어떻게든 술자리의 흥만 깨지 않을 정도로 응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은 제게 얼마나 부조리하게 돌아갔던 걸까요. 여권론자의 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 제가 이윽고 둘과 함께 자리서 일어나 현관서 돌아가는 인력거에 타려 했을 때, 불쑥 승합인력거 하나가 막을 비로 빛내며 기세 좋게 달려오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제가 인력거 위에 한쪽 발을 올린 것과 그 인력거가 등유를 내리며 안에서 한 사람이 발판에 기세 좋게 내려오는 게 거의 동시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재빨리 막 아래에 몸을 던져 인력거꾼이 봉을 들어 올리는 찰나의 순간에도 이상한 흥분에 빠져 '그 녀석이야'하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녀석이란 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미우라 부인의 사촌동생이라는 그 까무잡잡한 정장남이었죠. 그러니 저는 빗발을 막으로 튕겨내며 등불이 많은 길을 달리는 동안에도 그 승합 인력거 안에 같이 타고 있던 다른 한 명을 상상하며 몇 번이나 무서운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게 설마 나라야마 부인이었을까. 혹은 머리에 장미를 꽂은 카츠미 부인이었을까. 저는 단정 지을 수 없는 의혹에 고민하면서 되려 이 의혹이 풀리는 걸 두려워하여 황급히 인력거에 몸을 숨긴 자신의 겁많은 심보가 짜증이 났습니다. 다른 한 명이 과연 미우라 부인이었는지 혹은 여권론자였는지는 지금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지요."
혼다 자작은 어디서인가 커다란 손수건을 꺼내 얌전히 코를 풀면서 저녁색을 두르기 시작한 진열실 안을 둘러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이 문제는 어찌 되었든 땅꼬마가 한 이야기만은 미우라로서도 서너 번은 생각하기 마땅한 일이지요. 저는 다음 날 곧장 편지를 보내 보양할 겸 약속한 낚시라도 가자고 날짜를 알렸습니다. 그러자 곧장 답이 왔는데 보니 그날이 마침 십육야니까 낚시보다도 달구경할 겸 느즈막에 오가와에 강을 띄우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로서도 딱히 낚시를 고집하는 건 아니었으니 곧장 그의 뜻에 동의하여 약속한 날 야나가바시의 나루터에서 만나 아직 달도 뜨기 전에 놀잇배를 오가와에 띄었습니다."
"그 쯤의 오가와의 저녁 경치는 설령 과거의 풍류에는 미치지 못할지 몰라도 그럼에도 어딘가 우키요에와 닮은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날도 만파치 아래를 오가와를 따라 나오자 크게 묵을 문지른 듯한 료고쿠바시의 난간이 한가을의 저녁 놀을 흔들고 있는 강줄기 하늘에 뒤집어진 일자를 검게 드리우고 그 위를 지나는 마차의 그림자가 물안개 속에서 희미해진 가운데 길을 오가는 제등들이 도깨비불 같은 작은 불을 붉게 움직였습니다. 미우라 '경치 좋지?' 나 '그러게. 이건 서양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광경일지 모르겠어.' 미우라 '그럼 경치라면 조금 정도는 폐습을 이어가도 된다는 거야?' 나 '뭐, 경치만이라면 져도 좋지.' 미우라 '난 요즘 들어 또 개화란 게 싫어져 버렸어.' 나 '듣자하니 옛 막부의 수호사가 프랑스를 찾았을 때 입이 험한 메리메는 옆에 있던 뒤마에게 "대체 누가 일본인을 저런 밑도 끝도 없이 큰 도에 묶은 걸까"하고 말했다네. 너도 조심하지 않으면 곧장 메리메의 독설로 폄하당하겠는걸.' 미우라 '아니, 이런 이야기도 있지. 언젠가 사신으로 온 하여장이란 중국인이 요코하마 여관서 묵던 일본인의 요기夜着를 보고 '이 옛날 옷은 이 나라의 중한 유산이다'하며 간탄했다지. 그러니까 꼭 과거의 관습이라고 해서 무작정 바보 취급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런 가운데 밀물이었던 강수면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를 태운 놀잇배는 어느 틈엔가 노 젓는 소리를 한층 빠르게 내며 벌써 료고쿠 바시를 뒤로한 채 밤눈에도 검게 보이는 소나무 앞에 이르려던 참이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한 시라도 빨리 카츠미 부인 문제를 꺼내려 미우라의 말꼬리를 붙잡고서 '그렇게나 관습을 좋아하면 개화의 부인은 어떻게 하려 그래'하고 떠보기 위한 추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미우라는 한동안 제 물음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직 달빛도 들지 않은 오타케구라의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그 눈으로 저를 보고는 낮으면서도 힘이 담긴 목소리로 '뭘 어떻게 해. 일주일쯤 전에 이혼했어'하고 딱 잘라 답하지 뭡니까. 저는 그 생각지 못한 답에 당황하여 그만 난간을 붙들며 '그럼 너도 알고 있었어?'하고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미우라는 의연히 조용한 목소리로 '너야말로 전부 알고 있었던 거야?'하고 확인하듯이 되물었습니다. '전부인지는 몰라도 네 아내와 나라야마 부인의 관계만 들었어.' 미우라 '그럼 우리 아내와 아내의 사촌동생의 관계는?' 나 '그것도 어렴풋이나마 추측했고.' 미우라 '그럼 나는 이제 아무 말도 안 해도 되겠네.' 나 '하지만――하지만 너는 언제부터 그 관계를 알아차린 거야?' 미우라 '아내랑 아내의 사촌 동생? 그건 결혼해서 세 달 정도 지나――마침 그 초상화를 고세타 호바이 화백한테 의뢰해 받기 전이었어.' 이 대답이 제게 더욱 의외였던 건 대강 상상이 갈 테지요. 나 '그럼 왜 이제까지 묵인하고 있었던 거야?' 미우라 '묵인한 게 아냐. 나는 긍정해주고 있었어.' 저는 세 번이나 연속된 의외의 답에 놀라 한동안 단지 망연히 그의 얼굴만 바라볼 따름이었습니다. 미우라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그야 물론 아내와 아내의 사촌 동생이 가진 현재의 관계를 긍정한 건 아냐. 당시 내가 상상하던 두 사람의 관계를 긍정한 거지. 내가 '사랑 있는 결혼'을 주장한 건 기억하지? 그건 내가 내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주장이 아냐. 사랑을 모든 것의 위에 둔 결과였지. 그러니 나는 결혼 후 우리 사이의 애정이 순수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 나의 경거망동을 후회하는 동시에 그런 나와 동거해야 하는 아내에게도 안타까움을 느꼈어. 나는 너도 알다시피 몸도 건강한 편이 아냐. 그런 데다가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싶어도 아내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지. 아니, 이것도 어쩌면 애당초 내 사랑이란 게 상대에게 그만한 열정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빈약했던 탓일지 몰라. 그러니 만약 아내와 아내의 사촌 동생 사이에 나와 아내 사이보다 더 순수한 애정이 있다면 나는 깔끔히 어릴 적부터 서로 알고 지낸 두 사람을 위해 희생이 될 생각이었어. 그러면 사랑을 모든 것의 위에 두는 내 주장이 사실상 폐품이 되고 마니까. 실제로 그 초상화도 만에 하나 그렇게 되었을 때 아내를 대신해 내 서재에 둘 생각이었고.' 미우라는 그렇게 말하며 그 눈을 건너편 강가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마치 검은 막이라도 친 것처럼 모밀잣밤나무가 자란 마츠우라 저택 위에 음울하게 내려온 채 구름은 달을 놓아줄 기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래서?'하고 상대를 재촉했습니다. 미우라 '하지만 나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사촌 동생이 지닌 애정이 불순하단 걸 발견했어.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 남자가 나라야마 부인하고도 정교를 가진 걸 발견한 거지.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너도 딱히 듣고 싶지 않을 테고 나도 이제 와서 말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지극히 우연한 기회서 그들이 밀회하는 걸 발견했다고만 해둘게.' 저는 담뱃재를 배 밖으로 떨구며 이쿠네서 보낸 비 오는 밤의 기억을 마음속에 고스란히 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미우라는 말을 흐리는 법 없이 이어가서 '이게 내가 받은 첫 번째 타격이었어. 나로선 두 사람의 관계를 긍정해줄 근거의 절반을 잃은 셈이니 이전처럼 호의적인 눈으로 둘의 정사를 볼 수 없게 되었지. 이건 분명 네가 조선에서 돌아왔을 적의 일일 거야. 그 시절의 나는 어떻게 아내를 아내의 사촌동생에게서 떼어낼까 하는 문제로 매일 같이 골머리를 썩었지. 그 남자의 사랑에 거짓은 있어도 아내는 순수하게 사랑할 게 분명해――이렇게 믿고 있던 저는 또 동시에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도 두 사람의 관계에 교섭할 필요가 있다 믿었지. 하지만 둘은――적어도 아내는 나의 이런 기색을 느끼자 내가 이제까지 둘의 관계를 몰랐으며 그제야 알아차려 질투하기 시작한 거라 해석해버린 모양이야. 따라서 아내는 그 이후로 내게 적의가 담긴 감시를 가하기 시작했지. 아니, 어쩌면 때로는 너에게도 나와 같은 경계를 보냈을지도 몰라.' 나 '그러고 보니 언젠가 네 아내가 서재서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지.' 미우라 '그렇지? 그런 짓은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 여자였어.' 우리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어두운 강수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도 우리의 놀잇배는 본래의 오우마야바시 밑을 지나 궤적을 밤의 강 속에 남기며 오각형의 가로수 부근까지 와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미우라가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길 '하지만 나는 아직 아내의 성실함을 의심하지 않았어. 그러니 내 마음이 아내한테 통하지 않는 점에서――통하지 않는 건 고사하고 되려 증오를 사버린 점에서 나는 더욱 괜한 번민을 했지. 너를 신바시에 부른 이후로 오늘에 이를 때까지 나는 시종 번민과 싸워야 했어. 하지만 일주일 쯤 전에 하녀의 과실로 아내에게 가야 할 우편이 내 서재로 온 거야. 나는 곧장 아내의 사촌 동생을 떠올렸지 그리고――그 편지를 열어보았어. 그러자 편지에는 생각지도 못한 다른 남자가 아내에게 보내는 연문이었던 거야. 바꿔 말하면 그 남자를 향한 아내의 애정도 역시 순수하지 못했던 거지. 물론 이 두 번째 타격은 첫 번째 타격보다 훨씬 무서운 힘을 가지고 나의 갖은 이상을 박살 냈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책임이 가벼워진 듯한 슬픈 위안의 감정을 맛본 것 또한 사실이었지.' 미우라가 이렇게 말을 마쳤을 때 건너편 강가의 나미쿠라 위에는 굉장히 붉은 십육야의 달이 처음으로 크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저는 방금 전 저 요시토시의 우키요에를 보고 양복을 입은 키쿠고로에게서 미우라를 떠올린 건 특히 저 붉은 달이 그 연극서 본 불을 품은 달과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색이 하얗고 선이 얇으며 긴 머리를 중앙서 가른 미우라는 저러한 달을 바라보며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쓸쓸한 미소를 두른 목소리로 '예전에 신푸렌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어린애 같다고 한 적이 있었지. 그럼 네 입장에선 내 결혼 생활도――' 나 '그래, 역시 어린 아이의 꿈이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표로 삼는 개화도 백 년 뒤에 보면 역시나 어린아이의 꿈이긴 매한가지지 않을까……'"
마침 혼다 자작이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어느 틈엔가 옆으로 다가 온 수위의 입을 통해 폐관 시간이 다가온 걸 전달받았다. 자작과 나는 천천히 일어나 다시 한 번 주위의 우키요에와 동판화를 둘러보고 살며시 으슥한 진열실을 나왔다. 마치 우리 자신도 그 유리 선반에 떠오른 과거의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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