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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사토 하루오

우리의 사계절감 - 사토 하루오

by noh0058 202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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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극락행은 포기했어."
 어느 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눈을 빛내며 내게 그런 말을 걸었다.
 "?" 분명 뒤에 재밌는 말이 이어지리라. 내가 그렇게 뒤를 기대하고 있자니 그는 말했다.
 "극락은 날씨가 사시사철 따듯하고 쾌적하고 계절 변화가 없다잖아. 계절 변화 없는 세계는 질색이야."
 정말로 아쿠타가와 다운 말이었다. 그는 하이진의 일면을 지녔고 하이쿠는 계절 변화를 주제로 삼는 문학이니 아쿠타가와가 계절 변화 없는 세계를 질색이라 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극락정토에는 계절 변화 이상으로 이를 보상해주는 수많은 정신적 쾌락이 있는 듯하나 그럼에도 아쿠타가와가 계절 변화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라 말하는 건 하이진이 아니더라도 모든 일본인이 동감해도 좋지 싶다.
 애당초 우리 국토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해 전세계서도 둘이나 찾아보기 힘든 계절 변화에 풍부한 곳이지 않은가.
 나는 이 넓은 세계서도 일본 이외에선 반 년 이상 살아 본 적이 없다. 우물 안 개구리의 헛소리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계절에 제각기 다양한 의상이 존재하는 건 세계 어떤 곳에 비해도 지나치게 많을 정도이다. 그런 사실을 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리 풍부하지 않음에도 의류만 발달한 건 우리나라의 계절 변화가 그만큼 미묘하기 때문이리라. 혹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계절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리라. 계절 변화가 많은 것도 또 그에 민감한 것도 결국은 같은 소리다. 그리고 그 때문에 계절 변화를 주제로 한 하이카이나 문학도 발달한 것이다.
 계절 변화에 민감한 건 우리나라가 본래 농업국이며 날씨나 사계절 추이에 따라 생활이 직결된다는 사실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 않나 싶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나라 국민이 풍부한 계절감을 지니고 자연과 그 생활에 저절로 시적 정서를 지니고 있단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으리라. 그렇기에 하이카이가 만들어져 발달한 것이리라.
 춘화추엽. 이는 눈이 즐겁고 피부에 닿는 공기가 상쾌하다. 나라의 봄과 사가의 가을을 쾌적하지 않다 말하는 일본인이 어디 있으랴. 푹푹 찌는 일본 여름에는 적잖이 힘들지만 그 또한 대도시의 빌딩이나 아스팔트 도로에 감도는 자동차 배기 가스서 빠져나와 아오타서 백로를 보고 매미의 녹음서 푸른 연못을 뜨는 일본의 자연 속에 놓인 마을의 여름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하얀 바탕의 여름옷을 검은 걸로 갈아입고 여름에서 가울로 바뀌는 추이만큼 쾌적한 것도 없을 터이다. 태풍이라는 버거운 건 있어도 지난날의 소나기구름과 습도는 흔적 없이 사라져 하늘은 질리는 법 없이 깊고 청명하다. 이는 거칠게 부는 태풍을 갚아주는 것이기도 하리라. 마음은 상쾌하고 땀은 마르며 벌레소리는 선명하여 등불은 그리운 몇몇 밤을 지나 홍엽비단이 하룻밤만에 떨어지고 창문앞의 산다화, 털머위의 우아한 꽃도 사라져 꽃은 팔손이가 되었다. 정원도 쓸쓸한데 가을새는 맞추기라도 한 듯이 협곡을 나와 마을의 작은 정원에 모여 부리의 옅은 얼음과 함께 가을이 다가오는 걸 알리는 이 시기지만 본래 온대인 우리나라서는 대한도 동장군도 크게 두려워할 게 없다.
 동장군도 대단할 게 없다. 북쪽문을 닫고 난로를 피우고 낡은 천을 두른다. 그걸로도 부족하면 소매 안에 두 손을 교차하고 목덜미에 털로 짠 머플러라도 두르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이다. 눈을 보며 마시는 술을 즐기지 못하는 몸이라도 햇빛은 받을 수 있다. 곱게 사는데 고생은 하더라도 쉽게 동사할 일은 없다. 파리마저 남쪽 문에 몸을 숨기고 삼동을 버틸 정도니까.
 더욱이 사계절의 바다와 산이 있으니 우리 일본인 대다수가 계절 변화를 기뻐하는 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나는 비가 많은 구마노 지방서 태어나 비를 아주 싫어하나 그럼에도 봄비, 여름 장마, 가을 소나기, 진눈깨비 등 사계절 제각기 다른 성격이 있으니 비도 조금은 못 즐길 게 없지 싶다.
 그런데 작년 남쪽 지방에 반 년 정도 종군하여 싱가폴, 자카르타, 수라바야, 말랑 등 각지를 전전転戦(단지 어슬렁거리기만 한 걸 종군답게 말해 보았다)한 적이 있었다.
 마침 그 지역의 우기가 끝나기 전이라 매일 같이 비가 내리는 일이 많았다.

우쟝우쟝
봄비도 가을비도 아니구나
줄줄 내리붓는 스콜도 아니구나
하늘에서 물이 미끄러지기만 하니
수리하라 대공의 빗방울
우쟝우쟝

 그런 말을 해가며 적적함을 위로한 적도 있었다. 우쟝은 그 지역의 말로 비를 뜻하는데 계절감을 두르지 않은 비에 지루한 느낌이 있었다.
 나만이 아니다. 다른 대다수의 일본인도 항상 같은 계절이라 감흥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카르타도 조금은 계절의 변화가 있었다. 단지 이 땅의 계절은 일 년 사계절이 아니라서 우리의 개념 하고는 달랐다. 이곳의 사계절은 매일에 조금씩 반복되어 아침이 봄이요 낮이 여름이요 저녁에서 밤까지 가을이고 밤중에 목욕이라도 하면 겨울도 맛볼 수 있다. 일 년의 사계절이 아니라 매일의 사계절이구나. 나는 이건 이것대로 즐거웠다. 나도 아쿠타가와 마찬가지로 계절감 없이는 만족할 수 없는 일본인 중 한 명이었으니까.
 생각하기로 일본인은 계절감이란 점에서 모두가 공통된 무언가가 있어서 같은 시간을 사며 계졀별 옷을 꺼내며 "세시기"를 손에 담는 게 아닐까.
 사계절 제각기 꽃이 있고 형태는 달라도 같은 계절끼리는 색조가 같은 것처럼 받아 들이는 방식이나 표현에 조금 차이는 있어도 같은 땅에 사는 우리의 계절감은 일맥상통하는 게 있음을 나는 이 란의 시문을 보고 당연히 또 재밌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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