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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사토 하루오

코이즈미 야쿠모에 관한 노트 - 사토 하루오

by noh0058 202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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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이즈미 야쿠모 전집을 읽고 가장 감탄한 것은 이 시인이 동시에 대단한 비평가였던 점이다. 마사오카 시키가 일부분서 대비평가를 겸비하던 것과 좋은 쌍을 이룬다. 이 사실은 얼핏 의외로 느껴져도 딱히 이상할 건 없다. 누구라도 한 사람으로서 대성할 정도라면 그만한 식견은 갖추기 마련이다. 그만한 식견을 지니지 못하는 사람은 설령 조금이나마 재능이 있더라도 일을 할 때마다 깎여나가기 마련이라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야쿠모는 누구나 알다시피 스스로를 교육해 온 사람이다. 요컨대 야쿠모를 그렇게 완성시킨 건 그의 안에 좋은 교사가 있고 또 그 교사에게 비평적인 일면이 있었기 때문이라 나는 생각한다. 야쿠모는 그가 해온 학교 강의 속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경계해야 하는 건 홀로 공부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병폐인 provincialism이다 운운(provincialism이란 말에 야쿠모가 적당한 주석을 붙였을 터인데 나는 잊고 말았다. 간단히 말하면 소위 투서가 기질이라 여기면 되리라.) 야쿠모는 그런 경계를 항상 스스로 잊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대학 강사 야쿠모는 결코 같은 강의를 두 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만 들어도 그가 근면한 학도였음을 알 수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두 번 다루었다는데 그 강의는 같은 내용을 다른 견해로 논했던 것이다.

 야쿠모는 이국 청년들에게 세계 문학의 최신 풍조를 전하면서 그 내용을 통해 문학의 본질에 닿으려 꾀하고 있다. 이는 실로 총명한 방식이다. 블레이크든 보들레르이든 고티에든 로세티든 스윈번이든 브라우닝이든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당시에는 일본은 물론이요 영미 독서계에서도 결코 보편적이지 않았던 듯하다. 심지어 야쿠모는 그 전부를 정확히 보며 적절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 미점을 꼽고 배워야 할 점을 짚은 것도 주목해야 한다. 학생을 위한 강의지 순수 문학 비평은 아니기에 그런 게 가능했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의 인품도 마은 가짐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믿기에 야쿠모는 만약 필요하다면 속되고 나쁜 문학에도 태연히 싸울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애처부터 그런 문제를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앞서 말한 것처럼 강의란 성질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딱 하나, 야쿠모는 휘트먼에게만큼은 찬성의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건 야쿠모를 연구할 적에 재미난 힌트가 되리라 생각하는데 나는 물론 공부가 부족하여 휘트먼을 충분히 알지 못하니 여기서는 말을 아끼겠다. 하지만 세기말 문학의 향기를 사랑하던 야쿠모니까, 그렇게 내재적인 세계에 눈을 두던 야쿠모니까, 기질로 따지자면 물론 휘트먼하고는 반대일 게 분명하다. 나는 단지 그렇게나 이해력이 넓은 야쿠모가 휘트먼의 미점을 기꺼이 용인하지 않았던 점에서 말할 뿐이다. 야쿠모는 그즘 일반적으로 문학자 사이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던 톨스토이의 "예술론"에도 귀를 기울였다. "어떤 여자의 일기"(란 제목으로 기억하는데 어떤 불행한 일본 여자가 결혼 전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내용을 쓴 것)을 소개한 야쿠모에겐 톨스토이의 예술론은 어떤 점에서 충분히 동감할 수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야쿠모는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처음엔 이국 문학에 관심을 느껴 이를 애독했다는데 끝내는 문학 세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걸 실행해버렸다. 그 또한 정말로 "영문학 기인전" 속 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산문시는 내가 보기에 그리 놀랄 정도는 아니다. 그의 줄곧 이어지는 일종의 구법을 지닌 문체는 아마 영문학 중에선 찾기 어려우리라. 평담하면서 맑은 것이 심지어 그 효과는 유현하다. 이는 일본 고문과 닮아 있다. 하지만 야쿠모는 그걸 일본 문학서 배운 게 아니다. 그의 극초기 문장서도 이미 그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일본 문과 대학을 마치 작가 양성소라 믿으며 문체를 주의해주고 문장의 세련된 작성법마저 교육한 그는 물론 일본 근대 문명을 정확히 고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단지 고전적 일본에서 자그마한 암시를 얻었다. 그리고 그 암시 안에서 홀로 그의 철학적 공상을 확장해 갔다. 그가 그리는 건 우리 일본이 아니라 야쿠모가 창조한 하늘 아래의 국토이다. 또 그러면서도 조금의 지장도 없다. 그렇게 그 국토에 살고 있던 사람은 우리 일본인이 아니라 야쿠모 그 사람뿐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인정하지 않고 야쿠모의 문학은 대단한 게 없다 말하더라도 그가 품격 높은 문인이었던 것만은 가장 존귀한 사실로 인정해야 할 테지. 나는 줄곧 이전부터 타베 씨의 손을 빌린 전기를 애독하여 야쿠모 및 그 부인에 대란 경애와 흠모의 뜻을 품고 있다. 내가 평소 쓰는 문인이라는 말의 진의를 알고 싶은 사람은 타베 류지 씨의 '코이즈미 야쿠모전'을 읽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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