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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매화에 대한 감상 - 이 저널리즘의 한 편을 근엄한 니시카와 에이지로 군에게 바친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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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기에 세상만사를 여실히 봐야만 한다. 적어도 만인의 안광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안광을 통해 봐야만 한다. 예로부터 위대한 예술가는 모두 이런 독자적인 안광을 지녀 저절로 독자적인 표현을 이루었다. 고흐의 해바라기의 사진판이 오늘날에도 애완 받는 건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닐 터이다.(GOGH를 고흐라 발음하는 걸 나무라지는 않길 바란다. 나는 ANDERSEN을 아나아센이라 부르지 않고 안데르센이라 부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는 예술을 사명으로 삼는 자에겐 하늘의 햇살보다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눈을 가지는 게 꼭 쉬운 일은 아니다.(아니 절대적인 독자의 눈을 지니는 건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특히 만인의 시에 이따금 들어가는 풍경을 볼 적에 독자적인 눈을 가지는 건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시험삼아 '늦봄"이란 말을 떠올려 보라. 부손이 "늦봄"을 읊은 후에 누가 독자적인 눈으로 "늦봄"을 읊고 있다 확신할 수 있으랴. 매화도 마찬가지다. 아니, 정확히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한다.
 매화는 이미 이세노모노가타리의 우타부터 하루노부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유미함을 그러냈다. 하지만 매화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마음을 사로잡는 건 중국에서 만들어진 문인취미이리라. 이는 단순히 나만 아니라 대부분의 군자 또한 마찬가지일 터이다.(츄오코론 기자도 '매화부'란 용어를 쓰지 않는가.) 매화를 단순히 사랑스러운  제누스 푸르너스로만 두는 건 서양 시인뿐이다. 우리는 매화 꽃잎 하나서도 학을 떠올리고 초승달을 연상하고 공산을 바라고 강을 동경하고 단각을 보고 서등을 놓고 수죽을 뻗고 푸른 안개를 생각하며 나부를 그리며, 선비를 기억하고 임처사의 풍류를 들을 수밖에 없다. 이것만 보아도 독자적인 안광으로 만물을 보려하는 우리 예술가가 매화에 호의를 느끼고 있음은 잘 알 수 있으리라.(이는 이미 나가이 후우 씨의 '일본 정원'의 한 장인 '매화' 안에서 밝혀진 진리이다. 문단은 시인 또한 심장 이외의 뇌수를 지녔단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게 내가 오늘 진리를 도용한 이유이다.)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문인취미를 환기한다는 건 이미 적은 바 있다. 하지만 허투루 나를 소위 문인으로 만드는 일은 없길 바란다. 나를 사기꾼으로 모는 건 괜찮다. 또 살인범으로 몰아도 괜찮다. 어쩔 수 없이 대학 교수의 적임자로 모는 것도 참아 줄 수 있다. 단지 나를 소위 문인으로 만드는 일은 없길 바란다. 십편십의의 존재가 타이가와 부손을 소위 문인으로 만들었다. 나는 설령 궁에 들어가더라도 이런 종류의 미치광이와 같은 선상에 놓이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나는 문인취미를 경멸하고 있다. 특히 카세이도에 유행한 문인취미를 경멸한다. 문인취미는 도락일 뿐이다. 도락으로 시작해 도락으로 끝난다. 하지만 만약 도락 이상의 딱지를 붙인다면 산요의 그림을 보는 게 제일이리라. 니혼가이시는 어찌 되었든 일부의 역사 소설이다. 그림에 이르러서는 이를 넘는 건 필경 츠쿠네이모의 산수뿐이리라. 더욱이 또 치쿠덴의 햐쿠쿠와츠이는 어떨까. 이를 만약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면 야스키부시도 예술이리라. 나는 물론 그들의 도락을 배척하려는 게 아니다. 나도 당시에 태어났다면 장난삼아 캇파반키의 그림을 그리고 산자수명을 보고 웃었을 게 분명하다. 또 그들 또한 총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도락을 그들의 예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항상 확신한다. 다이쇼의 유행과 예술을 알지 못하고 순수한 그들의 농담을 진지하게 기뻐하며 갈망할 때면 가장 먼저 웃음을 참지 못하는 건 그들 둘이 분명하리라고.
 매화는 내가 경멸하는 문인취미를 강하게 하며 하찮은 시를 떠올리게 매료한다. 나는 고독한 여행객이 깊은 산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이 매화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생각하기론 여행객이 주파의 기쁨을 느끼는 것 또한 항상 깊은 산일 터이다.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카비의 눈을 바라보는 서하객처럼 남극의 별을 올려다 보는 섀클턴처럼 무성한 남심을 금할 수가 없다.

 재를 버리자 흰 매화 원망하는 울타리려나

 덧붙이자면 본쵸는 우리를 위해 일찍부터 나루를 가르쳐주었다. 강을 서둘러 건너려는 나는 소년의 객기와 무엇이 다르랴.
 나는 독자적인 안광으로 매화를 보는 게 어렵기에 더더욱 독자적인 안광으로 매화를 보는 걸 바란다. 약간 패러독스를 건드려 보자면 매화에 냉담하기 짝이 없기에 매화에 열중할 수 있는 것이다. 고계의 시는 말한다. "경자지합재요대옥 자태는 신선 사는 요대에 있어야 하거늘 수양강변처처재누가 강남 땅 곳곳에 심었단 말인가" 또 말한다. "자거하낭무호영하랑이 떠난 뒤로는 잘 읊을 이 없나니 동풍수적기회개동풍에 쓸쓸히 몇 번이나 피었던가" 정말로 매화란 선인의 영애나 부자의 은거와 닮은 바 있다.(후자는 나가이 후우 씨의 비유이다. 전자와 모순되는 건 아니다.) 나의 문장이 부족하다면 그런 미인을 대하는 감개라 생각해주길 바란다. 또 더욱이 그대의 감개에 그저 젖기만 하는 걸로 그친다면 그대 또한 속된 것이며 구할 도리 없는 건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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