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어느 봄의 어두운 아침이었다. 히로코는 교토의 주차장에서 토교행 급행 열차를 탔다. 결혼 후 2년 만에 어머니의 건강을 살피기 위함이기도 했으며 외할아버지의 금혼식 1에 참석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물론 그 외의 용무도 존재했다. 그녀는 마침 이번 기회에 동생 타츠코의 연애 문제도 해결하고 싶었다. 동생의 희망을 이뤄주든 이뤄주지 않든 어찌 되었든 해결은 해야겠지 싶었다.
히로코가 이 문제를 알게 된 건 4, 5일 전 받은 타츠코의 편지를 읽었을 때였다. 히로코는 한창때인 동생에게 연애 문제가 생긴 걸 별로 의외로 여기지 않았다. 예상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도 당연하다는 생각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 연애 상대로 아츠스케로 골랐다는 말만큼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코는 기차서 흔들리는 지금도 아츠스케를 생각하면 어쩐지 동생과 자신 사이에 골이 생긴 것처럼만 느껴졌다.
아츠스케는 히로코에게도 얼굴이 익숙한 어느 서양화 연구생이었다. 처녀 시절의 그녀는 동생과 함께 이 화구 투성이의 청년을 남몰래 "원숭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실제로 얼굴이 붉고 묘하게 눈만 빛나고 있었다――즉 원숭이 같은 청년이었다. 그뿐 아니라 차림새도 빈곤했다. 그는 겨울에도 대학 교복에 낡은 우비를 걸치고 있었다. 히로코는 물론 아츠스케에게 어떠한 관심도 느끼지 못했다. 타츠코도――타츠코는 언니에 비하면 한 층 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혹은 되려 적극적으로 미워한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한 번은 전철에 탄 타츠코가 아츠스케 옆에 앉게 되었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불쾌해 했다. 또 그는 무릎 위에 신문 포장을 펼치고는 빵을 먹기 시작했다. 승객들의 눈은 서로 말을 맞춘 것처럼 아츠스케를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위로도 그 잔혹한 시선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유유히 빵을 먹어 갔다……
"야만인이야, 그 사람."
히로코는 그 일이 있은 후 타츠코가 그렇게 욕했던 걸 떠올렸다. 왜 그런 아츠스케를 사랑하게 되었는가?――히로코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생의 기질을 생각하면 한 번 아츠스케에게 사랑을 품으면 얼마나 정열로 불탈지 대강 상상이 되었다. 타츠코는 고지식한 아버지처럼 어떤 일에나 일직선으로 매달리는 기질이었다. 이를테면 유화를 시작했을 때에도 그녀는 가족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빠져들었다. 그녀는 화려한 그림의 화구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아츠스케와 같은 연구소에 매일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또 동시에 그녀의 방벽에는 반드시 한 주에 한 장씩 새로운 유화가 걸리기 시작했다. 유화는 육 호에서 팔 호 캔버스에 인체라면 얼굴만을, 풍경이라면 서양풍 건물을 그린 게 많은 듯했다. 히로코는 결혼 몇 달 전에――특히 깊어진 가을밤이면 그런 유화를 걸어둔 방에서 몇 시간이나 동생과 수다를 떨었다. 타츠코는 항상 열심히 고흐나 세잔의 이야기를 했다. 당시 어딘가에서 상영 중이었던 무샤노코지 씨의 희곡 이야기도 했다. 히로코도 미술이니 문예에 전혀 무심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상은 예술하고는 인연이 없는 미래의 생활 쪽으로 기울고는 했다. 그동안에도 눈은 책상 위 액자에 담긴 양파나 붕대를 감은 소녀 얼굴, 고구마 밭의 뒤로 이어진 감옥의 벽 따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그림은 무슨 주의야?"
히로코는 그렇게 물어 타츠코를 화나게 한 걸 떠올렸다. 물론 여동생이 화내는 건 보기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예술상 견해는 물론이요 생활상 문제서도 곧잘 의견 차이를 겪었다. 실제로 어느 날은 무샤노코지 씨의 희곡마저 말싸움의 계기가 되었다. 그 희곡은 실명한 오빠를 위해 희생적 결혼을 마지않는 여동생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히로코는 그 상연을 보았을 때부터(그녀는 어지간히 지루하지 않는 한 소설이나 희곡을 읽지 않았다.) 예술가 기질을 가진 오빠를 좋아하지 않았다. 설령 실명했더라도 안마든 뭐든 하면 되건만 여동생을 희생하는 건 이기주의자라 단언했다. 타츠코는 언니와 반대로 오빠에게도 동생에게도 동정했다. 언니의 의견은 엄숙한 비극을 일부러 희극으로 번역하려 드는 세상 사람들의 나쁜 기질이라 말했다. 이런 논쟁 끝에 두 사람은 단단히 화가 났다. 하지만 먼저 화를 내는 건 항상 타츠코 쪽이었다. 히로코는 그 점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느끼곤 했다. 그건 타츠코보다도 인간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단 우월함이었다. 혹은 타츠코만큼 공허한 이상에 사로 잡혀 있지 않다는 우월감이었다.
"언니. 부디 오늘밤만은 본래의 언니가 되어주세요. 총명한 평소의 언니가 아니라."
세 번째로 히로코가 떠올린 건 동생의 편지 속에 담긴 한 줄이었다. 그 편지는 여전히 하얀 종이에 얇은 펜 글자로 가득했다. 하지만 아츠스케와의 관계는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단지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건 자신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간단한 사실 뿐이었다. 히로코는 물론 행간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읽어내려 했다. 또 그렇게 생각하고 읽으면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도 모두 자신의 억측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히로코는 지금도 종잡을 수 없는 짜증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어딘가 우울한 아츠스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불쑥 아츠스케의 냄새――아츠스케의 몸이 내뿜는 냄새는 마른 풀과 닮은 듯했다. 그녀의 경험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마른 풀 냄새가 나는 남성은 대개 비루한 동물적 본능으로 풍부한 듯했다. 히로코는 그런 아츠스케와 함께 순수한 여동생을 생각하는 게 도무지 갑갑했다.
히로코의 연상은 멈출 수 없는 흐름처럼 흘렀다. 그녀는 기차의 창가에 무릎을 놓은 채로 이따금 창밖을 보았다. 기차는 아름다운 국경에 가까운 오우미의 산골짜기를 달리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대나무숲이나 삼나무 사이에 하얀 벚꽃이 피어 있는 게 보였다. "이 주변은 어지간히 추워 보이네"――히로코는 어느 틈엔가 산바람에 벚꽃이 지는 걸 떠올렸다.
둘
히로코는 도쿄로 돌아온 후, 볼일이 많았던 탓에 이삼일가량 동생과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지 못 했다. 겨우 기회가 생긴 건 외할아버지의 금혼식에서 돌아온 밤 열 시 경이었다. 동생의 방에는 여전히 유화가 걸려 있었고 다다미 위에 놓인 둥근 탁자 위에도 노란 지붕이 달린 전등이 2년 전과 같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히로코는 잠옷 차림으로 갈아입고서 하오리만 몬이 있는 걸로 걸친 채로 탁자 앞 안락의자에 앉았다.
"차 내올게."
타츠코는 언니의 반대편에 앉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됐어――정말 필요 없단 뜻이야."
"그럼 홍차라도 내올까?"
"홍차도 됐어――그보다 그 이야기 좀 들려줘."
히로코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되도록 가볍게 말했다. 가볍게 말했다는 건 그녀의 감정을――꽤나 복잡한 음영을 두른 호기심이나 비난 혹은 또 동정을 들키지 않기 위함도 있는가 하면 피고인이라도 된 듯한 여동생의 기분을 편하게 해주고 싶단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츠코는 생각보다 곤란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기색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다면 그건 까무잡잡한 얼굴 어딘가에 거의 눈도 두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의 색이 담겨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래. 나도 언니가 꼭 들어줬으면 해."
히로코는 내심 프롤로그가 간단히 끝난 사실에 만족했다. 하지만 타츠오는 그렇게 운을 뗀 후로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히로코는 동생의 침묵을 이야기하기 꺼려 하는 걸로 해석했다. 하지만 동생을 재촉하는 건 조금 잔혹한 거 같았다. 또 동시에 그런 여동생의 수치를 향락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히로코는 안락의자 등받이에 서양식 머릿결을 내린 채로 당장의 문제와 관계없는 감탄사를 했다.
"꼭 옛날로 돌아간 거 같다. 이 의자에 이렇게 앉아 있으니 말야."
히로코는 자신의 말에서 소녀와 같은 감동을 느끼면서 황홀함에 젖은 눈초리로 방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의자도 전등도 탁자도 벽에 걸린 유화도 과거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무언가 신비한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무언가?――히로코는 곧장 이 변화를 유화 위에서 발견했다. 책상 위의 양파니 붕대를 한 소녀의 얼굴이니 고구마밭 너머의 감옥이니 하는 게 어느 틈엔가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혹은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2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부드럽고 밝은 호흡을 하고 있었다. 특히 히로코는 정면에 있는 한 장의 유화서 새로움을 느꼈다. 그건 어딘가의 정원을 묘사한 듯한 6호 가량의 작은 그림이었다. 하얗게 내린 이끼에 덮인 나무와 가지에 핀 등나무 꽃과 나무 사이서 희미하게 보이는 연못과――그림에는 그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어느 그림보다도 차분한 밝음이 떠올라 있었다.
"저기 있는 것도 네 그림이야?"
타츠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언니가 가리킨 그림을 추측했다.
"저 그림? 저건 오오무라 거야."
오오무라란 아츠스케의 성이었다. 히로코는 "오오무라 거"란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순간 부러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타츠코는 아랑곳 않고 하오리 끈을 만지작거리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시골집 정원을 그린 거래――오오무라네 집은 옛 귀족 출신이래."
"지금은 뭐 한다는데?"
"현회의원 같은 거라나. 은행이나 회사도 가지고 있나 봐."
"삼남이나 사남?"
"장남――이라 해도 되나? 외동이래."
히로코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어느 틈엔가 당장의 문제로 들어가기 시작한 걸――좀 더 정확히는 되려 일부분이 해결된 걸 알아차렸다. 이번 사건을 들은 이후로 그녀가 마음에 걸려 했던 건 역시 아츠스케의 신분이었다. 특히 빈곤한 그의 차림새는 이 세속적 문제에 한 층 더 무게를 주었다. 두 사람의 문답은 그런 걱정을 적당히 치워버린 것이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히로코는 불쑥 농담할 여유가 생겼다.
"그럼 훌륭한 남편이네."
"그래. 단지 조금 보헤미안적인 부분이 있어서 말야. 하숙도 묘한 곳을 잡고 있더라고. 옷가게 창고 2층을 빌리고 있지 뭐야."
타츠코는 거의 교활하게 언니에게 웃어 보였다. 히로코는 이 웃음 속에서 불쑥 한 사람의 여자를 보았다. 물론 이는 도쿄역을 마중 나온 동생을 봤을 때부터 이따금 의식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또렷이 초점이 맞지는 않았다. 히로코는 그러한 인식 속에서 아츠스케와 타츠코의 관계에 조금의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너도 거기 가본 적 있어?"
"그래, 이따금 갔지."
히로코의 연상은 결혼 전의 어느 밤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는 그 밤 목욕을 하면서 날이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빈이 가지 않게 몸 상태를 묻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 밤의 어머니처럼 담백한 태도를 드러내지 못 했던 그녀는 지금도 가만히 여동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츠코는 여전히 침착하게 웃으면서 눈부시다는 양 노란 뚜껑이 달린 전등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子
"그래도 괜찮은 거야?"
"오오무라가?"
"아뇨, 네가. 오해라도 받으면 민폐 아니야?"
"어차피 오해는 받을 수밖에 없어. 연구소 녀석들이 오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히로코는 조금 짜증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동생의 태도가 연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생겼다. 그러자 타츠코는 만지작거리던 하오리 끈을 던지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허락해줄까?"
히로코는 다시 한 번 짜증을 느꼈다. 그건 이렇다 할 감정 변화가 없는 동생을 향한 짜증이기도 한 한편으로 점점 수세에 몰리는 자신을 향한 짜증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츠스케의 유화에 내키지 않는 시선을 보낸 채로 "그러게"하고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
"언니가 말 좀 해주면 안 돼?"
타츠코는 살짝 어리광 부려 히로코의 시선을 붙들려 했다.
"내가 이야기해본들――나도 너희 연애는 잘 모르고."
"그래서 들어 달라고 한 거 아냐. 그런데 언니는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고."
히로코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타츠코가 한동안 말을 안 한 걸 이야기하는 걸 어려워한다 해석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침묵은 어렵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할 틈을 살피며 언니가 먼저 운을 떼는 걸 기다리는 듯했다. 물론 히로코는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장 동생의 말을 이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머, 너야말로 이야기 안 한 거 아니니?――그럼 다 털어놔봐. 그럼 듣고 생각해 볼 테니까."
"그래? 그럼 일단 이야기해볼까. 대신에 비꼬거나 그러면 안 된다?"
타츠코는 언니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자신의 연애 문제를 이야기했다. 히로코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따금 대신하는 대신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론 그 동안에도 끝없이 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한 문제는 두 사람의 연애가 무엇으로 생겨났는가. 또 하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진전되었나. 하지만 솔직한 여동생의 이야기도 첫 번째 문제는 조금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타츠코는 단지 아츠스케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친해졌으며 또 어느 틈엔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단다. 그뿐 아니라 두 번째 문제도 역시 확실하지 않았다. 타츠코는 남일처럼 그가 구혼했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그건 서정시라기 보다 되려 희극에 가까웠다――
"오오무라는 전화로 구혼했어. 웃기지? 듣자하니 그림을 망쳐서 다다미 위에서 구르고 있었더니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대. 갑자기 어떠냐고 물으니까 답하기 어려운 거 있지? 더군다나 그때는 전화실 밖에 엄마도 있잖아? 방법이 없어서 그냥 oui, oui 해버렸지……"
그러고?――그 후로도 여동생의 이야기는 경쾌하게 사건을 쫓아갔다. 두 사람은 같이 전시회를 보고 식물원에 그림을 그리러 가고 어느 독일의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러 가곤 했다. 확실히 타츠코의 말만 믿으면 두 사람은 친구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히로코는 방심치 않고 동생의 얼굴을 살피거나 이야기의 뒤편을 생각하거나 한두 번 떠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타츠코는 전등빛에서 침착한 눈동자를 드리우며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
"뭐, 대강 이런 느낌이야――아, 그리고 언니한테 편지 보낸 거 말야. 그건 오오무라한테도 이야기해뒀어."
히로코는 여동생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물론 부족함을 느꼈다. 하지만 대강 밝혀낸 걸 들으면 더 이상 두 번째 문제를 깊게 파고 드는 건 불가능한 듯했다. 그녀는 도리 없이 첫 번째 문제에 매달렸다.
"근데 너 그 사람은 싫다 그랬잖아."
히로코는 어느 틈엔가 자신의 목소리에 도전하는 기미가 담긴 걸 자각했다. 하지만 타츠코는 그 물음에도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오오무라도 내가 엄청 싫었대. 진 칵테일 같은 걸 마실 거 같았다나."
"그런 걸 마시는 사람이 있어?"
"그야 왜 없겠어. 남자처럼 편하게 앉아서는 화투치는 사람도 있는데."
"너희 세대는 다 그러니?"
"그럴지도 모른단 거지……"
타츠코는 언니의 예상보다도 훨씬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하면 곧 작게 웃고는 다시 한 번 화두를 돌렸다.
"그보다도 내 문제말야, 언니가 이야기 좀 해주면 안 돼?"
"그야 못 할 건 없지. 못 할 건 없는데――"
히로코는 세상의 모든 언니처럼 충고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타츠코는 그보다 먼저 이야기를 잘랐다.
"하긴 오오무라를 모르니까――그럼 언니, 요 며칠 안에 오오무라랑 만나보지 않을래? 오오무라도 기뻐할 거야."
히로코는 그런 화제 전환에 저도 모르게 오오무라의 유화를 보았다. 등나무 꽃은 이끼 낀 나무 사이서 어째서인지 전보다도 더 밝게 보였다. 그녀는 순간 마음속에 과거의 '원숭이'를 떠올리며 애매하게 "그러게"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타츠코는 "그러네" 정도론 만족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럼 만나주는 거지? 오오무라의 하숙집은 어때?"
"못 들어가는 거 아냐?"
"그럼 여기로 부를까? 그것도 어쩐지 우스운데."
"그 사람 전에도 와본 적 있니?"
"아니, 아직 한 번도 안 왔어. 그래서 어쩐지 웃기다는 거야. 그럼――그럼 이렇게 할까? 오오무라는 모레 효케이칸에 그림 보러 가거든. 그 시각에 언니도 효케이칸에 가서 오오무라를 보는 거야.
"그러게. 나도 모레라면 마침 성묘 가는 김에 갈 수 있고……"
히로코는 실수로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하지만 타츠코는 이미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얼굴에 기쁨을 두르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래주라. 오오무라한텐 내가 전화해둘게."
히로코는 동생의 얼굴을 보고 어느 틈엔가 동생의 뜻이 선가를 부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 발견은 그녀의 의무심보다도 그녀의 자존심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동생의 기쁨에 편승하여 그들의 비밀에 파고 들려 했다. 하지만 타츠코는 그 순간――언니의 입술이 움직이려는 걸 본 순간에 대뜸 몸을 내밀더니 하얀분칠을 한 히로코의 뺨에 큰 소리로 키스를 했다. 히로코는 여동생에게 키스를 받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그건 아직 타츠코가 유치원에나 다닐 적이었다. 그녀는 그런 동생의 키스에 놀라기보단 되려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러한 충격은 물론 파도처럼 그녀의 마음을 두드려 무너트렸고 그녀는 반쯤 웃는 눈으로 동생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야?"
"그치만 진짜 기쁜걸."
타츠코는 탁상 위에 몸을 뻗은 채로 노란 전둥의 뚜껑 너머로 까무잡잡한 얼굴을 빛냈다.
"그래도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언니는 분명 우리를 위해 뭐라도 해줄 거라고――실은 어제도 오오무라랑 하루 종일 언니 이야기만 했거든. 그래서……"
"그래서?"
타츠코의 눈엔 마치 장난끼 많은 아이의 빛이 담겼다.
"그냥 그걸로 끝이야."
셋
히로코는 화장도구나 잡화를 넣은 은세공 가방을 든 채로 몇 년 동안 거의 온 적 없는 효케이칸의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마음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도 조용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침착함 밑바닥에 약간의 장난기를 의식하고 있다. 몇 년 전의 그녀였다면 그건 어쩌면 조심스러움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조심스러움보다 되려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어느 틈엔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자신의 육체를 느끼며 밝은 복도의 끝에 있는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나선형 계단을 다 오르니 낮임에도 어두운 제1실이 나왔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파란 자개를 덮은 고대 악기나 고대 병풍을 발견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아츠스케의 모습은 아쉽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히로코는 진열 선반에 자리한 유리에 자신의 머리 모양을 확인하고는 역시 별반 서두르는 법 없이 옆에 있는 제2실로 발을 옮겼다.
제2실은 천장에 조명을 밝힌 가로보단 세로로 긴 방이었다. 또 그런 긴 방의 양옆을 유리로 매워둔 건 후지와라나 가마쿠라 같은 곳의 쓸쓸한 불교 그림 투성이었다. 아츠스케는 오늘도 교복 위에 여우색 클레버 넷을 걸치고 이 사절과 닮은 방 안에서 홀로 걷고 있었다. 히로코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적의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받아들일 가치 없는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그는 그때엔 이미 히로코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히로코는 그의 얼굴이나 태도서 과거의 '원숭이'를 느꼈다. 또 동시에 가벼운 경멸을 느꼈다. 그는 히로코를 바라보며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그 묘하게 침착하지 못한 분위기는 확실히 연애나 로맨스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히로코는 눈만으로 웃으며 그런 동생의 연인 앞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오오무라 씨죠? 저는――알고 계시죠?"
아츠스케는 단지 "네"라고만 대답했다. 그녀는 이 "네" 속에서 그의 또렷한 당황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이 순간에 그의 층이 진 코나 금니, 왼쪽 관자놀이의 면도 상처, 바지의 무릎 부분이 늘어진 것――그 외에도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색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히 시원하기만 했다.
"오늘은 제멋대로 부탁해서 민폐였죠? 실례지 싶었는데 동생이 계속 권해서……"
히로코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리놀륨 바닥에는 몇 개의 벤치도 등을 마주한 채 놓여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앉는 건 되려 시선을 끌 듯했다. 시선?――두 사람의 앞뒤에는 관람객 서너 명이 지금도 후겐이나 몬쥬 앞에서 가만히 서있거나 걸어 다니곤 했다.
"여쭈고 싶은 게 많은데――좀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네, 그러시죠."
히로코는 한동안 말없이 천천히 신발을 옮겨 갔다. 이 침묵은 확실히 아츠스케에겐 정신적 고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한 번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기침은 천장의 유리에 크게 반향했다. 그는 그 반향에 겁을 먹은 건지 역시 아무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히로코는 이런 그의 고통에 조금의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어떤 모순도 없이 약간의 향락 또한 느꼈다. 물론 수위나 관람객이 이따금 힐끔 보는 건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연령상――보다 정확히는 복장상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하는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놓고서 불안해하는 아츠스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쩌면 그녀의 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이라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과 오십 보 백 보인 건 분명했다……
"대단한 걸 물으려는 건 아닌데요――"
그녀는 제2실을 나가려 할 때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 집에는 어머니 한 분 뿐이신데 그쪽도――그쪽은 두 분 모두 안녕하신가요?"
"아뇨, 아버지뿐이십니다."
"아버님만. 형제자매는 없으시고요?"
"네, 저 혼자에요."
두 사람은 제2실을 나왔다. 제2실 바깥은 둥근 천장 아래에 좌우의 발코니가 놓인 방이었다. 방도 물론 원형이었다. 원형은 그대로 폭도 정도의 폭을 주위에 빙글 두른 채로 하얀 대리석 난간 밑으로 저 먼 아래의 현관을 얼핏 드러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대리석 난간 밖을 돌면서 아츠스케의 가족이나 친척, 교우 관계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묻기 어려운 부분도 교묘하게 캐물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자신이나 타츠코의 가정 사정에는 침묵했다. 그건 분명 처음부터 상대를 어린애라 얕보며 타산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어린애가 아니라면 아츠스케 또한 좀 더 두 사람의 가족 이야기를 들으려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럼 친구는 얼마 없는 거군요?"(미완)
- 결혼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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