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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오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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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겐나인가 칸에이인가. 어찌 되었든 먼 옛날의 일이다.
 그 시절에도 천주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발견하는 족족 불로 태우거나 창으로 찔러 죽였다. 하지만 박해가 심해지는 만큼 "만사를 이루어주시는 주님"도 그 시절에는 한층 더 이 나라의 신자들에게 널리 가호를 내리셨던 모양이다. 나가사키 주변의 마을에는 이따금 지는 해의 빛과 함께 천사나 사도가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실제로 그  죠안 바치스타세례자 요한마저  한 번은 우라카미의 신자 미겔 야헤이의 물레방앗간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동시에 악마 도한 종교의 정진을 막기 위해 때로는 익숙지 않은 흑인이 되어 때로는 배를 타고 건너 온 풀과 꽃이 되어 때로는 아지로카고가 되어 이따금 같은 마을에 출몰했다. 밤낮을 구분치 않는 흙감옥에서 미겔 야헤이를 괴롭혔던 쥐마저도 실은 악마가 변한 모습이라고 한다. 야헤이는 겐나이 8년 가을 11명의 신자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그런 겐나인지 칸에이인지 되는 어찌 되었든 먼 옛날의 일이다.
 역시나 우라카미의 산골마을에 오긴이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오긴의 부모는 오사카에서 먼 나가사키까지 흘러들었다. 하지만 이렇다 이룬 것도 없이 오긴을 혼자 남긴 채로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다른 지방에서 천주의 가르침을 알 리도 없었다. 그들이 믿던 건 불교이다. 젠인가, 홋케인가, 그도 아니면 죠도인가. 어찌 되었든 석가의 가르침이다. 프랑스의 어느 예수회 사람에 따르면 간사한 지혜를 타고난 석가는 중국 각지를 유랑하며 아미다라는 불도를 설파했다. 그 후 다시 일본을 찾아 역시나 같은 길을 가르쳤다. 석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영혼아니마는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어떤 자는 새가 되고 어떤 자는 소가 되고 또 어떤 자는 나무가 된다고 한다. 또 석가는 태어날 적에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한다. 석가의 가르침이 황당무계한 건 물론 석가가 커다란 악이기 때문임이 명백하다.(쟝 크라쎄) 하지만 오긴의 어머니는 앞서도 조금 적은 것처럼 그런 진실을 알 리도 없었다. 그들은 숨을 거둔 후에도 석가의 가르침을 믿고 있다. 쓸쓸한 묘지의 소나무 뒤에서 끝내는 '인헤루노지옥'에 떨어질 걸 알지 못한 채 덧없는 극락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오긴은 다행히도 부모님의 무지에 물들지 않았다. 산골마을에 사는 농부이자 자비심 깊은 죠안주앙 마고시치는 이 어린 소녀의 이마에 바프치즈모침례의 물을 붓고 마리야마리아란 이름을 주었다. 오긴은 석가모니가 태어나면서 하늘과 땅을 가르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사자후한 걸 믿지 않는다. 대신 "한없이 유연하시고 더할 나위 없이 자애로우시고 아름다우신 처녀 산타 마리야성 마리아 님"을 자연스레 당연한 일이라 믿고 있다.  "십자가에 걸려 돌아가시고 돌로 된 관에 담기셔" 대지의 밑바닥에 묻힌 제스스예수께서 사흘 후 되살아나신 걸 믿고 있다. 규명의 나팔이 울리면 "위대한 위광, 위대한 위세로 천하를 두르시어 흙먼지가 될 사람들의 몸을 본래의 영혼아니마에 맞추어 되살아나게 하시어 선인은 천상의 쾌락을 맛보고 또 악인은 텐구와 함게 지옥에 떨어지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있다.  특히 "말씀은 성덕과 같고 빵과 술은 형태는 달라도 그 정체는 주님의 피와 살과 다름없"는 사가라멘토성찬이라 믿고 있다. 오긴의 마음은 부모와 달리 뜨거운 바람이 부는 사막이라 할 수 없었다. 소박한 들장미꽃이 섞인 실로 풍부한 밀밭이었다. 오긴은 부모를 잃은 후 죠안 마고시치의 양녀가 되었다. 마고시치의 아내 죠안나 오스미 또한 역시 상냥한 사람이었다. 오긴은 이 부부와 함께 소를 기르고 밀을 자르는 등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물론 그런 생활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의 눈에 들지 않게 단식을 하고 기도 올리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긴은 우물 구석에 핀 무화과 옆에서 커다란 초승달을 올려보며 잠시 열성적인 기도를 올렸다. 타레가미를 한 이 여자아이의 기도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

 "애처로운 어머니께 인사 올립니다. 떠돌이가 되어버린 에와의 아이가 어머니께 기도합니다. 부디 이 눈물의 계곡에 유연히 그 시선을 내려주시옵소서. 안메이아멘."
 그러던 어느 해의 나타라(성탄제크리스마스)의 밤, 악마는 몇 명의 관아 사람과 함께 불쑥 마고시치의 집을 찾아왔다. 마고시치의 집에선 커다란 이로리에 "새벽까지 타고 있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또 그을려진 벽 위에도 오늘밤만은 십자가가 걸려 있다. 마지막으로 뒤에 있는 외양간으로 향하니 제스스 님의 목욕물이 구유통에 채워져 있었다.  관리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고시치 부부를 붙잡았다. 오긴도 동시에 붙들렸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반성하는 기색은 없었다. 영혼아니마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괴로움도 각오해두었다. 주님은 반드시 자신들을 위해 가호를 내려줄 게 분명했다. 애당초 나타라 밤에 붙잡힌다는 건 하늘의 은총을 받고 있단 증거 아닌가? 그들은 서로 말을 맞춘 것처럼 이렇게 확신하였다. 관리는 그들을 묶은 후 타이칸의 저택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그들은 그 도중에도 어두운 밤의 바람을 맞으며 부활의 기도를 읊었다.
 "베렌의 나라서 태어난 주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저희를 어여삐 여겨주시옵소서."
 악마는 그들이 붙잡힌 걸 보고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의 독실함에는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악마는 홀로 남은 후 불쾌해다는 양 침을 내뱉고는 곧 커다란 맷돌이 되었다. 그리고 데굴데굴 구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죠안 마고시치, 죠안나 오스미, 마리야 오긴 세 사람은 감옥에 던져져 천주의 가르침을 버리도록 여러 괴로운 꼴을 보았다. 하지만 물고문이나 불고문을 해도 그들의 결심은 움직이지 않았다. 설령 가죽과 살이 문드러져도 조금만 참으면 하라이소천국의 문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천주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 어두운 감옥마저 '하라이소'의 장엄함과 다를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존귀한 천사나 성인들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 가지 않는 사이에 이따금 그들을 위로하러 찾아왔다. 특히 그런 행복은 오긴한테 가장 많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오긴은 상 죠안 바치스타가 큰 두 손바닥에 메뚜기를 가득 담아 먹으라고 말하고는 했다. 또 대천사 가부리에르가 하얀 날개를 접은 채로 아름다운 금색 잔에 물을 담아준 걸 보았다.
 다이칸은 천주의 가르침은 물론 석가의 가르침도 알지 못 했으니 왜 이들이 이렇게나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때로는 세 사람 모두 미치광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미치광이가 아니란 걸 알게 되자 이번에는 오로치나 일각수처럼 어찌 되었든 인간이 접할 일 없는 동물인 것만 같았다. 그런 동물을 살려두면 오늘날의 법률에 문제가 생기는 건 물론이요 한 나라의 안위에 얽힌 일이 된다. 때문에 다이칸은 그들을 한 달 가량 감옥에 가둬둔 후 기어코 세 사람 모두 태워 죽이기로 했다.(사실 이 타이칸도 세간의 일반 사람들처럼 한 나라의 안위 같은 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무엇보다 법률문제며 다음으로 인민의 도덕 문제이니 일부러 생각해보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죠안 마고시치를 시작으로 한 세 신도는 마을 외각의 처형장에 끌려가는 도중에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형장은 마침 묘지와 접한 돌이 많은 공터였다. 셋은 그곳에 도착한 후 하나하나 형장을 들으며 두터운 각기둥에 붙들렸다. 그리고 오른쪽에 죠안나 오스미, 중앙에 죠안 마고시치, 왼쪽에 마리야 오긴이란 순서로 형장에 세워졌다. 오스미는 연이어진 고문 탓에 갑자기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였다. 마고시치도 수염이 자란 뺨에는 거의 핏기가 돌지 않았다. 오긴도――오긴은 두 사람에 비하면 그나마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세 사람 모두 높게 쌓인 장작을 밟은 채로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장 주위에는 아까부터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또 그 구경꾼 너머의 하늘에는 묘지의 소나무가 대여섯 그루 천장처럼 가지를 뻗고 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관리 중 한 사람은 장엄하게 세 사람 앞에 나서서는 천주의 가르침을 버릴지 버리지 않을지 한동안 유예를 줄 테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아라. 만약 가르침을 버린다면 곧장 줄을 풀어주겠다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답하지 않았다. 모두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관리는 물론이요 구경꾼마저 이 몇 분 동안은 소곤거리는 법 하나 없었다. 무수한 눈은 가만히 깜빡이지도 않은 채 세 사람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안타까운 나머지 모두가 숨을 삼킨 게 아니다. 구경꾼은 대개 언제쯤 불이 붙을까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는 처형에 수고를 들이는 게 지루해져 이야기를 할 용기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불숙 일동의 귀에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저는 가르침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오긴의 목소리였다. 구경꾼은 단숨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웅성인 후 다시 곧장 조용해져 버렸다. 그건 마고시치가 슬픈 얼굴로 오긴을 돌아보며 힘없는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오긴! 악마한테 속아 넘어간 거냐? 조금만 더 참으면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스미 또한 오긴을 향해 열심히 목소리 높였다.
 "오긴! 오긴! 너는 지금 악마한테 사로잡힌 거야. 기도해주렴. 기도해주렴."
 하지만 오긴은 답하지 않는다. 단지 눈은 수많은 구경꾼 너머, 천장처럼 가지를 뻗은 묘지의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사이 관리 중 하나는 오긴의 밧줄을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죠안 마고시치는 그걸 보고 포기한 듯이 눈을 감았다
 "만사를 이루어주시는 주님, 주님께 계획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겨우 밧줄이 풀린 오긴은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하지만 마고시치나 오스미를 보고는 불쑥 그 앞에 주저 앉아서는 아무 말도 않고 눈물을 흘렸다. 마고시치는 역시 눈을 감고 있다. 오스미도 고개를 돌린 채로 오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아버님, 어머님, 부디 참으셔야 합니다."
 오긴은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가르침을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문득 저 너머서 보이는 천장과 같은 소나무 가지에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저 묘지의 소나무 뒤에 묻히신 저희 친부모님께서는 천주의 가르침도 알지 못하시니 분명 지금쯤 인헤루노에 떨어지셨겠지요. 그런데 저 혼자 하라이소의 문에 들어설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지옥 밑바닥으로 부모님의 뒤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부디 아버님과 어머님은 제스스 님이나 마리야 님의 옆으로 가주시지요. 대신 저도 가르침을 버린 이상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긴은 띄엄띄엄 그렇게 말하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죠안나 오스미 또한 밟고 있는 장작 위로 뚝뚝 눈물을 떨어트렸다. 이제부터 하라이소에 들어가 건만 이유도 없이 한탄에 잠기는 건 물론 신도로서 옳지 못하다.죠안 마고시치는 괴롭게 옆의 아내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여 혼을 냈다.
 "너도 악마에 매료되었느냐? 천주의 가르침을 버리려면 너 혼자 버려라. 나는 혼자서라도 타 죽울 테다."
 "아뇨, 저도 같이 죽겠어요. 하지만 그건――그건."
 오스미는 눈물을 머금고는 반쯤 외치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하라이소에 가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당신과――당신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고시치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거나 다시 혈기가 돌고는 했다. 또 동시에 땀방울도 뚝뚝 얼굴을 적셔 갔다. 마고시치는 지금 마음속눈으로 자신의 영혼아니마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영혼아니마을 두고 다투는 천사와 악마를 보고 있었다. 만약 그때 발밑의 오긴이 울며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아니, 오긴은 이미 고개를 들었다. 심지어 눈물로 젖은 눈동자에는 신비한 빛이 감돈 채로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이 눈의 안쪽에서 빛나는 건 순수한 아이의 마음만이 아니다. "떠돌이가 되어버린 에와의 아이", 갖은 인간의 마음이었다.
 "아버님! 인헤루노에 가죠. 어머님도 저도, 저희 친아버님도 친어머님도――모두 악마에게 사로잡혀 버리는 거예요."
 마고시치는 기어코 타락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많은 기독교인의 수난 중에서도 가장 부끄러워할 내용으로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다. 풍문으로는 세 사람이 가르침을 버렸을 때에는 천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구경꾼들마저 하나같이 그들을 미워했다고 한다. 이건 모처럼 생긴 구경거리가 허탕이 되어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또 어떤 말에 따르면 악마는 그때 크게 기뻐한 나머지 커다란 서적이 되어 한밤중의 형장을 날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나 기뻐할 정도로 악마가 성공한 것인가. 작가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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