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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히나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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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어느 노파의 이야기다.

 ……요코하마에 사는 어느 미국인에게 히나 인형을 파는 약속을 하게 된 건 11월 경의 일이었습니다. 키노쿠니야라는 저희 집안은 대대로 각 다이묘의 어용상인을 맡았고 특히 시치쿠 할아버지께서는 다이츠 중 한 명이셨으니 히나는 제가 보아도 꽤나 잘 만들어져 있었지요. 특히 다이리비나는 여자 히나 인형은 왕관의 영락에도 산호를 쓰고 있고 남자 히나 인형은 시오제 세키타이에도 죠몬과 카에몬이 엇갈리게 누벼져 있는 그런 히나였지요.
 그마저도 팔라니 저희 아버지 12대 키노쿠니야 이헤이가 어느 정도 괴로워했는지 대강 추측이 가리라 봅니다. 그럴 만도 한 게 도쿠카와 가문의 와해 이후로 어용금을 내려주신 건 카슈 님 뿐이셨으니까요. 그마저도 삼천 량의 어용금 중 백 량 밖에 주지 않으셨지요. 인슈 님 같은 경우엔 사백 량의 어용금 대신에 아카마의 돌벼루 하나를 내려주시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 데다가 화재는 두세 번이나 겪었고 박쥐 우산 같은 것도 팔아보았지만 다들 곧잘 실수하고는 했죠. 당시에는 그럴싸한 도구도 당장 가족들이 먹고 살기 위해 팔던 처지였습니다.
 그때 히나라도 파는 게 어떠냐며 아버지께 권한 게 마루사라는 골동품점의……이미 고인이 되셨는데 머리가 벗어진 주인이셨습니다. 이 마루사의 벗어진 머리만큼 우스운 것도 없지요. 무슨 말이냐면 민머리 안에 마치 안마용 고약이라도 바른 것마냥 문신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듣자 하니 어릴 적에 벗겨진 걸 감추려고 새긴 거라는데 아쉽게도 그 뒤통수도 고스란히 벗겨져 정수리의 문신만 남게 되었다는군요……어찌 되었든 아버지는 아직 열다섯 먹은 저를 불쌍하게 여긴 걸 테죠. 번번이 마루사가 권하더라도 히나를 파는 것만은 주저하신 모양입니다.
 그런 걸 기어코 팔게 한 게 에이키치라는 저희 오빠……역시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 시절엔 아직 열여덟 먹었던 드센 오빠였지요. 오빠는 개화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영어로 된 책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는 정치를 좋아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니 히나 이야기가 나오면 히나마츠리는 과거의 폐습이라느니 그런 실용성 없는 건 치워야 한다느니 이래저래 타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탓에 옛사람이었던 어머니와 몇 번이나 말싸움을 했는지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히나만 팔면 당장 어려운 건 넘길 수 있을 게 분명하니 어머니도 괴로운 아버지 앞에서 강하게만 나설 수는 없었던 걸 테지요. 히나 인형은 앞서 말한 것처럼 11월 중순에 기어코 요코하마에 사는 어느 미국인에게 팔게 되었습니다. 네, 저 말인가요? 그야 한참 떼를 쓰긴 했지만 말괄량이라 그랬던 걸까요. 그런 것치고는 별로 슬퍼하지도 않았던 거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히나를 팔면 보라색 수자로 뜬 오비를 하나 사준다고 말씀하시기도 했고요……
 그렇게 약속한 다음 날 밤, 마루사는 요코하마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저희 집을 찾았습니다.
 집이라 해도 세 번이나 화재를 겪었는데 재건이 제대로 됐을 리도 없지요. 타고 남은 창고를 한 가족의 주거용으로 바꾸어 적당히 세워놓은 게 전부였습니다. 물론 당시엔 급하게 사들인 약집도 하고 있었으니 정덕환이니 안경탕이니 혹은 태독산이니――그런 약의 간판만은 약재 서랍장 위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무진등이 들어와 있고……그렇게 말해드리면 대강 아실 거라 봅니다. 무진등이란 석유 대신에 종유를 구식 램프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인데 저는 아직 약재 냄새, 진피나 대황의 냄새를 맡으면 반드시 이 무진등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그날 밤에도 무진등은 약재 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어두컴컴한 빛을 내뿜고 있었지요.
 머리가 벗겨진 마루사의 주인은 겨우 상투를 내린 아버지와 무진등 안에 앉았습니다.
 "절반 딱 떼었습니다……확인해주시지요."
 간단히 인사를 마친 후, 마루사 주인이 내놓은 건 종이 봉투에 담긴 돈이었습니다. 그날 바로 수수료를 받기로 한 약속이었을 테지요. 아버지는 화로에 손을 얹고는 아무 말도 않고 인사를 했습니다. 마침 그때였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차를 내왔습니다. 그런데 차를 내놓으려니 마루사의 주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그건 안 됩니다. 그것만은 안 됩니다"하고 말하지 뭔가요? 저는 차가 필요 없나 해서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마루사의 주인의 앞을 보니 종이로 두른 돈봉투 하나가 더 나와 있지 뭡니까.
 "약소합니다만. 제 마음입니다……"
 "아뇨, 마음은 이미 받았습니다. 이건 부디 챙겨두세요……"
 "그러지 마시고……그렇게 사양하실 거 없잖습니까."
 "무슨 농담을 하고 계십니까. 사양하고 계신 건 나리 아닌가요. 새빨간 타인도 아니고 큰나리 이후로 신세 진 마루사가 해온 일 아닙니까? 자, 그런 섭섭한 말씀 마시고 이건 받아주시지요……오, 아가씨. 반갑습니다. 오오, 오늘은 테후테후마게가 정말 아름답군요!"
 저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런 문답을 들으며 안으로 돌아갔지요.
 집은 십이 첩은 됐을까요? 제법 넓기는 하지만 장도 있고 긴 화로도 놓여 있지요. 궤가 있는가 하면 선반도 있고요――그런 마당이니 훨씬 좁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런 가재도구 안에서도 가장 눈에 들기 쉬운 건 도합 서른 개 정도 되는 오동나무 궤였습니다. 본래 히나 인형의 궤였던 건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 게 언제라도 건넬 수 있도록 창문 옆벽에 쌓여 있었습니다. 무진등은 아버지가 가지고 가셨으니 창고 안을 비추는 건 희미한 행등이 전부였습니다――그 옛스러운 행등의 빛에 어머니는 약주머니를 뜨고 오빠는 작은 책상서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지요. 하지만 문득 어머니 얼굴을 보니 어머니는 바늘을 움직이면서도 고개를 숙인 채 눈꺼풀 뒷자락에 눈물을 한가득 담고 있었습니다.
 차를 내놓은 저는 어머니께 칭찬받는 걸 기대하고……그렇게 말하는 건 과장이라 해도 조금은 바란 건 사실이었죠. 그럴 때에 이런 눈물을 본 거잖아요? 저는 슬프기보다도 기댈 구석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러니 되도록 어머니를 보지 않으며 오빠 옆에 앉았어요. 그러자 불쑥 오빠가 고개를 들지 뭐예요? 오빠는 조금 의아하다는 양 저랑 엄마를 번갈아 보았지만 곧 묘하게 웃고는 다시 영어로 된 책을 읽기 시작했죠. 저는 그때 만큼 개화를 코에 건 오빠가 미운 적이 없었답니다. 엄마를 비웃고 있다――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죠. 저는 갑자기 힘을 한껏 담아 오빠의 등을 때렸습니다.
 "뭐 하는데."
 오빠는 저를 노려보았죠.
 "때릴 거야! 때릴 거야!"
 저는 울면서 다시 한 번 오빠를 때렸습니다. 그때는 어느 틈엔가 오빠가 신경질적인 것도 있었죠. 그러니 아직 주먹을 뻗기도 전에 오빠는 제 뺨에 따귀를 날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는 물론 울음을 터트렸죠. 동시에 오빠의 머리에도 자가 내리 꽂혔습니다. 오빠는 곧장 위압적으로 어머니께 대들었습니다. 어머니도 이렇게 된 마당에 가만 둘 리나 있을까요. 낮은 목소리로 떨면서 오빠와 한참을 매도했습니다.
 그런 입씨름 가운데, 저는 단지 분하고 억울해서 울음을 이어갔습니다. 마루사의 주인을 보낸 아버지가 무진등을 든 채로 돌아 올 때까지는……아뇨, 저만 그럴까요. 오빠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불쑥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저는 물론이요 당시의 오빠에게도 말수가 적은 아버지 만큼 무서웠던 것도 없었을 테죠……
 그날 밤, 히나 인형은 이번달 말에 남은 절반을 받는 동시에 그 요코하마에 사는 미국인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네, 가격이요? 이제와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30엔인가 했지요. 그럼에도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꽤나 고가였을 게 분명하지요.
 그러는 사이 히나를 놓아줘야 할 날이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저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게 별로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어느 틈엔가 히나와 헤어지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아무리 아이라 해도 한 번 내놓겠다 정한 히나를 붙들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남에게 주기 전에 다시 한 번 잘 보고 싶다. 다이리비나, 고닌바야시, 사콘노 사쿠라, 우콘노 타치바나, 본보리, 병풍, 마키에 도구――다시 한 번 이곳에 장식해보고 싶다――그런 바람이 생긴 것이지요. 하지만 성미가 철저한 아버지는 제가 몇 번이나 졸라도 이것만은 용납해주시지 않았습니다. "한 번 돈을 받았으니 그건 어디에 있든 남의 것이다. 남의 걸 가지고 놀면 안 되지"――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러던 월말에 가까워진 바람이 거칠게 부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감기에 걸린 탓인지 아니면 아래 입술에 생긴 밤만한 종기 때문인지 기분이 안 좋으셨는지 아침밥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저와 주방을 정리한 후엔 한 손으로 턱을 누르면서 가만히 긴 화로 앞에서 고개만 숙이고 계셨지요. 하지만 이래저래 정오 쯤 되어 문득 고개를 드시는 걸 보니 종기가 있던 아랫입술만 마치 붉은 고구마처럼 늘어져 있지 뭔가요? 심지어 열이 높은 건 묘하게 빛나는 눈색만으로도 곧장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본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네요. 저는 거의 무아몽중히 아버지가 있는 가게로 뛰쳐 갔습니다.
 "아빠! 아빠! 엄마가 많이 아파요."
 아버지는……그리고 그곳에 있던 오빠도 같이 안쪽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엄마의 얼굴에는 그만 황당해진 걸 테죠. 평소엔 쉽게 동요하지 않는 아버지마저 그 순간만큼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며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러는 사이에도 열심히 미소 지으며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별로 큰 일은 아닐 거예요. 그냥 종기를 긁은 게 전부니까……밥준비 할게요."
 "무리하지 마. 밥준비 같은 건 오츠루도 할 수 있어."
 아버지는 반쯤 혼내듯이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에이키치! 혼마 씨 불러와!"
 오빠는 그 말을 듣고 곧장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혼마 씨란 한방의――오빠는 시종 돌팔이라 바보 취급하던 사람인데 그 의사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는 당혹스럽게 팔짱을 끼셨습니다. 듣자 하니 어머니의 종기는 면정이라는데……본래는 면정도 수술만 할 수 있으면 무서운 병은 아니지요. 하지만 당시의 슬픔이란 수술 같은 건 꿈도 못 꾼단 거지요. 단지 약을 달여 먹이거나 거머리에게 피를 빨게 하거나――그런 일을 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같이 혼마 씨가 준 약을 달였습니다. 오빠도 매일 오십 전씩 거머리를 사러 갔지요. 저도……저는 오빠한테 들키지 않게 여우를 모시는 주변 신사에 참배를 다녔습니다――그런 마당이니 히나를 신경 쓸 때가 아니지요. 아뇨, 한때는 저를 시작으로 누구도 벽에 쌓인 서른 개 가량의 오동나무 상자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11월 29일――드디어 히나와 헤어지기 하루 전입니다. 저는 히나와 같이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도무지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다시 한 번 상자를 열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졸라도 아버지는 허락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엄마한테 대신 이야기해달라 하자――저는 곧장 그렇게 생각했으나 어머니의 병은 전보다도 항 층 더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먹는 거나 마시는 거나 도무지 목을 지날 줄 몰랐죠. 특히 요즘에는 입안에서도 끝없이 피가 섞인 침을 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열다섯 어린아이라 해도 히나를 장식하고 싶단 말을 꺼낼 용기도 생기지 않습니다. 저는 아침부터 머리 맡에서 어머니의 기분을 살피며 기어코 오후 세 시가 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제 눈앞에는 금망을 친 창문 아래에 그 오동나무 히나 상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히나 상자는 오늘밤이 지나면 저 멀리 요코하마에 사는 외국인의 집으로……어쩌면 미국에도 가버릴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참을 수 없었지요. 저는 어머니가 잠든 걸 틈 타 몰래 가게로 나갔습니다. 가게는 햇살이 잘 들지 않았지만 거리의 인파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안쪽의 집보다는 밝아 보였지요. 그곳에서 아버지는 장부를 살피고 오빠는 구석의 약재나 감초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빠. 진짜 평생의 소원이니까……"
 저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한 그 부탁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허락은 고사하고 상대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저번에도 안 된다고 했잖아?……야, 에이키치! 너는 아직 밝을 때에 잠깐 마루사 좀 다녀와라."
 "마루사요?……오래요?"
 "그냥 램프나 하나 가지고 오기로 했는데……네가 가서 받아와도 돼."
 "마루사에 램프가 있어요?"
 아버지는 저를 제쳐두고 보기 드물게 웃어 보였습니다.
 "촛대도 아니고……램프를 사두라고 부탁해뒀어. 내가 사는 것보다 확실하니까."
 "그럼 무진등은 이제 내리게요?"
 "한가할 때 해야지."
 "낡은 건 계속 버려야죠. 그리고 램프만 있으면 엄마도 좀 기분이 나아질 테니까요."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 염원은 상대해주지 않는 만큼 더 강해져만 갔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아빠의 어깨를 흔들었답니다.
 "아빠, 응? 아빠."
 "시끄러워!"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뜸 저를 혼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빠도 짓궂게 제 얼굴을 노려보았죠. 저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진 채로 조용히 안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느 틈엔가 열을 머금은 고개를 들고 얼굴 위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 모습이 보이지 의외로 또렷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아빠한테 혼이 났어."
 저는 대답이 궁해져 머리맡에 놓인 깃털봉만 만지작거렸습니다.
 "또 억지 부린 거지?……"
 어머니는 저를 가만히 보시며 이번에는 어렵게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나는 몸이 이래서 집안일도 바깥일도 전부 아빠가 하니까 얌전히 말을 들어야지. 그야 옆집 딸은 매일 같이 연극만 보러 다닌다지만……"
 "연극 같은 건 보고 싶지도 않아……"
 "아니, 연극만 그러겠니. 비녀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네가 가지고 싶은 게 많은 건 알지만……"
 저는 그런 말을 듣는 사이에 분한 건지 슬픈 건지 뚝뚝 눈물을 흘렸답니다.
 "저기 엄마……나는……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아. 단지 저 히나 님을 팔기 전에……"
 "히나 님? 히나 님을 팔기 전에?"
 어머니는 한층 더 큰 눈동자로 제 얼굴을 보았습니다.
 "팔기 전에……"
 저는 조금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사이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틈엔가 뒤에 오빠가 서있었습니다. 오빠는 저를 내려다보면서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이게 진짜! 또 히나 이야기야? 아버지께 혼난 거 까먹었어?"
 "왜 그러니? 그렇게 사납게 말할 건 없잖아."
 어머니는 시끄러운지 눈을 감으셨습니다. 하지만 오빠는 그것도 들리지 않는지 계속 화를 냅니다.
 "열다섯이나 됐으면 좀 앞뒤 분간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고작해야 저런 히나 인형 따위를! 아까워 하는 녀석이 어디 있어?"
 "무슨 참견인데! 오빠 인형도 아니면서!"
 저도 지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후론 여느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두세 마디 매도하는 가운데 오빠는 제 소매를 붙들고는 갑자기 밀쳐버렸습니다.
 "적당히 좀 해!"
 오빠는 엄마가 말리지 않았다면 이때 두세 번은 더 꾸짖었을 테죠. 하지만 어머니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반쯤 들며 신음하듯 오빠를 혼냈습니다.
 "오츠루가 뭘 했다는 거니. 이럴 건 없잖아."
 "그치만 이 녀석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 먹지를 않잖아요."
 "아니, 오츠루만 미운 게 아니잖아? 너는……너는……"
 엄마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분하다는 양 몇 번이나 중얼거리셨죠.
 "너는 내가 미운 거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아픈데 히나를……히나를 팔려고 하고 죄도 없는 오츠루를 괴롭히고……밉지 않으면 그럴 리도 없잖아? 그렇잖아? 왜 미우냐면……"
 "어머니!"
 오빠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엄마의 머리맡에 선 채로 팔굼치로 얼굴을 감추었습니다. 그 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하나 흘리지 않았던 오빠――정치에 분주하여 정신병원에 보내질 때까지 한 번도 약점을 보이지 않았던 오빠――그런 오빠가 그때만은 훌쩍이며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흥분한 엄마에게도 의외였던 걸 테지요. 엄마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거두고 다시 베개에 고개를 묻었습니다……
 그런 소동이 있고서 한 시간 전후였을 테지요. 오랜만에 가게를 찾은 건 생선가게 도쿠조 씨셨습니다. 아니, 생선가게가 아니지요. 이전에는 생선가게를 했으나 이제는 인력거 차꾼이 된 젊은 단골이셨습니다. 이 도쿠조에겐 우스운 이야기가 몇 개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중에서도 아직도 떠오르는 건 성의 이야기였습니다. 도쿠조도 역시 유신 이후로 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차피 붙인다면 거창한 게 좋았던 거겠지요. 도쿠가와를 붙이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서류를 제출하니 이만저만 혼난 게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말하기는 당장 참수 당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죠. 그런 도쿠조 씨가 즐겁게 모란이나 사자가 그려진 당시의 인력거를 끌며 불쑥 가게에 찾아 온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손님도 없겠다 아가씨를 인력거에 태워 아이즈츠하라에서 벽돌 거리까지 둘러보고 싶다――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쩔래? 오츠루."
 아버지는 일부러 진지하다는 양 인력거를 보러 가게에 나온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인력거를 타는 정도로 기뻐하는 애들도 없을 테지요. 하지만 당시의 저희에겐 마치 자동차를 타는 것만큼 기쁜 일이었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프고 특히 그런 소동이 있던 바로 뒤니까 무작정 좋아하며 가고 싶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 의기소침하여 "가고 싶어"하고 작은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그럼 엄마한테 묻고 오거라. 마침 도쿠조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어머니는 재 생각처럼 눈도 뜨지 않고 웃으며 "잘 됐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짓궂은 오빠는 마침 마루사에 나가서 없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운 것도 잊고서 어서 인력거에 올라탔습니다. 붉은 천을 무릎에 얹고 바퀴가 데굴데굴 우는 인력거에.
 그때 본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단지 지금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도쿠조의 불평뿐입니다. 도쿠조는 저를 태운 채로 벽돌 거리에 이르자마자 서양 부인을 태운 마차와 제대로 부딪힐 뻔했답니다. 아슬아슬하게 그런 일은 면했지만 아주 원망스럽게 혀를 차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아이고 큰일 날 뻔했네. 아가씨가 너무 가벼워서 중요할 때 제동이 안 되는구만……아가씨, 태워야 하는 인력거꾼이 불쌍하니까 스물 되기 전에는 인력거 타는 거 아니야."
 인력거는 벽돌 거리에서 집들이 있는 골목으로 빠졌지요. 그러자 곧장 오빠 에이키치를 만났습니다. 오빠는 그을러진 대나무 자루가 달린 램프를 한 대 든 채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모습을 보고는 "잠깐"하는 신호를 보낸 걸 테지요. 램프를 들어 올린 것입니다. 하지만 도쿠조는 이미 그 전에 봉을 돌리며 오빠 쪽으로 차를 끌었습니다.
 "수고 많네, 도쿠 씨. 어디 가는 거야?"
 "아뇨 뭐, 오늘은 아가씨랑 에도 구경 합니다."
 오빠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력거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오츠루, 네가 이 램프 들고 먼저 들어가라. 나 기름 가게 들렀다 가야 해."
 저는 방금 전에 싸운 마당이니 일부러 아무 말도 없이 램프만 받았습니다. 오빠는 그러고 한참을 걸어갔지만 불쑥 방향을 틀더니 인력거의 흙받이에 손을 얹으며 "오츠루"하고 말했습니다.
 "오츠루 너 또 아버지한테 히나 인형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저는 그럼에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그렇게나 괴롭히고도 또 그러냐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오빠는 아랑곳 않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버지가 보지 말란 건 돈을 받아서 그런 것만이 아냐. 보면 다들 또 미련이 생길 거 아냐――그런 것도 잘 생각해봐. 알았어? 알았냐고. 알았으면 이젠 아까처럼 보고 싶다고 하면 안 된다."
 저는 오빠의 목소리에서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오빠만큼 묘한 사람도 없지요. 상냥한 목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또 평소처럼 대뜸 저를 위협하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뭐 하고 싶으면 해. 대신에 아픈 꼴 좀 볼 거야."
 오빠는 겁을 주고는 도쿠조에게 인사도 않고 어딘가로 가버렸습니다.
 그날 밤의 일입니다. 저희 네 사람은 창고 안에서 상을 둘러쌌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베개에서 고개를 든 게 고작이었으니 둘러쌌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날 저녁은 평소보다도 화려했던 거 같았습니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그 어두컴컴한 무진등 대신에 새로 산 램프의 빛이 빛났기 때문입니다. 오빠나 저는 밥 먹는 동안에도 이따금 램프를 보았습니다. 석유가 보이는 유리 항아리, 움직이지 않는 불꽃을 지키는 뚜껑――그런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보기 드문 램프를 바라보았습니다.
 "밝은걸. 낮 같아."
 아버지도 어머니를 보면서 만족스럽게 말했습니다.
 "눈부실 정도네요."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거의 불안에 가까운 색이 드리워 있었습니다.
 "그야 무진등에 익숙해져 있으니까……하지만 한 번 램프를 키면 이제 무진등은 못 키지."
 "뭐든지 처음엔 눈부신 거예요. 램프도 서양 학문도……"
 오빠는 누구보다도 더 신이 난 듯했습니다.
 "그래도 익숙해지면 똑같아요. 분명 이 램프도 어둡다고 느낄 때가 올 테죠."
 "대강 그럴지도 모르지……오츠루, 엄마 드실 죽은 어쨌니?"
 "엄마가 오늘은 드시고 싶지 않대요."
 저는 엄마가 말한 대로 별생각 없이 대답했지요.
 "곤란하네. 식욕이 조금도 없는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의 물음에 어쩔 수 없다는 양 한숨을 내쉬었죠.
 "네. 어쩐지 이 석유 냄새가……버려야 하는 옛사람이란 증거죠."
 그로부터 우리는 말수가 적어져 젓가락만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떠올린 것처럼 이따금 램프가 밝은 걸 칭찬하는 듯했습니다. 그 종기로 부풀어 오른 입술 위로 웃음을 드리우며.
 그날 밤 모두가 쉬기 시작한 건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눈을 감아도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죠. 오빠는 제게 히나에 관한 건 두 번 다시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히나를 꺼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포기했지요. 하지만 꺼내고 싶다는 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히나는 내일이 되면 먼 곳으로 가버린다――그렇게 생각하면 감은 눈 속에도 자연스레 눈물이 고여버립니다. 차라리 모두가 잠든 사이에 몰래 혼자 꺼내 볼까?――저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죠. 아니면 하나만 어딘가에 숨겨둘까?――저는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들통나면――그렇게 생각하니 역시 겁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날 밤 이래저래 무서운 생각만 했습니다. 오늘 밤에 다시 한 번 불이 난다면. 그러면 남한테 가기 전에 히나도 다 타버릴 텐데. 아니면 미국인도 머리 벗어진 마루사의 주인도 콜레라에 걸리면 좋을 텐데. 그럼 히나도 다른 곳에 가지 않고 계속 여기에 둘 수 있을 테니까――그런 공상도 떠올랐지요. 하지만 역시 어린아이니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느 틈엔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죠.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요. 문득 잠에서 깨보니 어두운 행등이 들어온 방안에 누가 일어나 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쥐일까. 도둑일까. 아니면 벌써 새벽이 된 걸까――저는 어느 쪽인지 망설이면서 머뭇머뭇 작게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제 머리맡에는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홀로 제게 옆얼굴을 보이며 앉아 있지 뭡니까. 아버지가!……하지만 저를 놀라게 한 건 아버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앞에는 제 히나가――절구 이후로 보지 못했던 히나가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꿈인가 싶은 게 바로 그런 순간을 말하는 걸 테죠. 저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이 신비한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희미한 행등의 빛 속에서 상아 석장을 든 오비나를, 왕관의 영락을 찬 메비나를, 우콘노타치바나를, 사콘노사쿠라를, 자루가 긴 양산을 짊어진 시쵸를, 고개를 한껏 들어 올린 칸죠를, 작은 에마키 거울대나 장을, 자개로 된 히나 병풍을, 찻기를, 본보리를, 색실로 짠 테마리를, 그리고 또 아버지의 옆얼굴을……
 꿈인가 싶은 건……아아, 그건 이미 말했었지요. 하지만 그날 밤 본 히나는 정말 꿈이었을까요? 너무나도 히나를 보고 싶었던 나머지 저도 모르게 만들어낸 환상이지는 않았을까요? 저는 아직도 그 답을 내리지 못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밤에 홀로 히나를 바라보는 나이 먹은 아버지를 보았지요.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설령 꿈이더라도 별로 분하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눈 주변이 저와 똑닮은 아버지를 보았으니까요. 여자 아이 같은……그런 주제에 엄숙한 아버지를 보았으니까요."

 "히나" 이야기를 쓴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런 걸 이제 와 완성한 건 류타 씨의 권유 때문만은 아니다. 또 동시에 4, 5일 전, 요코마하의 어느 영국인의 손님방서 오래된 히나의 목을 장난감으로 삼은 서양인 여자아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히나도 납으로 된 병대나 고무 인형과 같은 장난감 상자에 던져져 같은 우울함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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