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자네는 지금 나보고 사랑한 적이 있나 물은 건가? 그야 왜 없겠나. 내 이야기는 묘하고 무서운 이야기지. 나도 이제 예순여섯이 되었는데 지금마저도 그 순간의 기억엔 재를 뿌리지 않으려 하고 있다네. 자네에게는 무엇 하나 숨기지 않을 생각인데, 이야기가 이야기인 만큼 나보다도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는군. 그럴 만도 한 게 내 이야기의 전말은 너무나도 신비하며 내가 그 사건에 얽혀 있었다는 건 스스로도 믿기지 않거든. 나는 3년 넘게 가장 신비하고 가장 기묘한 환혹의 희생자가 되어 있었지.
나는 볼품없는 시골서 성직자일을 하고 있었지. 매일 밤 꿈에는――나는 그게 전부 꿈이길 바라고 있는데――다섯 욕심으로 점철된 저주해 마땅할 생활을, 말하자면 사르다나팔로스와 같은 생활을 보냈지. 그리고 어떤 여자를 어쩌다 한 번 본 걸로 자칫 내 영혼을 지옥에 떨어트릴 뻔했는데 다행히도 신의 은혜와 나를 지켜준 성도의 도움으로 내게 뻗던 악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생각해 보면 내 낮 생활은 오랫동안 성질이 전혀 다른 밤 생활과 뒤섞이고 있었던 거지. 낮의 나는 기도와 신성한 일로 바쁜 신의 성직자였지만 밤에 눈을 감으면 곧 젊은 귀족이 되고 말았지. 여자와 개와 말에는 뵈는 게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지. 도박도 했어. 술도 마셨지. 매도를 하며 신을 바보 취급했지.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뜨면 되려 내가 아직 잠을 자고 있고 단지 신부가 된 꿈을 꾼 것만 같았지. 그런 몽유병 환자 같은 생활의 한 장면이나 한 이야기의 회상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어서 도무지 기억에서 지을 수 없었어. 나는 실제로 내 거처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는데 남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속세의 덧없는 쾌락에 학을 떼고 신앙심이 깊어져 파란에 젖은 평생의 끝자락을 신께 바치며 사는 샤먼이라 여길지 모르지. 이렇게 세상 생활에서 단절된 숲속의 어두컴컴한 승방에서 지내는 학승이라고는 믿어주지 않을지 몰라.
나는 사랑을 했지. 나처럼 강렬한 사랑을 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달리 없겠지 싶을 정도로 사랑을 했어――어리석고 엄청난 열정을 품고서――나는 되려 그 정열이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거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야. 아아 그러한 밤――그러한 밤이 또 있었을까.
나는 어릴 적부터 성직자가 내 천직임을 느꼈지. 때문에 내 모든 연구는 그 이상을 목표로 쌓아 올린 거야. 스물네 살까지 내 생활은 말하자면 긴 도심 생활이었지. 신학을 공부함과 동시에 내가 연이어 하급 자격을 딴 덕인지 선배들은 내가 젊은 나이에 마지막의, 높은 계위를 얻을 자격이 있음을 인정해주었어. 그렇게 내 수위식은 부활제 중에 치러지게 되었지.
나는 그때까지 세간을 본 적이 없었어. 내 세계는 대학과 연구실 벽에 가로막혀 있었지. 물론 '여자'란 건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내 사상이 그러한 문제 위에 멈춰 서는 걸 용납지 않았기에 순진무구한 생활을 이어갔지. 1년에 두 번, 나이 먹어 약해지신 어머니를 만나는 게 나와 바깥 세계의 모든 관계였지.
나는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어. 나는 마지막의 피할 수 없는 한 걸음을 내딛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지. 나는 환희와 성급함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혼례를 치르는 연인이라도 나 이상의 열에 들뜨고 감격한 나머지 늦을 때의 걸음 수를 세는 자는 없었을 테지. 나는 잠에 들면 반드시 기도를 올리는 꿈을 꾸었다네. 성직자가 되는 건 유쾌한 일이 분명하다. 그렇게 믿었어. 애당초 국왕이 될 생각이나 시인이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내 야심은 그 이상의 높은 목표를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내가 자네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내게 일어난 일이 제대로 풀렸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네. 그리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현혹의 희생을 당했다는 걸 이해해줬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
드디어 당일이 되었어. 나는 하늘에 떠있나, 날개라도 달렸나 싶을 정도로 경쾌한 걸음으로 교회를 향했지. 나는 자신이 천사만 같았어. 그리고 내 동기가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게 참 신기했지. 그건 교회에도 내 동기가 대여섯 명은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하룻밤을 기도로 보낸 뒤였기에 거의 황홀하여 모든 걸 잊으려 했지. 나이를 먹은 신부도 내게는 '영원히' 다가오고 있는 신처럼 보였어. 나는 정말로 전당의 궁륭을 통해 천국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지.
그 식이 어떻게 이뤄지는 자네도 잘 알 거야――세례식, 두 형식으로 이뤄지는 성찬식, '개종자의 기름'을 손바닥에 바르는 식, 그리고 신부와 함께 신 앞에 희생을 올리는 식,……
아아, 욥이 '경홀한 자란 눈으로 성약을 보려는 자'라는 말은 그야말로 진리였지. 나는 문득 그때까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내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았다네. 여자는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까웠어――하지만 실은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안쪽의 저 먼 곳의 난간 주변에 있었지――나이도 젊었고 용모도 놀랄 만큼 아름다웠어. 그리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지. 그때는 마치 내 눈에서 불쑥 콩깍지가 벗겨진 거 같았네. 나는 생각지도 않게 빛을 얻은 맹인만 같은 심정이었어. 방금 전까지 광채로 넘치던 신부도 갑작스레 어딘가로 갔고 금색 촛대 위 촛불도 새벽의 별처럼 새파랗게 질려서 무한한 어둠이 사원 전체를 뒤덮은 것만 같더군.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여자는 그 어둠을 배경으로 찬란한 조형이 되어 마치 천사 강림처럼 내 눈앞에 나타났어. 그녀는 하얗게 빛나듯이, 심지어 빛을 받는다기보다는 스스로 빛을 내뿜는 것처럼 보였지.
나는 눈을 감았지. 그리고 두 번 다시 뜨지 않기로 했어. 나는 바깥 세계의 영향을 받는 걸 두려워했으니까. 그건 거의 내가 뭘 하는지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나를 현혹해 내 마음을 붙잡아 버리기 때문이기도 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눈을 떴지. 왜냐고? 눈꺼풀 틈으로도 그녀가 무지갯빛으로 빛나며 태양을 응시할 때 보일 법한 보라색 반음영에 둘러싸여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야.
아아,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천상에 추구하여 그곳에서 성모상을 지상으로 가져온 위대한 화가라도 그 윤곽에는 도저히, 내가 그때 본 자연의 아름다움의 실재에는 미치지 못할 테지. 시인의 시, 화가의 그림도 그녀의 개념을 잡는 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야. 그녀는 키가 큰 편이었고 여신 같은 모습과 태도를 갖추고 있었지. 부드러운 금발은 한가운데서 갈라져 관자놀이 위에서 두 개의 파도치는 황금의 강을 흘렸어. 마치 왕관을 쓴 여왕처럼도 보였지. 비칠 거 같은 창백한 이마는 또 조용히 눈썹 위에 펼쳐져 있었어. 그 눈썹은 신기하게도 참 검었고 억누르기 힘든 쾌활함과 광명으로 넘치는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의 느낌을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이 되게 거들었지. 아아, 그 눈이란. 단 한 번 깜빡이면 한 남자의 운명을 정해버릴 게 분명하지. 그 눈은 내가 이제까지 인간의 눈에서 보지 못했던 생명과 광명과 정열과 촉촉함을 품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어. 그 눈은 또 끊임없이 화살처럼 빛을 쏘았지. 그리고 나는 분명히 그 빛이 내 심장에 기어 들어오는 걸 보았어. 나는 그 눈에서 빛나는 불이 천상에서 온 건지 지옥에서 온 건지 알지 못하네. 하지만 그건 분명 그 둘 중 하나서 온 것일 테야. 그녀는 천사거나 아니면 악마일 테지. 그리고 아마 양쪽 모두였던 모양이야. 어찌 되었든 그녀가 우리와 같은 어머니 이브의 배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지. 또 더할 나위 없는 광택을 지닌 진홍주 같은 이빨이 붉은 웃음 사이서 빛나 입술이 꿈틀일 때마다 작은 보조개가 수자처럼 장미색으로 아름답게 뺨에 나타났지. 그리고 콧구멍의 동그란 윤곽에서도 고귀한 태생을 보여주는 부드러움과 긍지 같은 게 보였다네. 반쯤 드러난 어깨의 매끈이는 광택 같은 피부 위에선 마노와 같은 빛이 반짝이고 노란빛이 감도는 커다란 진주를 꿴 실은――그 아름다운 색은 거의 그녀의 목덜미에 필적했지――그녀의 가슴 위에 걸려 있었어. 이따금 그녀는 무언가에 놀란 뱀이나 공작처럼 전율하는 듯한 교태를 만들어내며 고개를 들었지. 그러면 은색 격자 세공 같은 목덜미에 감긴 비싼 레이스 옷깃이 역시나 전율하는 것처럼 움직였다네.
그녀는 감귤색이 깃든 붉은 벌벳옷을 입고 있었지. 그 족제비 털이 붙은 넓은 소매서는 한없이 상냥하고 기품 있는 손이 엿보였어. 손은 새벽의 여선 오로라의 손가락처럼 빛을 투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청량했지.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어제 일처럼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어. 왜냐하면 나는 그때 가슴을 두근거리면서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도록 했거든. 아주 희미한 음영도, 뺨 끝의 자그마한 검은 점도, 입술 끝자락에 있을까 말까한 솜털도, 이마 위에 자리한 융단 같은 털도, 뺨 위에 떨어진 속눈썹의 그림자도, 나는 놀랄 정도로 명쾌한 지각을 지닌 채로 주목할 수 있었지.
그렇게 응시하면서 이제까지 닫혀 있던 내 마음속의 문을 스스로 열고 있음을 느꼈어. 오랫동안 닫혀 있던 눈동자를 뜨고 이제껏 알지 못한 내부의 광경을 엿볼 수 있었던 거지. 인생이란 정말로 신기한 광경을 내 앞에 보여주었어. 나는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사물의 질서 속에서 태어나는 중이었지.
그러자 굉장한 고통이 내 마음을 달군 바늘로 박는 것처럼 괴롭히기 시작했지. 1분 1초가 내게는 1초인 동시에 한 세기처럼만 느껴졌어. 그러는 동안 식이 진행되어 나는 곧 새로 만들어진 열망이 격렬하게 들어가길 바란 세계에서 멀리 찢어지게 되지.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그렇다'고 대답했어. 이건 내 마음속에 자리한 모든 게 내 영혼에 대한 혀의 폭행에 극렬히 반대하지만 그 보람이 없었던 셈이지. 아마 많은 소녀가 부모가 정한 남편을 거절할 심산으로 제단에 걸어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이런 연유임이 분명하네. 그리고 수많은 가련한 신참 성직자가 선언을 할 때에는 베일을 찢어발기고 싶음에도 너그러이 그걸 받아들이고 마는 것도 분명 그런 이유일 테야. 그렇게 사람은 그곳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커다란 비방의 목소리를 높이는 걸 구태여 하지 않는 동시에 또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속이는 일도 구태여 하지 않는 법이야. 모든 남편들의 눈, 모든 남편들의 뜻이 마치 납처럼 자기 위에 덮쳐지는 것만 같겠지. 그뿐 아니라 규칙을 올바르게 지켜 가면 만사가 미리 예정된 것처럼 완벽히 갖춰진 채로 심지어 필연적으로 피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으니 개인의 의지는 거듭된 수정에 굴종하여 완벽히 파괴되고 마는 것이야.
식이 진행 됨에 따라 그 정체 모를 미인의 얼굴도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당초 애무라도 하는 듯한 상냥함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때는 그걸 이해시키는 게 불가능하단 걸 원망하고 또 부끄러워하는 듯이 바뀌었지.
나는 산마저 꿰뚫을 수 있을 거 같은 의지의 힘으로 성직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외치려 했어. 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었지. 나는 혀가 위턱에 붙어 버린 것만 같았어. 나는 부정확한 발음 하나라도 내뱉어 내 뜻을 드러내는 것조차 불가능했지. 나는 눈을 뜬 채로 생명에 관여되는 한 마디를 못해 몸부림치는 인간만 같은 심정이 들었다네.
그녀도 내가 느끼는 순교의 괴로움을 아는 것처럼만 보였지. 그리고 마치 나를 격려라도 하듯이 가장 신성한 약속으로 가득 찬 눈초리를 보이는 것이었어. 그녀의 눈이 시라면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건 그야말로 노래였지.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네. "당신이 제 것이 된다면 저는 당신을 천국의 신보다도 행복하게 하겠어요. 천사들마저 당신을 질투할 테죠. 당신을 둘러싼 수의를 찢어버리세요. 저는 '아름다움'입니다, '젊음'입니다, '생명'입니다. 제게 오세요. 여호와는 그 대신 당신에게 무얼 줄까요? 저희의 목숨은 영원한 입맞춤 속에서 굼처럼 흘러갑니다. 그 성배의 포도주를 던져버리세요. 그러면 당신은 자유로워집니다. 저는 당신을 '알려지지 않은 섬'으로 데려갈 거예요. 당신은 은으로 된 천막 아래서 두터운 금마루 위에서 제 가슴 속에 안겨 잠들면 돼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저는 당신의 신의 손에서 당신을 떼어내고 싶으니까요. 당신의 신 앞에서는 위대한 존엄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의 피를 흘리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 피는 신이 있는 옥좌의 계단 아래까지도 닿지 않아요."
그러한 말은 내 귀에 무한한 정취로 가득 찬 운율을 이루어 흘려 드는 것만 같았지. 그리고 그녀의 눈은 마치 살아 있는 입처럼 내 생명 속에 소리를 불어 넣은 것처럼 내 심장의 안쪽까지도 울렸어. 나는 나 스스로가 신을 버리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네. 하지만 내 혀는 단지 기계적으로 식의 형식만 만족시킬 뿐으로 나는 내 가슴이 성모의 검보다도 날카로운 칼날에 찔린 듯한 기분을 도무지 버릴 수 없었어.
모든 일은 원만히 풀렸지. 나는 끝내 성직자가 된 거야.
그때,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것만큼 깊은 고통이 또 있을까. 혼약한 연인이 불쑥 자신의 옆에서 죽은 걸 본 소녀, 죽은 아이의 요람에 기댄 어머니, 낙원의 문턱에 선 이브, 보물을 도둑 맞고 그 자리에 돌이 놓여 있는 걸 본 수전노, 우연히 가장 우수한 걸작의 원고를 불 안에 던져버린 시인――그러한 사람들도 이만큼 절망하고 이만큼 위로하기 어려운 얼굴은 하지 않았을 거야. 피란 피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서 가셨고 이제는 대리석보다도 하얗게 질려 버렸어. 그녀의 아름다운 두 팔은 마치 근육이 갑자기 이완된 것처럼 힘없이 양 옆구리로 늘어졌지. 그녀는 몸을 받치기 위해 기둥을 찾아야 했어. 손발이 제 마음 같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나 또한 교회 입구를 향해 비틀거렸어. 죽은 것처럼 새파랗게 질리고 이마에는 칼바리아(주. 예수가 죽은 곳의 지명)의 땀보다도 피 같은 땀을 흘리면서. 나는 마치 누가 내 목을 졸라 죽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가 하면 또 둥근 천장이 내 어깨 위로 떨어진 것도 같았지. 그리고 그 둥근 천장의 중량을 내 머리만으로 받치고 있는 기분이었지.
내가 교회문을 나서려 하자 불쑥 손 하나가 내 손을 붙잡았어――여자 손이었지!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여자 손을 잡아 본 적이 없었어. 그 손은 마치 뱀의 피부처럼 차가웠지. 심지어 그 감촉은 마치 뜨거운 철에 지져진 것처럼 내 손목을 불태웠지. 그녀였어. "불행한 사람, 불쌍한 사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치고는 곧 군중 사이에 숨어 찾을 수 없게 되었지.
그러자 노신부가 내 옆을 지나갔지. 그리고는 의심하는 듯한 엄격한 시선을 내게 보냈어. 내 얼굴은 붉어지는가 하면 새파랗게 질리는 등 바빴다네. 그때 동기 중 하나가 나를 가엽게 여겨 손을 잡고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었어. 아마 나는 남의 도움 없이는 연구실로 돌아갈 수 없었을 거야. 그런데 길의 구석에서 동기의 주의가 잠시 다른 곳을 향한 틈에 공상적인 옷을 입은 흑인 시종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네. 그러고는 내 옆을 걸으며 내 손에 금색 테두리를 한 작은 수첩을 놓더니 그걸 숨기라는 신호를 보냈어. 나는 그걸 소매 안에 숨겼지. 그리고 방에 돌아와 홀로 남을 때까지 그 안에 두었어. 그렇게 나는 그 잠금쇠를 열어 보았지. 안에는 종이 두 장에 담겨 있었어.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고. "클라리몽드, 콘티니 궁에서" 당시의 나는 세간에 밝지 못했기에 그 유명했던 클라리몽드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 또 콘티니 궁도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 때문에 추측해 볼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추측할 때마다 상상은 점점 엇나갔지만 나는 그녀와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그녀가 귀부인이든 창녀든 개의치 않았다네.
내 사랑은 고작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뽑기 어려운 뿌리를 내려버렸어. 나는 그 사랑을 단념해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 나는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믿겼지. 그녀가 단 한 번 나를 본 것만으로 내 성질이 달라져버린 거야. 그녀는 나 스스로의 뜻을 내 생명 안에 불어넣어 주었어. 그리고 나는 이제 내 육체 안에서 살지 않고 그녀의 육체 안에, 그것도 그녀를 위해 살게 되었지. 나는 그녀가 닿은 내 손에 입맞춤을 했어. 나는 몇 시간이고 그녀의 이름을 되풀이해 보았지. 몇 시간 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어도 내게는 그녀의 모습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이 보였어. 나는 그녀가 교회 현관에서 내게 속삭인 말을 반복해 보았지. "불행한 사람, 불쌍한 사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나는 끝내 내가 처한 상황의 무서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어. 내가 지금 자리하게 된 직무의 무섭고 엄숙한 제한이 내 앞에 고스란히 폭로된 거지. 성직자가 된다!――그건 독신이 된다는 뜻이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단 뜻이지. 성별이나 나이의 구별이 사라진단 뜻이야. 모든 아름다움에게서 등을 돌리는 일이지. 눈을 도려내고 마는 일이기도 해. 영구히 성당의 차가운 그림자 속에 숨게 된단 뜻이야. 누군지도 모르는 시체를 지켜야 하는 셈이지. 죽어가는 사람만 보러 가야 하는 거야. 그리고 나 자신의 죽음을 추도하는 상복을 입고 항상 검은 사제복을 빙어야 하지. 말하자면 자네의 옷이 자네의 시체를 담은 관의 역할을 하는 꼴이라네.
나는 새삼 내 생명이 마치 지하의 연못처럼 넓어지고 넘쳐가며 수량을 늘려가는 걸 느꼈다네. 내 피는 내 온몸을 돌며 격동했다네. 내가 오랫동안 억눌러 온 청춘은 천 년에 한 번 피는 알로에처럼 생생히 싹을 내고 번개의 울림과 함께 꽃을 피운 거야.
클라리몽드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었어. 나는 세간 사람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네. 그런데 어떻게 연구실을 나갈 구실을 만들겠나. 나는 잠시도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네. 그럼에도 단지 하염없이 내가 취임하게 될 목사보 발령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나는 창문의 격자를 떼어보려 했다네. 하지만 창문은 땅과 떨어져 있기 마련이니 사다리 없이는 도망칠 생각을 해본들 어리석은 일이란 걸 알아차렸어. 그런 데다가 내가 밤을 틈타 그곳에서 도망칠 수 있더라도 그 후에 어떻게 복잡한 거리의 미궁을 지나 내가 바라는 곳에 이를 수 있겠나. 수많은 사람들은 무의미하게만 느껴질 그 모든 평범함이 어제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경험도 돈도 아름다운 옷도 없는 가련한 신학자인 내게는 위대한 일처럼만 느껴졌지. 나는 사랑의 어둠에 헤매이며 이렇게 소리쳤다. "아아, 내가 성직자가 아니었다면 매일 같이 그녀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연인도 그녀의 남편도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이 음습한 사제복 대신 바깥의 아름다운 기사처럼 천과 벌벳옷을 입고 금색 사슬을 걸고 검을 차고 아름다운 새깃털을 장식했을 텐데. 내 머리도 짧게 잘릴 게 아니라 파도치며 소용돌이를 그리며 내 목 위로 내려왔을 테지. 내 수염에도 아름다운 왁스질을 했을 거야. 그렇게 나는 버젓한 귀공자가 되는 거지." 그런데 단지 제단 앞에서 보낸 한 시간이, 바쁘게 입에 올린 대여섯 말이 나를 영원히 산 사람의 사이서 추방시키고 나 스스로를 묘지에 묻어두게 한 거라네.
나는 창문에 다가갔어. 하늘은 푸르고 아름다웠지. 나무는 봄옷을 입고 있었어. 나는 자연이 사람을 놀리는 듯한 환희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네. 광장에는 사람이 잔뜩 있었어. 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오는 자도 있었지. 젊은 난봉꾼과 젊은 미인이 쌍을 이루어 수풀이나 정원 쪽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게 보였지. 유쾌해 보이는 청년이 즐거운 목소리로 "장진주" 노래를 부르며 걷는 게 보였어――그건 모조리 나의 비애와 적막과 괴로움에 대조를 이루는 유쾌함과 흥분, 생활력과 활동의 그림이었지. 문 계단 위에선 젊은 어머니가 아이와 놀며 앉아 있었어. 어머니는 아직 젖방울이 진주처럼 묻어 있는 아이의 자그마한 장미빛 입술에 입맞춤을 했지. 그리고 아이를 달래기 위해 오로지 어머니만이 발명할 수 있는 신성한 장난을 쳤지. 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랑스러운 두 사람을 보며 작게 웃고 있었다네. 나는 기어코 거칠게 창문을 닫고는 마루 위로 몸을 던졌어. 내 마음은 무서운 증오와 질투로 가득 차 있었지. 그리고 마치 열흘은 굶은 호랑이처럼 내 손가락을 씹고 또 내 잠옷을 씹었어. 내가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네. 하지만 이미 경련적인 분노의 발작에 휩싸여 마루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자 불쑥 장로 세라피온이 방 중앙에 서서 가만히 나를 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네. 나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가슴 위로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지.
"나의 벗 로뮤알아, 네 마음속에 무언가 두려운 게 싹트고 있구나." 몇 분의 침묵 후 세라피온이 말했어. "나는 네가 뭘 하는 건지 알지 못한다――항상 그렇게나 조용하고 그렇게나 청정하며 그렇게나 얌전한――네가 야수처럼 방에서 분노해 날뛰고 있구나. 조심하거라. 형제여――악마의 암시에 귀를 기울이지 말지어다. 악마는 네가 그 몸을 영원히 주에게 바친 데에 화가 나서 먹잇감을 참는 늑대처럼 네 주위를 돌면서 너를 잡을 노력을 하고 있다. 정복당하지 말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고행을 방패로 삼아 전사처럼 싸우거라. 그리하면 너는 반드시 악마에게 이길 수 있을지어다. 덕행은 유혹에 흔들리는 법이다. 황금은 시금을 하는 자의 손을 거쳐 한 층 더 둔해진다. 두려워 말라. 용기를 잃지 말라. 가장 충실하고 가장 독신한 사람들은 한동안 이러한 유혹을 받고는 한다. 기도하거라, 단식하거라, 묵상하거라. 그리하면 악마는 저절로 물러나리라."
세라피온의 말은 나를 평소처럼 되돌려주었지. 그리고 내 마음도 조금은 진정되었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네. "나는 네가 C――의 목사보를 받게 된 걸 알리러 왔다. 그곳을 관리하던 성직자가 죽어 곧장 너를 임명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리하니 내일 떠날 준비를 하거라."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지. 그렇게 장로는 내 방을 나갔어. 나는 기도서를 펼치고 기도를 읊기 시작했다네. 하지만 글자가 흐려 무어라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었지. 내 머릿속에선 어느샌가 체념의 실이 내려왔고 나는 저도 모르게 기도서를 놓치고 말았어.
다음날, 그녀에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고 떠나버린단 사실, 나와 그녀 사이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에 또 새로운 장애물이 더해진 사실, 정말로 기적이 아니고선 그녀와 만날 어떤 희망도 사라져 버렸단 사실! 아아,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어. 왜냐면 나는 내 편지를 전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야. 나는 성직자란 신성한 직무에 앉아 있음에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열 수 없었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나는 그때 불숙 세라피온이 악마의 계략이라 이야기한 걸 떠올렸어. 이번 사건의 신비한 성질, 클라리몽드가 지닌 인간 이상의 아름다움, 그녀의 눈에 담긴 비늘 같은 빛, 불타는 듯했던 손의 촉감, 그녀가 나를 번뇌하게 한 고통, 내 마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동시에 나의 모든 신념이 순식간에 사라진 일――그 모든 게 악마의 짓이란 증거이지는 않을까. 아마 수자와 같은 손은 손톱을 감추기 위한 장갑인 걸지도 몰라. 그러한 상상에 겁을 먹은 나는 다시 무릎을 꿇으며 마루 위에 떨어져 있던 기도서를 들어 올렸지. 그리고 다시 기도에 몸을 바치기로 했어.
다음 날 아침, 세라피온이 나를 데리러 왔다네. 볼품없는 우리의 가방을 메고서 두 필의 노새가 기다리는 문으로 향했지. 그는 한 필의 노새에 올라탔고 나는 다른 한 필에 올라탔어.
나는 거리를 지나가면서 클라리몽드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모든 창과 모든 노점을 주시했다. 하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라 시장은 아직 눈도 거의 뜨지 않고 있었지. 나는 우리가 지나가는 모든 집의 막이나 커튼을 투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세라피온은 내가 호기심에 건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그가 내가 주위를 볼 시간을 주기 위해 일부로 노새의 걸음을 늦춘 걸 보고 알 수 있었지. 그렇게 우리는 거리를 나와 그 너머에 있는 작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어. 정상에 이를 때였지. 나는 클라리몽드가 살고 있는 땅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았어. 그랬더니 커다란 구름 그림자가 도시 위에 무리 지어 청과 적으로 상반된 지붕색이 그 중간색으로 가라앉아 있었지. 그 중간색 여기저기선 지금 막 붙은 불의 연기가 하얀 거품처럼 올라왔다네. 그리고 신비한 빛의 위치 덕에 모호한 증기에 둘러싸인 근처 건물보다 저 높은 곳에 자리한 집 하나가 태양의 쓸쓸한 빛을 금색으로 물들이면서 아름답게 빛나며 우뚝 서있었지――실제로는 일 리하고도 반은 더 떨어져 있을 테지만 그런 것치고는 가깝게 보였어. 그리고 그 건축물의 자잘한 부분까지 명백히 구별이 되었지――수많은 작은 탑이나 방, 창문이나 제비 꼬리 형태를 한 풍향계 따위가 또렷이 보였다네.
"저기서 햇살을 받고 있는 궁전은 무엇인가요." 나는 세라피온에게 물어보았어. 그는 눈에 손바닥을 세우고는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지. 대답은 이러했어.
"콘티니의 왕이 창부 클라리몽드에게 준 고대 궁전이니라. 저기서 무서운 일을 하고 있다지."
그 찰나에 나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새하얀 모습을 한 무언가가 발코니를 걷는 것처럼 보인 거 같았어. 그 모습은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에 햇살을 받아 빛났지만 곧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지. 그건 클라리몽드였다네.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그때 열이라도 앓는 것처럼 애타는 심정으로――나를 그녀에게서 떼어내고 마는 험악한 산길 위에서 아아, 내가 다시는 내려갈 수 없는 산길 위에서 그녀가 사는 궁전을 바라보고 있었다는걸. 이곳의 주인이 되어 이곳에 오라고 나를 부르듯이 미소 짓는 햇살에 빛나며 내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던 궁전을 바라보고 있었다는걸. 의심할 여지도 없지.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을 거야. 왜냐면 그녀의 마음은 내 마음과 이어져 있기에 그 한없이 미약한 감정마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지. 그 날카로운 연결고리가 있었기에 그녀는――잠옷을 입고 있었지만――발코니 위로 올랐던 것이지.
그림자는 궁전을 품었고 내 눈에 담기는 광경은 단지 지붕과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는 바다만 남았지. 그리고 그 안에는 하나의 산 같은 파동이 분명히 보였어. 세라피온은 노새를 재촉했지. 내 노새도 따라 걸어 그 뒤를 따랐지. 그러는 사이 길이 날카롭게 굽어져 S――시는 영영 내 눈에서 가려지고 말았어. 심지어 나는 결코 그곳에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을 지고 있었지. 지루한 사흘간의 여행 끝에 울적한 밭을 지나 나는 내가 관할해야 할 교회의 탑 위에 자리한 닭모양 풍향계가 숲 위에서 엿보이는 걸 보았어. 그리고 풀을 엮은 지붕과 작은 정원을 둘러싼 길을 지나자 이윽고 조금 장엄함을 유지한 교회 정면이 나왔지. 대여섯 개의 찰흙상으로 장식된 현관, 돌을 거칠게 깎은 원기둥, 기둥과 같은 돌로 만들어진 벽에서 이어진 기와지붕――단지 그뿐이었어. 왼쪽에는 잡초가 길게 자란 묘지가 있었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철십자가 우두커니 서있었지. 오른쪽엔 교회 뒤로 목사가 사는 집이 있었어. 집은 지독히 간단했고 심지어 냉혹한 청결함이 유지되고 있었지. 우리는 담벽 안으로 들어갔어. 대여섯 마리의 병아리가 땅에 뿌려진 밀을 쪼아 먹고 있었지. 척 보기에 성직자의 검은 옷에도 익숙한지 우리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을 비키려고도 하지 않았지. 그때 천식을 앓는 듯한 개 울음소리가 귀에 들어왔네. 늙은 개가 우리에게 달려온 거야. 그건 먼저 온 목사의 개였지. 힘없이 처진 눈동자와 회색 털이 특징적이었지. 그리고 극도의 노년 개에게 찾아올 수 있는 온갖 특징이 다 보였어. 나는 개를 부드럽게 두드려주었지. 개는 곧 말로 못할 만족스러움을 보여주고는 우리와 함께 걷기 시작했어. 이전 목사의 가정을 처리하던 노파도 우리를 맞이하여 작은 손님방으로 안내해줬지. 노파는 내게 앞으로도 자신을 써줄 거냐고 물었어. 나는 노파도 개도 병아리도 선대 목사가 죽을 때에 양보한 노파의 모든 가구도 전부 봐준다고 대답했지. 그 말을 듣고 노파는 마냥 기뻐했어. 그리고 세라피온은 그녀가 그 약간의 소유물에 대해 요구한 돈을 그 자리서 처리해줬지.
내가 취임하여 얼마 되지 않아 세라피온은 학교로 돌아갔어. 그렇게 나는 도움을 받거나 상담을 할 상대를 잃고 말았어. 그리고 클라리몽드의 추억은 다시 내 마음에 떠오르기 시작했다네. 나는 되도록 지워보려 애썼지만 나의 묵상에는 항상 그녀의 그림자가 동반했지. 어느 날 저녁 회양목이 심어진 길을 따라 우리집의 작은 정원을 산책할 때의 일이었지. 내가 잘못 본 건지 느릅나무 밑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걷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고 심지어 나뭇잎 사이에서는 바다 같은 녹색의 눈동자가 빛나는 게 보였지. 하지만 그것도 환상에 지나지 않았는지 정원 반대편까지 가보니 단지 모랫길 위에 발자국 하나가 남아 있는 게 전부였어――그러나 그 발자국은 아이 발자국인가 싶을 정도로 작았지. 그런 데다가 정원은 높은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었다네. 나는 정원 구석이란 구석은 다 찾아 보았는데 누구 하나 발견할 수 없었어. 나는 괴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후에 일어난 기괴한 일과 비교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지.
나는 일 년을 고스란히 내 직무상의 의무를 가장 엄격하게 해냈다네. 기도하고, 단식하고, 설교하고, 환자에게 영혼의 안식을 주고 또 이따금 나 스스로의 생활에도 지장이 갈 정도로 일하며 생활했어.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격한 술렁임 같은 게 있었지. 하늘의 은혜로 가득 찬 연못마저 내게는 더 이상 샘솟지 않는 거 같았어. 나는 신성한 사명을 채우는 일로 태어난 행복을 맛볼 수가 없었던 거야. 내 사상은 멀리 떠올라 단지 클라리몽드가 해준 말만이 반복되어 입술 위에 올랐지. 아아, 형제여, 잘 생각해보게나. 단 한 번 고개를 들어 여인을 본 탓에, 그 사사로운 과실 때문에 나는 몇 년 동안 가장 비참한 고통의 희생자가 된 거야. 그리고 내 생활의 행복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 거지.
나는 끝없이 내 마음에 반복되는 승리와 패배를, 또 한층 더 무서운 추락에 나를 빠트린 승리와 실패를 이 이상 이야기하는 건 관두려 한다네. 그리고 곧 내 이야기의 사실로 옮겨가고 싶어. 어느 밤, 문의 호출벨이 길고 거칠게 울렸어. 집안일을 맡던 노파가 일어나 문을 열자 모르는 사람이 서있었지. 발바라(노파의 이름이라네)의 등불 빛 속에서 훌륭한 외국 차림을 하고 허리춤에 단도를 찬 남자가 청동 같은 얼굴을 한 채 서있었지. 노파는 당초 두려움을 느꼈어. 하지만 그 모르는 사람은 그녀가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볼일을 이야기했지. 내가 몸을 바친 신성한 직무에 관해 서둘러 나와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고 한 거야. 발바라는 내가 자리를 튼 2층으로 그 남자를 안내했어. 그는 자신의 여주인인 어떤 귀부인이 지금 숨을 거두려는 참이라 목사가 와주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했지. 때문에 나는 언제라도 그와 함께 가겠다고 대답했어. 그리고 임종과 도유식에 필요한 성스러운 물품을 갖추고 서둘러 2층을 내려갔지. 그러자 문 바깥에는 밤처럼 검은 말 두 마리가 거칠게 바닥을 쓸고 수중기처럼 긴 콧김으로 가슴을 가리며 서있었다네. 그 남자는 등불을 들고 내가 말에 타는 걸 도아주었지. 그러더니 자신은 안장 앞부분에 손을 얹고는 껑충 한 필의 말에 오르고는 무릎으로 말의 양쪽 배를 조여 고삐를 풀었어. 그러자 말은 바로 화살처럼 달려 나갔지. 남자가 고삐를 쥐고 있던 내 말도 그 말에 뒤쳐질 수 없다며 공중을 날다시피 했다네. 우리는 하염없이 서둘렀어. 대지는 우리 아래서 새파랗게 질린 회색 줄무늬처럼 뒤로뒤로 흘러갔지. 가로수의 검은 그림자는 패주한 군대처럼 우리 좌우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어. 우리가 어두운 숲을 지났을 때에 나는 차가운 어둠 속에서 으스스 한 공포가 내 몸에 들러붙는 걸 느꼈지. 우리가 탄 말발굽과 돌길이 만들어내는 불똥의 비는 우리의 뒤편에 불빛의 길처럼 빛났다네. 그 한밤중에 우리를 본 사람이 있다면――내 안내인과 나를――그 사람은 두 유령이 악마에게 쫓겨 달리는 거라 생각할 게 분명했을 거야. 여우불은 이따금 길에서 점멸하였고 밤새는 숲 안쪽에서 꺼림칙하게 울었지. 그 숲에는 이따금 산고양이가 불을 내뿜는 듯한 눈동자를 빛내는 일마저 있었어. 말의 갈기는 서서히 흐트러져 갔고 배에는 땀이 흘렀으며 괴로운 콧소리도 냈지. 하지만 안내하는 남자는 말걸음이 느려지는 걸 보고는 거의 인간이란 게 믿기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말을 혼냈어. 그러자 말은 다시 미친 듯이 달려갔지. 그렇게 선풍 같은 경주가 끝났어. 수많은 빛이 들어 온 커다란 검은 무언가가 불쑥 눈앞에 우뚝 서있었지. 말발굽은 튼튼한 목조 다리 위에서 전보다 더 크게 울렸고 두 사람은 이윽고 커다란 두 탑 사이에 문을 연 아치형 회랑으로 말을 끌었지. 성곽 안은 확실히 일종의 큰 흥분에 지배되어 있었어. 넓은 정원에는 휏불을 든 종자가 종횡무진 달렸고 머리 위에는 등불 빛이 계단을 오르고 내렸지. 나는 혼잡 속에서 그 강대한 건물을 볼 수 있었는데――둥근 기둥이나 아치 복도, 계단이나, 사다리――그곳은 마법의 나라라 해도 좋을 당당하고 화려한 정취와 맑고 고운 우아한 품격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지. 그러자 흑인 시종 하나가――이전에 클라리몽드의 편지를 가져다준 남자였지. 나는 그걸 바로 알 수 있었어――내가 말에서 내리는 걸 도우러 왔어. 그리고 검은 벌벳 옷을 입고 목에 금사슬을 걸친 집사도 상아 지팡이에 기대어 나를 보러 왔지. 보니까 커다란 눈물이 눈에서 떨어져 뺨과 하얀 수염 위에 흐르고 있었다네.
"늦었습니다." 그는 슬프게 고개를 젓고는 소리쳤어. "늦었어요. 영혼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이리 오셔서 같이 밤을 보내주시지요."
그는 내 손을 잡고 죽은 자의 방으로 안내했어. 내 울음도 결코 그 노인에게 밀리지 않았을 테야. 그건 죽은 사람이 그 클라리몽드, 내가 그처럼 깊고 격렬하게 사랑했던 클라리몽드였단 걸 알았기 때문이야. 침상의 발밑에는 기도서가 놓여 있었지.
청동 술잔에 점멸하는 푸른빛은 방안을 몽롱하게 만들었어. 신비한 빛으로 가득 차 어둠 속에서 가구나 호스의 돌출된 부분을 이따금 밝게 떠오르게 했지. 테이블 위에 놓인 조각이 새겨진 항아리 안에는 갈라진 하얀 장미 한 다발이 꽂여 있었다네. 그 꽃잎은――하나만 남아 있었는데――모두 향이 좋은 눈물처럼 항아리 아래에 떨어져 있었지. 박살 난 검은 가면과 부채 등 팔걸이의자 위에 놓인 여러 분장 도구를 보아도 "죽음"이 아무 안내도 없이 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성곽에 들이닥친 걸 알 수 있을 거야. 나는 차마 침상 위를 볼 수 없어 무릎 꿇은 채로 "죽은 자를 위한 찬미가"를 부르기 시작했어. 그리고 격렬한 열정으로 신이 나와 그녀의 기억 사이에 무덤을 만들어 앞으로 내가 기도할 때에도 그녀의 이름을 영원히 "죽음"으로 정화된 이름으로서 입에 올리는 걸 허락해준 데에 감사했지. 하지만 내 정열은 굉장히 약해져서 나는 저도 모르게 어떤 몽환 속에 빠지고 말았지. 애당초 그 방은 조금도 죽은 자의 방 답지 않았어. 내가 밤을 새는 동안 맡아 온 불쾌한 시체 냄새 대신에 옅은 동양의 향신료 냄새가――나는 요염한 여자의 향이 어떤 건지 알지 못했지――부드럽게 미적지근한 공기 안에 떠올라 있었던 거야. 창백한 빛은 시체 옆에 노랗게 빛나는 촛불을 대신한다기보다는 되려 음란한 환락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진 조명만 같았지. 나는 클라리몽드가 영원히 내게서 사라진 순간에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었던 기묘한 운명을 줄곧 생각해 봤어. 그리고 남겨진 한탄과 번뇌가 내 가슴에서 새어 나왔지. 그때 나는 내 뒤에서 누군가가 숨을 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네. 하지만 돌아보니 그것은 단지 반향에 지나지 않았지. 하지만 그 찰나에 내 눈은 그때까지 보는 걸 피해 온 죽은 자의 침상 위로 떨어졌어. 커다란 꽃자수로 장식된 붉은 장막이 황금 방에 걸려 아름답게 유해를 보여주었지. 유해는 길게 옆으로 누워 가슴 위에서 손을 모으고 있었어. 눈부신 하얀 아마 장의복도 벽에 걸어 둔 음울한 자색과 현저한 대비를 이루고 심지어 탄력을 지닌 옷감은 그녀의 육체가 지닌 부드러운 형태를 조금도 숨기는 법 없이 보는 사람의 눈을 아름다운 윤곽의 곡선에 따르게 하는――백조의 목덜미 같이 매끄러운――그 윤곽이 가진 우아함과 상냥함은 '죽음"마저도 빼앗지 못했던 거야. 그녀는 마치 교묘한 조각가가 여왕의 묘 위에 놓기 위해 만든 설화 석고상이거나 혹은 잠든 소녀 위에 소리 없는 눈이 한 점의 더러움도 없는 옷을 수놓고 간 것처럼만 보였어.
나는 이제 힘을 담아 기도를 받쳐줄 수가 없게 되었어. 침실의 공기는 나를 취하게 만들었고 반쯤 시든 장미꽃의 열을 앓는 듯한 냄새는 내 두뇌에 스며 들었지. 내 몸은 쉼 없이 이곳저곳을 걸으며 걸음을 돌릴 때마다 투명하게 비춰 보이는 수의를 입은 시체를 얹은 침상 앞에 멈춰 서 누워 있는 아름다운 시체를 아무 말도 없이 그리기 시작했지. 내 두뇌에는 뜨거운 공상이 오고 갔던 거야. 나는 사실은 그녀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다리가 하얀 옷 아래서 움직여 조금 감겨져 있는 수의의 긴 직선을 흐트러 놓은 것처럼만 느꼈지.
그렇게 나는 자문했어. "이게 진짜 클라리몽드일까? 그녀라는 증거가 어디 있다는 걸까. 그 검은 시종은 다른 귀부인에게 고용된 게 아닐까. 이렇게 홀로 괴로워해서는 나는 기어코 미쳐버릴 게 분명해." 하지만 내 심장은 격하게 뛰며 이렇게 대답했지.
"분명 그냥. 그녀가 맞아." 나는 다시 침대로 다가갔어. 그리고 다시 주의하여 의심스러운 시체를 응시했지. 아아, 나는 이 또한 자백해야 하는가. 그 우수하고 완벽한 형태는 "죽음"의 그림자로 정화되었다 해도 평소보다도 더 음란하고 현혹스럽게 느껴졌지. 그리고 또 그 안식은 누구도 "죽음"이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수면과 아주 닮아 있었어. 나는 이곳에 장례를 도우러 온 것도 잊고 말았지. 아니 되려 신부의 방에 들어온 신랑을 상상했어. 신부는 얌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채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 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을 품고서 심지어 미칠 듯한 희망에 사로잡히고 공포와 쾌락에 떨며 그녀의 위로 몸을 기울여 수의 끝에 손을 걸쳤어. 그리고 그녀의 잠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양 숨을 죽인 채로 그 수의를 들어 올려 보았지. 내 심장은 격하게 뛰었고 관자놀이 부근에는 파리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어. 땀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것도 마치 내가 대리석 판을 구부리고 있는 것처럼만 느껴졌지. 그리고 그곳에는 정말로 클라리몽드가 누워 있었어. 내가 성직자가 된 날에 본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누워 있었지. 그녀의 모습은 그대와 다를 바 없이 아름다웠어. '죽음'마저 그녀에게는 마지막 교태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새파랗게 질린 뺨, 살짝 색이 바란 입술, 하얀 피부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긴 속눈썹, 그러한 게 모두 그녀에게 슬픈 정숙과 내심의 고통이란 말로 못할 요염한 모습을 선사하였지. 아직 작은 푸른 꽃으로 땋은 긴 머리는 그녀의 머리맡에 눈부신 베개를 만들었고 풍성하게 감긴 머리는 드러난 어깨를 가려주고 있었지. 성면포다도 정숙하고 깔끔하며 아름다운 손은 깍지 낀 채로 조용한 안식과 무언의 기도를 올리 듯이 가슴 위에 얹어져 있었어. 아직 진주 팔찌를 풀지 않은 채 드러난 팔이 상아처럼 맨질맨질하고 부드러운 살점을 보여주는 요염함에――죽고 나서도 또한――여전히 반항의 뜻을 드러내고 있었지. 내게는 "삶"이 이 아름다운 육체를 영원히 뺏어간 게 믿기지 않기 시작했어. 하지만 등불의 빛이 반사되기라도 한 건지 그건 나도 알 수 없었지만(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목숨을 잃고 창백해진 피부 아래에는 다시 혈액의 순환이 시작된 것처럼만 보였어. 나는 가볍게 내 손을 그녀의 가슴 위에 두어 보았지. 물론 그 또한 차가웠어. 하지만 그 교회 현관에서 내 손을 만졌을 때보다 차갑지는 않았지. 나는 다시 그녀의 위에 고개를 숙인 채로 따스한 눈물로 그녀의 뺨을 적셨다네. 아아,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큰 절망, 자포자기의 괴로움,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한탄과 번뇌에 괴로워해야 했는가. 나는 차라리 내 생명을 한 덩어리의 물질로 모아 그녀에게 주고만 싶었어. 그리고 그녀의 차가운 몸에 나를 괴롭히는 불꽃을 불어 넣어주고 싶었지. 하지만 밤은 서서히 저물어 갔어. 나는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는 걸 느끼면서도 내 유일한 연인인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는 마지막이자 슬픈 쾌락을 버릴 수 없었지…… 그때 기적이라도 벌어진 걸까. 작은 호흡이 내 호흡과 뒤엉키고 클라리몽드의 입술은 내 정열로 넘치는 입맞춤에 응해주었어. 그는 눈을 뜨고 햇살의 빛을 보여주었지. 심지어 긴 숨을 쉬고 맡잡고 있던 팔을 풀고는 넘칠 듯한 기쁨을 얼굴에 드리우며 내 목을 안은 채로 "아아, 당신이로군요, 로뮤알"하고 중얼거려주었어. 하프의 마지막 울림처럼 애달프고 아름다운 목소리였지. "뭐가 그리 슬프죠? 너무나 오랜 시간을 당신만 기다리다 죽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결혼 약속을 했잖아요.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어요. 잘 있어요, 로뮤알. 잘 있어요.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뿐이에요. 당신의 입맞춤으로 아주 잠깐 돌아온 목숨을 당신에게 돌려 드릴게요. 금방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고개가 축 늘어졌어. 팔은 여전히 나를 붙잡는 것처럼 나를 안고 있었지. 그때 엄청난 선풍이 불쑥 창문을 때리더니 방안으로 들어왔어. 그러자 하얀 장미의 마지막 잎 하나가 방금 전 항아리 끝에서 나비 날개처럼 흔들렸는데, 이윽고 항아리를 벗어나 클라리몽드의 혼을 실은 채로 동이 트기 시작한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지. 그렇게 등불도 꺼졌어. 그리고 나는 아름다운 사망자의 가슴 위에 정신을 잃은 것처럼 쓰러지고 말았지.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목사관의 작은방 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네. 먼저 살던 노견이 잠옷 밖으로 나온 내 손을 핥고 있었어. 발바라는 늙은 나이와 불안에 떨면서 서랍을 열고 닫거나 잔 안에 가루약을 넣는 등 바쁘게 온방을 서성였지. 하지만 내가 눈을 뜬 걸 보자 기쁨의 환희를 질렀고 개도 짖으며 꼬리를 흔들더군. 하지만 나는 아직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아 입도 열지 못했고 도무지 꼼짝도 할 수 없었어. 그 후 나는 내가 약간의 호흡 말고는 살아 있단 기미도 없이 꼬박 삼일 동안 자고 있었단 걸 알았다네. 나는 그 삼 일간의 기억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아. 발바라는 내가 목사관을 나간 밤에 찾아온 남자가 다음 날 아침에 문을 닫은 마차에 나를 태워 와 곧장 떠났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지. 내가 도통 이어지지 않는 사고를 결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무시무시한 밤에 있었던 모든 일을 마음속에 그려낼 수 있게 되었네. 나는 당초 어떤 마술적 환혹의 희생에 당한 거라 생각했는데 머지않아 그럼에도 진실되고 정확한 사실이라 볼 수 있는 다른 사정을 찾아냈기에 그런 생각을 용납할 수 없게 되었어. 나는 꿈을 꾼 게 아니었던 게야. 왜냐면 발바라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두 필의 검은 말을 데리고 온 누군지 모를 남자를 보았고 그 남자의 풍채나 형태를 자세하게 말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내가 클라리몽드가 재회한 성과 일치하는 곳을 아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지.
어느 아침, 나는 내 방에서 세라피온과 만났다네. 발바라가 내가 앓고 있다 말해주어 서둘러 보러 온 거야. 서둘러 왔다는 건 그가 나에게 애정과 관심을 지녔단 증거기도 하지만 그 방문은 물론 내게 유쾌함을 주지 못 했어. 세라피온은 그 시선 속에 꿰뚫어 보는 듯한 혹은 심문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기에 나는 굉장히 겸연쩍었지. 그와 대치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당혹함과 죄의식을 지울 수 없었던 거야. 얼핏 보기에 그는 내 마음속 고통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어. 나는 실로 그 통찰력 때문에 그를 미워한 셈이지.
그는 위선자 같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내 건강을 물으며 끝없이 사자와 같은 크고 노란 눈으로 나를 보며 측심추 같은 시선을 내 영혼 안에 넣은 걸세. 그리고 그는 내가 어떤 방침으로 이 구역을 관할하고 있는가, 여기 와서 행복한가, 일이 없을 때는 어떻게 지내는가, 이웃들하고는 많이 친해졌는가, 무얼 읽는 게 가장 좋은가 따위를 수도 없이 물었지. 나는 그런 물음에 되도록 짧게 대답했어.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내 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다음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네. 이러한 대화는 그가 실제로 하고 싶은 말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을 게 분명했지. 끝내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치 겨우 떠올린 이야기를 잊지 않고 말해두는 듯이 명석한 목소리로 불쑥 이렇게 말했어. 그 목소리는 내 귀에는 마지막 심판의 나팔처럼만 울리고 말았지.
"그 명성 높은 창부 클라리몽드가 여드레 동안 밤낮으로 연회를 연 끝에 며칠 전 기어코 죽어버렸다는구나. 이런 외도가 또 있겠느냐. 발타자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서 벌어졌던 죄악이 다시 벌어진 게지. 주님, 저희는 정말로 말세를 살고 있나 봅니다. 손님들은 모두 흑인 노예의 급사도 받았다지. 그 노예들은 또 무언가 알지 못할 말을 한다는구나. 내 눈에는 악마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추한 자의 옷마저 황제가 제례 때에 입을 정도였다는 모양이다. 그 클라리몽드에겐 시종 묘한 소문이 따라붙었어. 여자 야차라는 모양이야. 하지만 나는 벨제바브라 믿어 의심치 않느니라."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마치 그 이야기의 효과라도 살피 듯이 전보다 더 주의 깊게 나를 보았다네. 나는 그가 클라리몽드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녀가 죽은 순간도 내가 본 그날 밤의 광경과 일치하기에 내 가슴을 두려움과 고뇌로 채우기에 충분했지. 그런 두려움과 고뇌는 내가 안간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도 드러나고 말았어. 세라피온은 걱정스러우면서도 엄격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으나 이윽고 말하길 "내 너에게 충고하지는 않겠다. 너는 지금 발을 세워 나락의 끝자락에 서있는 꼴이야.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악마의 손톱은 길단다. 묘마저 도움이 되지 않지. 클라리몽드의 묘는 삼중의 봉인이라도 해야 할 테지. 사람들이 말하는 게 진실이라면 그 여자가 죽은 게 처음이 아니라는구나. 신이 너를 지켜주기를 바라겠노라, 로뮤알."
그렇게 말한 세라피온은 조용히 현관으로 걸어갔어. 나는 그때 그를 다시 보지 못 했다네. 그가 곧장 S――로 돌아갔기 때문이야.
건강이 회복되고 나선 다시 일상의 직무에도 임할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클라리몽드와 세라피온의 말은 한 시도 나를 벗어날 줄을 몰랐어. 그러나 그의 꺼림칙한 예언이 실현되는 듯한 대사건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의 걱정도 내 공포도 과장된 게 분명하다고 믿게 되었다네. 그러던 어느 날은 이상한 꿈을 꿨지. 내가 잠에 들려는 순간에 침상의 장막 고리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봉 위로 미끄러져 장막이 열린 걸세. 그래서 재빨리 팔꿈치를 짚으며 일어나 보니 내 바로 앞에 여자 하나가 서있었어. 나는 곧장 그게 클라리몽드인 걸 알 수 있었지. 그녀는 손안에 묘지 안에 둘 법한 작은 램프를 들고 있었다네. 그 빛을 받은 그녀의 손가락은 장미색으로 투명하게 비쳤고 그게 또 서서히 선명하지 않고 우유처럼 하얀 전라의 팔에 녹아들었어. 그녀는 마지막 순간, 침상 위에 누워 있을 때 그녀를 덮었던 수의를 입고 있었지. 그녀는 그런 꼴사나운 옷을 입은 걸 부끄러워하듯 소매로 가슴가를 가렸지만 그녀의 작은 손은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았다네. 그녀의 수의 색은 램프의 새파란 빛 속에서 그녀의 살색과 하나가 될 정도로 투명했던 게야. 그녀의 몸이 가진 온갖 윤곽을 드러내는 듯한 매끈한 직물에 둘러싸인 그녀의 모습은 살아 있는 여자보다도 되려 과거의 대리석상을 연상시키게 했다네. 그러나 죽었다 한들, 살았다 한들, 석상이라 한들 또 여자라 한들, 그림자라 한들, 육체라 한들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아름다웠어. 단지 다른 건 그녀의 눈이 머금은 녹색 빛이 이전보다 빛을 잃었고 과거에는 불타는 듯이 새빨갛던 입술이 이제는 뺨의 색처럼 옅은 장미색으로 물들었다는 점이었지. 내가 앞서 본 머리에 꽂은 작은 파란 꽃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갈라져 있었고 거의 남김없이 잎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막는 법은 없었지――그녀는 그러한 성질이 신비함에도 불구하고 또 내 방에 들어온 게 기괴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깐 동안 어떤 공포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게만 보였지.
그녀는 램프를 탁자에 두고 내 침상 뒤에 앉았지. 그리고 내게 몸을 숙이며 은처럼 반짝이고 심지어 벌벳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네. 그 목소리는 그녀를 제외하면 누구의 입술로도 듣지 못할 것 같은 목소리였지.
"당신을 너무 기다리게 했군요, 로뮤알. 제가 당신을 잊었다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는 먼 곳에서 왔답니다. 정말로 먼 곳이지요. 그곳에 간 사람은 누구도 돌아온 적이 없는 나라에요. 그리고 해님도 달님도 없지요. 단지 공간과 그림자만 있는 곳이고 큰길도 작은 길도 없는 곳이죠. 밟고 싶어도 땅이 없고 날고 싶어도 공기가 없어요. 그런데도 잘도 돌아왔지 싶죠? 왜냐면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이에요. 사랑이 끝내는 '죽음'을 이기기 때문이에요. 이곳에 오는 도중에 얼마나 슬픈 얼굴이나 얼마나 무서운 얼굴을 봤을까요. 단지 의지의 힘만으로 지상에 돌아와 몸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제 영혼은 정말 괴로운 꼴을 당했답니다. 저를 두르고 있던 무거운 판을 밀어낼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요. 보세요, 제 손바닥이 상처투성이죠? 손에 입맞춤을 해줘요. 그러면 나을 테니까요." 그녀는 차가운 손등을 하나씩 내 입에 대었다네. 나는 몇 번이나 그에 입맞춤을 했어. 그동안에도 그녀는 넘치는 듯한 애정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
부끄럽지만 자백해야겠어. 그때 나는 세라피온의 충고도 내가 입고 있는 신성한 직무도 모조리 잊고 말은 거야. 나는 어떠한 저항도 없이 바로 추락해버린 거지. 클라리몽드의 피부가 가진 새로운 차가움이 나의 피부에 스며 들어 나의 음욕이 전신에 퍼지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네. 내가 그 후에 본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그녀가 악마라는 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적어도 그녀는 그러한 모습을 하지 않았으니까. 악녀가 이렇게나 교묘하게 그 손톱과 뿔을 숨긴 건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 분명하지. 그녀는 다가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흐트러진 요염함에 가득 찬 모습으로 이따금 작은 손을 내 머릿속에 넣어서는 어떻게 하면 내 얼굴에 어울릴지 보는 것처럼 내 머리를 쓸거나 말거나 했다네. 내가 죄 깊은 기쁨과 쾌락에 젖어 그녀의 손에 내 몸을 맡기자 그녀는 또 상냥한 장난과 함께 즐거운 이야기를 여럿 들려주었지. 심지어 놀라운 일은 내가 그러한 신비한 일에 만나면서도 어떠한 놀람도 가지지 못했단 점이야. 마치 꿈속에서는 어떠한 공상적인 일이라도 단순한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사정을 전부 자연스럽게만 받아들였지.
"당신과 만나기 줄곧 이전부터 저는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귀여운 로뮤알, 그리고 온갖 곳을 찾아다녔죠. 당신은 제 사랑이었던 거예요. 그때 교회에서 처음 뵈었죠? 저는 곧장 '그 사람이다'하고 느꼈어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사랑,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제 앞에 기다리고 있을 모든 사랑을 담아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그 눈으로 보면 아무리 뛰어난 성직자도 임금님도 주위가 모두 보는 앞에서 제 발밑에 무릎 꿇고 만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렇지 않았죠. 저보다 신이 좋다면서요."
"저는 정말로 신이 싫어요. 당신은 그때도 신이 좋다고 말했고 지금도 저보다 좋아하니까요."
"아아, 아아, 저만큼 불행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가질 수 없어요. 당신이 입맞춤으로 살려준 나는――당신을 위해 문을 부수고 당신을 행복하게 하고 싶어 목숨을 당신께 바치고 있는 나는."
그녀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정열로 가득 찬 애무를 동반했다네. 그 애무는 내 감각과 이성을 흔들었고 나는 끝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신을 모독하는 무서운 말을 내뱉고는 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를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것마저 주저하지 않게 되었어.
그러자 그녀의 눈은 다시 에메랄드처럼 빛났지. "정말로요?――정말로요?――신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 아름다운 가슴에 나를 안으며 외쳤어. "그럼 저와 같이 가는 거죠? 어디든 제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는 거죠? 당신은 이제 그 추한 검은 법의를 벗어버리는 거예요. 당신은 기사 중에서도 가장 대단하고 가장 부러움을 받는 기사가 되는 거예요. 당신은 제 연인이에요. 교황의 말도 듣지 않게 된 클라리몽드의 연인이요. 조금은 의기양양해하는 게 어때요? 아아, 아름다워라.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행복한 평생을 눈부시고 황금색으로 가득 찬 생활을 둘이서 즐기는 거죠. 그래서 언제 떠날 거죠?"
"내일, 내일." 나는 무아몽중히 소리쳤지.
"그럼 내일로 하죠. 그 사이에 화장을 고칠 수 있겠어요. 지금 입고 있는 건 너무 얇아서 여행하기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죽은 줄 알고 더할 나위 없이 슬퍼하는 친구들에게도 알려야겠어요. 돈에 옷, 마차――모두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오늘 밤과 같은 시각에 찾을게요. 잘 있어요." 그녀는 입술을 가볍게 내 이마에 얹었지. 램프는 꺼지고 막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모든 게 다시 어두워졌어. 납처럼 무겁고 꿈도 꾸지 않을 듯한 졸음이 내 위로 밀려와 다음날 아침까지 나는 그야말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네.
나는 여느 때처럼 아침 늦게 눈을 떴어. 그리고 그 신비한 일의 회상이 종일 나를 괴롭게 했지. 나는 끝내 그게 내 뜨거운 몽상이 만든 아지랑이 같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어. 하지만 그 감각이 너무나 분명했기에 사실이 아니란 걸 믿기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네. 그리고 나는 와야 마땅할 사실에 약간의 예감을 품으며 모든 마상을 떨쳐내고 청렴한 잠을 지켜낼 수 있도록 신에게 기대한 후에 겨우 침상에 누울 수 있었지. 그렇게 나는 곧 깊은 잠에 들은 게야. 그리고 내 꿈도 계속되었지. 막이 다시 열리고 나는 클라리몽드의 모습을 보았다네. 새파랗게 질린 수의를 새파랗게 질린 몸에 두른 채 뺨에 '죽음'의 보라색을 품고 있던 전날 밤과 달리 밝고 활기차며 녹빛이 감도는 제비꽃 색의 화려한 색상에 끝자락을 금색 레이스로 치장한 여행복을 입고서 양옆구리서는 수자 바지를 드러내고 있었지. 하얀 깃털이 꽂은 검고 큰 라사 모자 아래로 여러 형태로 꼰 재밌는 금발 머리를 내려놓고 있는 그녀는 손에 금색 호루라기가 달린 자그마한 채찍으로 나를 가볍게 때리며 이렇게 외쳤다네. "자, 그만 자고 일어나야지? 이게 당신의 여행 차림이야? 나는 당신이 벌써 일어나 옷을 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서 일어나. 밍기적거릴 시간 없어."
나는 곧장 침상에서 뛰쳐 일어났지.
"자, 어서 옷을 입어줘. 그리고 나가야지." 그녀는 같이 가져온 작은 짐을 가리키며 "현관에 둔 말이 지루해서 재갈을 씹고 있잖아. 지금쯤이면 여기서 30리는 더 갔을 거야."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지. 그녀는 내게 옷을 하나하나 건네주었어. 그리고 내가 옷을 잘못 입으면 방법을 가르쳐주고 때로는 나의 서투름에 황당해하며 웃음을 터트렸지. 그러고는 서둘러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네. 그마저도 끝나면 베네치아의 수정에 은세공 테두리를 한 회중 거울을 내 앞으로 꺼내 재밌다는 듯이 물었지. "어떻게 보여? 나를 전속 시녀로 삼을 수 있겠어?"
나는 이제 평상시의 나라고 할 수 없었지. 그리고 스스로도 그게 나라는 게 믿기지 않아. 말하자면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닮지 않은 건 잘 만들어진 석상이 돌덩어리와 닮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지. 내 과거의 얼굴은 거울에 비친 지금의 얼굴을 서투른 화공이 그린 초상화처럼만 느껴졌지. 나는 아름다웠어. 그런 변화에 내 허영심이 자극 받을 수밖에 없었지. 아름답게 자수된 옷이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 버린 거야. 나는 어떤 형태를 따라 잘린 대여섯 척의 천이 내게 준 변화의 힘을 감탄하며 둘러보았다네. 내 의상의 정령은 내 피부 속에 스며 들어 십 분도 되지 않아 나를 버젓한 문명인으로 바꿔버린 게야.
나는 그 새로운 옷에 익숙해지려는 생각에 방안을 대여섯 번 정도 돌아보았지. 클라리몽드는 꼭과 같은 쾌락을 맛보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내 손짓 발짓에 만족하는 듯했어. "자, 많이 놀았지, 로뮤알? 이제 나가는 거야. 멀리 나가야 해. 늦어져도 안 되고." 그녀는 내 손을 잡고서 밖으로 나갔다네. 문이란 문은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열렸어. 우리는 개의 잠도 깨우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네.
나는 현관에서 전에 내 호위를 맡았던 그 흑인 호종 마르겔리튼을 보았지. 그는 세 마리 말의 재갈을 붙들고 있었다네――세 마리 모두 나를 그 성에 데리고 간 말처럼 검었지. 한 마리는 나를 위한 말, 한 마리는 그를 위한 말, 또 한 마리는 말인 셈이야. 그 말들은 서풍의 신의 잉태를 받은 암말이 낳았다는 스페인 말이 분명했지. 왜냐하면 그들은 바람처럼 빨랐거든. 문을 나올 때에 마침 동쪽에 올라 길가의 우리를 비춰준 밝은 달은 전차에서 벗겨진 찻바퀴처럼 공중에서 굴러 오른쪽의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가며 숨을 헐떡이며 우리를 따라 왔다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어느 평원에 이르렀어. 그곳에는 네 마리의 커다란 말이 끄는 마차 한 대가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렇게 마차에 옮겨 타자 이번에는 마부가 미치광이처럼 말을 몰았지. 나는 한 손을 클라리몽드의 어깨에 두고 그녀의 한 손을 잡았어. 그녀의 머리는 내 어깨에 얹어졌고 나는 반쯤 드러난 그녀의 가슴이 가볍게 나 팔을 누르는 걸 느꼈다네. 나는 그만큼 치열한 쾌락을 맛본 적이 없어. 그 사이 나는 모든 일을 잊어버렸다네. 내가 성직자였던 걸 기억하는 것도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었단 사실을 기억하는 것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어. 그 악마가 내 위에 얹은 매혹이 그만큼 컸던 셈이지. 그날부터 나의 성질은 어떤 의미에서 크게 둘로 나뉜 거 같다네. 말하자면 내 내면에 두 사람이 있고 서로를 알지 못하는 거야. 어느 때는 자신이 밤이 되면 신사가 된 꿈을 꾸는 성직자인가 하면 또 어느 때는 성직자가 된 꿈을 꾸는 신사였던 적도 있지. 나는 꿈과 현실을 나누지 못했을뿐더러 어디서 현실이 시작되고 어디까지를 꿈이래 봐야 할지도 알 수 없었어. 도락을 즐기는 귀공자는 성직자를 바보 취급했고 성직자는 귀공자의 방탕함을 매도했지. 서로 맞서면서 서로 닿지는 않는 두 나선이 나의 두 생활을 유감 없이 보여주리라 믿네. 하지만 나는 그 상태가 그러한 신비한 성질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일 분이라도 미치광이가 된 거 같진 않았어. 나는 항상 발랄하고 또렷한 심정으로 나의 두 생활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단 하나, 내게도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일이 있었지――즉 그건 같은 개인성의 의식이 전혀 상반된 두 인간 속에 존재했다는 거야. 내가 스스로를 C―― 마을의 목사보로 여겼는가, 클라리몽드가 보증해준 연인 로무알드 각하로 여겼는지――이게 내가 신비하게 여기는 하나의 변칙이라네.
어찌 됐든 나는 베니스에서 살았다네. 적어도 산다고 믿고 있었지. 내가 느낀 그 환상적이고 기괴한 사실 속에 환상과 인상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지는 솔직히 알 수가 없어. 우리는 카나레지오 근처의 벽화와 석상이 가득한 커다란 궁전에서 지냈지. 그건 한 나라의 왕궁으로도 부족할 게 없는 궁전이었고 우리는 제각기 곤돌라의 제복을 입은 선장도, 음악실도, 전속 시인도 가지고 있었다네. 특히 클라리몽드는 큰 규모의 생활을 누리는 게 아주 익숙했지. 그녀의 성격 속에는 클레오파트라를 닮안 무언가가 숨어 있었던 거야. 나는 또 왕자와 같은 군신의 줄을 이끌고 항상 대국의 네 복음 전도사나 열두 사도 중 한 명이나 한 집쯤 되는 듯한 경외를 받았어. 나는 대통령이 지날 때마저 길을 양보하지 않았지. 마왕(사탄)이 천국에서 떨어진 후로 나보다 오만불손한 인간이 이 세상에 있었을 거 같진 않군. 또 나는 리도에도 가서 지옥 그 자체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운마저 가지고 놀았어. 나는 갖은 사회의 가장 선량한 부분――몰락한 가문의 자제들, 여자 배우, 간사한 악당, 아첨꾼, 허세쟁이――을 환대했지. 그리고 그러한 생활에 잠기면서도 나는 항상 클라리몽드를 잊지 않았어. 나는 그야말로 광기처럼 그녀를 사랑했다네. 한 명의 클라리몽드를 지닌 건 스무 명의 정부를 가진 거나 다름없어. 아니 갖은 여자를 가진 것과 다름없지. 그녀는 그 한 몸으로 무수한 용모의 변화와 무수한 참신한 요염함을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야――그녀는 그야말로 여자 카멜레온이었어. 그녀는 내 사랑을 백 배로 되돌려주었지. 그녀가 추구하는 건 단지 사랑뿐이었어――그녀 덕에 깨어난 깨끗한 청춘의 사랑 말일세. 심지어 그 사랑은 최초이자 또 최후의 정열이어야 했지. 그렇게 나도 항상 행복했어. 단지 불행한 건 매일 밤 반드시 잠에 들 때면 내가 빈곤한 시골의 목사보가 된 꿈을 꾸면서 낮 동안 있었던 음욕과 환락을 후회하며 단죄와 고행에 몸을 바치는 것뿐이었지. 나는 항상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데 안주하여 내가 클라리몽드와 알게 된 신비한 관계를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어. 단지 그녀에 관한 세라피온의 말만이 이따금 기억 속에 드리워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지.
그러는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리몽드의 건강이 평소와 달리 나빠졌지. 얼굴색도 눈에 띄게 새파랗게 질려버렸어. 의사를 불러 검진해 보아도 병을 찾을 수 없어 어떻게 치료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 그들은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 처방전을 쓰고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네. 하지만 그녀의 얼굴색은 현저하게 안 좋아졌고 매일 같이 차가워졌지. 그리고 끝내 기그 신비한 성의 기억 속 밤처럼 하얗게 질리고 혈기마저 잃고 말았어. 나는 이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그녀를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말로 다 못할 고통에 괴로워했지. 하지만 내 몸부림을 알았던 거겠지. 클라리몽드는 마치 죽어야 한단 걸 알게 된 자의 마지막 웃음처럼 슬프게 또 상냥하게 내 얼굴을 보며 작게 웃었다네.
어느 아침, 나는 그녀의 침상 옆에 앉아 바로 옆에 놓인 작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지. 그건 내가 일 분이라도 그녀 옆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어떤 과일을 자르려던 차에 나는 실수로 내 손가락에 깊은 상처를 남겼어. 그러자 핏줄이 곧장 선명한 붉은 옥이 되어 흐르게 되었지. 그 방울이 두 방울, 세 방울 클라리몽드에게 떨어지더니 그녀의 눈은 곧장 빛났고 또 그 얼굴에도 내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듯한 거칠고 무서운 기쁨의 표정이 드러났다네. 그녀는 곧장 동물처럼 가볍게 침상에서 일어났고――마치 원숭이나 고양이처럼 경쾌하게――내 상처에 달려 들어서는 말로 못할 쾌감을 느낀 것처럼 내 피를 빨기 시작했지. 심지어 그녀는 조용히 주의하면서 마치 소물리에가 셀레스나 시라쿠스의 술을 맛보듯이 그 작은 입에 몇 번이나 빨아도 질리지 않았지. 그렇게 그녀의 눈꺼풀은 서서히 내려왔고 녹색 눈동자는 원보다도 타원에 가까워졌어. 그리고 내 손에 입맞춤을 하고는 입을 떼더니 또다시 몇 방울의 붉은 방울을 빨아내려 내 상처에 입술을 얹었지. 피가 더 나오지 않는 걸 본 그녀는 광택이 도는 눈을 빛내며 오 월의 아침보다도 장미색으로 젊어져 몸을 일으켰지. 얼굴은 반질반질 생기가 돌고 살점이 돌아왔으며 손도 따듯해졌어――평소보다도 더 아름답고 건강도 완전히 회복한 셈이지.
"나는 이제 죽지 않아. 죽지 않는 거야." 그녀는 기쁨에 반쯤 미친 것처럼 내 목에 매달리며 그렇게 외쳤지.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해줄 수 있어. 내 목숨은 당신 거야. 내 안에 있는 건 모두 당신에게서 온 거지. 당신의 풍부하고 귀중한 핏방울이 세상의 어느 불사약보다도 구하기 힘든 약인 셈이지. 그 핏방울 덕에 나는 생명을 되찾은 거야."
그 광경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지. 그리고 클라리몽드를 향한 이상한 의혹을 들게 했어. 어느 밤, 수면이 나를 목사관에 옮겼을 적에 나는 세라피온이 평소보다도 더 진중하며 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슬프게 외치듯이 말하길 "너는 영혼을 잃은 걸로도 모자라 육체마저 잃으려 하느냐. 못난 녀석. 지독한 꼴을 보는구나." 그의 그런 분위기는 나를 강하게 움직였지. 하지만 그 기억이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인상은 머지않아 사라져 끝 모르는 다른 걱정이 내 마음에서 그걸 치워버렸지. 그러던 어느 밤, 나는 클라리몽드가 식사 후에 항상 내게 권하던 향미가 들어간 술잔에 무언가 가루약을 넣는 걸 보았지. 그건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거울을 통해 본 것이었어. 나는 잔을 들고 입으로 옮기는 흉내를 내고는 나중에 마시려는 양 근처에 있던 가구 위에 놓았지. 그리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는 틈을 타 술을 탁자 아래에 뿌리고는 그대로 방으로 물러나 침대 위에 누웠지. 나는 조금도 잠들지 않고 이 신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 볼 셈이었다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리몽드가 잠옷을 입고 나타났지. 그리고 내 옆에 누웠어. 그녀는 내가 자는 걸 확인하고는 내 팔을 들어 올리고는 머리서 금으로 된 바늘을 꺼내며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했지.
"한 방울, 딱 한 방울. 내 바늘 끝에 루비 단 한 방울……당신은 아직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죽지 않아……아아, 불쌍하게도. 나는 아름다운 피를, 새빨간 피를 마셔야 해. 잘 자렴, 내 하나뿐인 보물. 잘 자렴, 나의 신, 나의 아이. 나는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냐. 나는 단지 당신의 목숨에서 내 목숨이 영원히 죽지 않을 만한 물건을 받아가는 거야.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는 다른 연인을 만들어 그 사람의 혈관을 마르게 하는 게 더 좋겠지. 하지만 당신을 알아버린 이후로 다른 남자는 모두 싫어졌어……어머, 아름다운 팔. 어쩜 이리 둥글까. 어쩜 이리 새하얄까. 나는 왜 이런 푸른 혈관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뚝뚝 눈물을 흘렸지. 그때 나는 그녀가 내 팔을 잡으며 그 위에 눈물을 떨어트리는 걸 느꼈어.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그 바늘로 나를 조금 찔렀지. 그리고 그곳에서 흐르는 피를 빨기 시작했어. 그녀는 고작 대여섯 방울 밖에 먹지 않았지만 내가 눈 뜨는 걸 두려워했는지 정성스레 작은 천으로 내 팔을 감아주었지. 그리고 또 상처에 고약을 발라주었기에 상처는 바로 나아버렸어.
이젠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 세라피온의 말이 옳았던 거야. 하지만 그런 적극적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클라리몽드를 사랑하는 걸 금할 수 없었지. 그리고 기꺼이 그 인공의 생명을 줄만한 혈액을 나서서 주려고 했어. 스뿐 아니라 나는 그녀를 거의 무서워하지 않았지. 나는 내 피를 한 방울씩 뺏기는 것보다도 내 팔의 혈관을 스스로 해부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 "자 마셔, 그리고 내 사랑을 내 피와 함께 네 몸에 침투하게 해줘." 나는 그녀가 나에게 잔 마취주나 그 바늘에 관한 건 일부러 한 마디도 하지 않기로 했지. 그렇게 우리는 가장 원만한 조화를 이룰 수 있었어.
하지만 나의 성직자스러운 우유부단함은 나를 평상시보다 한 층 더 괴롭히기 시작했지. 그리고 나는 내 괴로움을 제압하기 위해 무언가 새로운 단죄를 발명하는 것마저 상상하는 게 괴로워졌어. 그러한 환상은 무의식적이었기에 내게 실제적인 모종의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실이든 환상이든 그러한 음락에 더러워진 마음과 부정한 손을 담근 채로는 도저히 그리스도의 몸을 만질 수 없었지. 나는 그 음울한 환혹의 힘에 눌리는 걸 피하기 위해 먼저 잠에 드는 걸 피하려 노력했지. 그래서 나는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열거나 몇 시간이나 벽에 매달리는 식으로 전력으로 잠과 싸워본 게야. 하지만 수마는 끝없이 내 눈을 덮쳤고 모든 저항이 헛수고가 되면 나는 극도의 피로에 두 팔을 힘없이 늘어트린 채로 다시 수면의 파도에 휩쓸려 쾌락과 욕구의 해안가로 옮겨지고 말았지. 세라피온은 준엄한 훈계로 나의 무기력함과 부족한 용맹심을 엄하게 꾸짖었지. 그러던 어느 날은 내가 평소보다 한 층 더 괴로워하고 있자니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어. "그 끝없는 가책을 피하려면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구나. 내가 클라리몽드가 묻힌 곳을 안다. 그곳에서 그 여자의 시체를 파내어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얼마나 애처로운 꼴을 하고 있는지 보거라. 그러면 너도 좀먹어 먼지가 되어가는 시체를 위해 영혼을 잃는 망설임에 빠지지는 않을 테지. 이 방법은 반드시 너를 구해주리라." 나는 그 이중생활에 곤혹스러워 했기에 귀공자나 성직자 중 어느 쪽이 환혹에 희생된 건지를 확인하기 위해 바로 그 말을 승낙했지.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두 남자 중 하나를 다른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죽이거나 혹은 두 사람 모두 죽이겠다고 결심하였지. 그건 이러한 무서운 존재를 계속하는 일도 버티는 일도 불가능 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세라피온은 곡괭이와 각등을 갖춘 채로 한밤중에 장소도 위치도 그가 잘 알고 있는 ――의 묘지로 찾아가게 되었지. 어두운 각등의 빛을 들고 대여섯 겨의 묘비를 지난 우리는 커다란 잡초에 둘러싸이고 이끼와 기생 식물에 침투된 커다란 돌비석 앞에 이르렀다네. 그리고 그 위서 아래와 같은 묘비명을 볼 수 있었지.
여성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아간 날에 영광 있으리
클라리몽드 여기에 잠들다
"여기니라." 세라피온은 그렇게 중얼거렸지. 그리고 각등을 땅 위에 두고는 돌 끝자락에 곡괭이를 넣어 그 돌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지. 돌이 들어 올려지자 그는 기생 식물을 제거하기 시작했어. 나는 밤보다도 어둡고 밤보다도 조용히 옆에 서서 가만히 그가 하는 일을 바라보았지. 그동안 그는 그 거센 노동에 허리를 숙이고 땀에 젖은 채로 신음하고 있었어. 나는 그가 괴롭게 토해내는 숨이 말기 천식과 같은 거침을 품고 있는 것처럼 들렸지. 그게 참 기괴한 광경이었어. 누가 밖에서 우리를 보았다면 그 사람은 우리를 성직자가 아니라 되려 신을 모독하는 자로서 수의라도 훔치려 든다 여길 게 분명했지. 세라피온의 열성에는 집요함이나 혹독함 같은 게 담겨 있어서 천사나 사도보다는 되려 악귀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 그 커다란 독수리 같은 얼굴은 각등의 빛으로 날카롭게 떠올라 있었어. 뾰족한 이목구비와 함께 불쾌한 공상을 재촉하는 듯한 무서운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던 거지. 나는 얼음 같은 땀이 커다란 방울이 되어 내 얼굴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네. 내 머리는 무서운 경외에 곤두서있었지. 내 마음의 밑바닥에선 신랄한 세라피온의 행동이 증오해 마땅한 신성 모독처럼만 느껴졌어. 나는 머리 위에서 흐르는 검은 구름의 안에서 화염의 삼척형구(트라이앵글)이 내려와 그를 태우도록 기도할까 하는 생각마저 했지. 사이프러스에 둥지를 틀었던 올빼미는 각등의 빛에 놀라 이따금 저 하늘로 올라갔다네. 심지어 그때에 회색 날개로 각등의 유리를 두드려서는 슬픈 통곡을 했어. 야생 여우는 멀리 어둠 속에서 울어 수천이라는 불길한 울림은 침묵 속에서도 저절로 만들어졌지. 끝내 세라피온의 곡괭이는 관에 이르렀지. 판에 부딪혀 생긴 울림은 깊고 높은 소리를, 부딪힐 때에 '무'가 내뿜은 전율해야 할 소리를 어둡게 반향시켰지. 그리고 그는 관의 뚜껑을 비집어 열었다네. 나는 그때 클라리몽드가 대리석상처럼 창백히 두 손을 깍지 끼고 있는 걸 보았어. 그녀의 하얀 수의는 머리에서 다리까지 하나로 뻗어 있었지. 심지어 그녀의 색이 바란 입술의 꼬리에는 이슬이 맺힌 것처럼 작고 붉은 방울이 맺혀 있었다네. 그걸 보자 세라피온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올랐지. "아아, 여기 있었느냐, 악마여, 황금의 피를 빠는 부정한 매춘부여." 그는 성수를 시체 위에 뿌리고 그 위에 물을 칠한 쇄모로 십자를 그었지. 불쌍한 클라리몽드는 성수가 끼얹어지는 동시에 아름다운 육체를 먼지로 바꾸었고 단지 무서운 잿덩어리 한 줌과 반쯤 무너진 썩은 뼈의 무리만을 남겼다네.
"너의 정부를 보거라, 로뮤알 경." 세라피온은 엄숙하게 그 슬픈 잔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네. "이래도 너는 네 연인과 함께 리도나 후시나를 산책하고 싶으냐." 나는 무한한 파멸이 내게 내려 온 것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네. 나는 내 목사관으로 돌아갔어. 클라리몽드의 연인 로뮤알 경도 이제는 오랫동안 신비한 교제를 이어 온 불쌍한 성직자에게서 벗어난 게지. 단지 단 한 번, 그다음 밤에 나는 클라리몽드와 만났다네. 그녀는 교회 현관에서 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처럼 "불쌍한 사람. 무슨 짓을 한 거야?"하고 말했지. "왜 그 어리석은 목사의 말을 따른 거야? 행복하지 않았어? 내가 당신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지? 그런데도 당신은 내 무덤을 파고 내 비참함을 남 앞에 드러나게 했어.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교통은 영구히 찢어지고 만 거야. 잘 있어. 그래도 당신은 번번히 나를 그리워하게 될 거야." 그녀는 연기처럼 공중으로 사라졌지. 그리고 나는 두 번 다시 그녀와 만나지 못 했어.
아아, 그녀의 말이 옳았다네. 나는 끝없이 그녀를 그리워했어. 아니, 지금도 그녀를 그리워하지. 내 영혼의 평화는 높은 대가를 지불해 처음으로 이룰 수 있었던 거야. 신의 사랑은 그녀의 사랑을 채워주기엔 부족했다네. 형제여, 이게 내 젊을 적 이야기라네. 이 이야기는 잊더라도 결코 여자 얼굴은 보지 말아야 해. 그리고 밖을 걸을 때는 줄곧 땅을 보고 걸어야 하지. 왜냐면 아무리 신앙이 깊고 신중한 사람이라도 한 번의 실수로 영원을 잃기엔 너무나 간단하니까.
'고전 번역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횻토코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9.29 |
---|---|
오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9.28 |
히나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9.25 |
줄리아노・키치스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9.24 |
목이 떨어진 이야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9.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