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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시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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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남만절의 실내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직 유리그림 창문에 햇살이 들어올 시간이리라. 하지만 오늘은 장마로 날이 흐린 탓에 해가 진 후의 어둠과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가운데 고딕풍 기둥이 나무 피부를 빛내며 높게 렉토리움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안쪽에선 상등의 기름불 하나가 감실 안에 자리한 성자상을 비추고 있다. 참배인은 한 명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 어두컴컴한 실내서 서양인 신부 한 명이 기도를 위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나이는 마흔대여섯 쯤 됐을까. 이마가 좁고 광대가 돌출되어 구레나룻이 깊은 남자이다. 바닥 위로 늘어진 옷은 '하빗'이라 불리는 법의인 듯했다. 또 '콘타스'라 불리는 묵주도 손목을 한 번 감은 후 파란 구슬을 살짝 늘어트리고 있다.
 남만절 안은 물론 조용했다. 신부는 한사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일본인 여자 하나가 조용히 남만절 안으로 들어왔다. 몬이 새겨진 오래된 카타비라에 검은 오비를 두른 무가의 안주인 같은 여자였다. 이쪽은 삼십 대쯤 될까. 하지만 척 보기엔 나이보다도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무엇보다 얼굴색이 묘하게 안 좋다. 눈 주변에도 검은 그늘이 드리워 있다. 하지만 이목구비 자체는 아름답다고 해도 지장이 없다. 아니, 지나치게 단정한 탓에 되려 험악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여자는 자못 신기하다는 듯이 성수반이나 기도대를 보면서 머뭇머뭇 남만절 안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성단 앞에 신부 하나가 무릎 꿇고 있다. 여자는 살짝 놀라서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하지만 상대가 기도하고 있다는 건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여자는 신부를 바라보며 조용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남만절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신부도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여자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신부는 기도를 중단하고 겨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돌아보니 여자 하나가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눈치로 서있다. 남만절 내부에는 단지 신기한 남만절 용품을 구경 삼아 보러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호기심 때문에 찾아온 거 같지 않았다. 신부는 일부러 웃으며 서투른 일본어로 말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네, 조금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여자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빈곤한 처지임에도 이것만은 똑바로 묶어 올린 코가이마게의 고개를 숙인 것이다. 신부는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목례를 했다. 손은 푸른 구슬이 달린 '콘타스'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풀었다 하고 있다.
 "저는 이치반카세 한베이의 미망인인 시노라 합니다. 실은 제 아들 한노죠가 큰 병에 걸렸는데……"
 여자는 잠시 말을 흐린 후 이번에는 낭독이라도 하듯이 술술 용건을 이야기했다. 한노죠는 올해로 열다섯이 된다. 그런데 올해 봄부터 손쓸 도리 없이 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기침을 한다. 식욕이 없다. 열마저 높았다. 시노는 힘이 닿는 대로 의사를 찾아가고 약을 사는 등 병을 고치려 노력을 다 했다. 하지만 효과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서서히 약해져만 갔다. 그런 데다가 요즘 들어서는 생활고 탓에 요양도 마음처럼 해줄 수 없었다. 듣자 하니 남만절 신부님의 의술은 나병마저 고친다지 않은가. 부디 한노죠의 목숨도 구해주길 바란다………
 "보러 와주실 수 있나요? 네?"
 여자는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가만히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연민을 구하는 색도 없는가 하면 걱정에 견디지 못하는 기색도 없다. 단지 완고함에 가까운 조용함만을 보여주고 있다.
 "좋습니다. 봐드리죠."
 신부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영혼의 구원을 찾는 게 아니다. 육체의 구원을 찾고 있다. 하지만 나무랄 건 없다. 육체란 영혼의 집이다. 집의 수리만 제대로 갖추면 주인의 병도 쉽게 물러날 수 있다. 선교사 파비앙은 그 때문에 십자가를 숭배하게 되었다. 이 여자를 이곳으로 이끈 것도 그런 신의 뜻일지 모른다.
 "자제분께서 여기까지 오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그곳에 안내해주시죠."
 여자의 눈에 순간 기쁨의 빛이 감돌았다.
 "그런가요?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부는 선선한 감동을 느꼈다. 역시 그 순간 가면처럼만 느껴졌던 여자의 얼굴서 다툴 수 없는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이다. 앞에 서있는 건 더 이상 딱딱한 무가의 안주인이 아니다. 아니 일본의 여자마저 아니다. 오히려 구유통 안의 그리스도에게 아름다운 유방을 물린 "한없이 유연하시고 더할 나위 없이 자애로우시고 아름다우신 천상의 여인"과 같은 어머니가 된 것이다. 신부는 가슴을 펴며 쾌활하게 여자에게 말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병도 대체로 알고 있습니다. 아드님의 목숨은 제가 맡겠습니다. 어찌 됐든 할 수 있는 건 해보지요. 만약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면……"
 여자는 부드러운 말투로 끼어들었다.
 "아뇨, 당신께서 한 번 봐주시면 그 후론 어떻게 되어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그 후엔 단지 키요미즈데라의 관세음보살의 가호에 매달릴 수밖에 없겠지요."
 관세음보살! 그 말은 신부의 얼굴에 짜증을 드리우게 했다. 신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의 얼굴을 날카롭게 보며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꾸짖었다.
 "조심하시지요. 관음, 석가, 하치만, 텐진――당신들이 숭배하는 건 모두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 진정한 하느님은 단 한 분뿐입니다. 하느님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하느님의 뜻에 달렸습니다. 우상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자제분이 소중하시다면 우상께 기도 올리는 건 관두셔야 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카타비라의 소매를 턱에 얹은 채로 놀라서 신부를 보고 있다. 분노로 가득 찬 신부의 말도 이해한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신부는 거의 위압하듯이 구레나룻이 자란 얼굴을 들이밀면서 열심히 이렇게 경고했다.
 "진정한 신을 믿으시지요. 진정한 신은 유대의 나라 벨렌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다른 신으로 알려진 건 악마입니다. 타락한 천사가 변모한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저 모습이 보이십니까?"
 신부가 엄숙히 손을 뻗고는 뒤에 있는 유리 그림 창문을 가리켰다. 마침 옅은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은 남만절 안을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수난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십자가 아래서 눈물 흘리는 마리아나 제자들도 드러내고 있다. 여자는 일본풍으로 합장하면서 조용히 그 창문을 보았다.
 "저게 소문으로 듣던 남만의 여래이신가요? 아들의 목숨만 구할 수 있다면 저는 저분께 평생을 바쳐도 상관없습니다. 부디 가호를 내려주시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여자의 목소리는 침착한 가운데 깊은 감동을 품고 있었다. 신부는 이윽고 자랑스러운 것처럼 살짝 고개를 든 채로 전보다도 더욱 웅변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저희의 죄를 씻어주시고 저희의 혼을 구하기 위해 지상에 강림하신 겁니다. 들어 보시죠. 그 평생의 괴로움을!"
 신성한 감동으로 가득해진 신부는 주변을 걸으며 빠른 말로 그리스도의 평생을 이야기했다. 덕을 갖춘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를 알리러 온 천사를, 마구간에서 강림한 순간을, 또 그 강림을 알리는 별을 보고 유향이나 몰약을 바치러 온 현명한 동방 박사를, 메시아의 출현에 겁을 먹어 갓난아기를 죽인 헤로데 왕을, 요한에게 받은 세례를, 산 위에서 설파한 가르침을, 포도주로 바뀐 물을,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일을,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빙의된 일곱 악귀를 물리친 이야기를, 죽은 라자로를 되살린 이야기를, 물 위를 걸은 이야기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간 일을, 슬픈 최후의 만찬을, 감람나무 아래서 올린 기도를………
 신부의 목소리는 신의 말처럼 남만절 안에 울렸다. 여자는 눈을 빛내며 조용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다.
 "생각해 보시지요. 예수께서는 두 도둑과 함께 십자가에 걸리셨습니다. 그때의 슬픔, 그때의 괴로움――우리는 지금 생각하는 것만으로 살이 떨립니다. 특히 안타까운 건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예수의 마지막 말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는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신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 보니 새파랗게 질린 여자가 아랫입술을 문 채로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 눈에서 빛나는 건 신성한 감동이 아니었다. 단지 차가운 경멸과 뼈에도 스며 들 법한 증오였다. 신부는 황당해하며 한동안 말을 잃고서 눈만 껌뻑였다.
 "정말로 천주, 남만의 여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여자는 이제까지의 공손함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찌르는 듯한 투로 말했다.
 "제 남편 이치반카세 한베이는 사사키 가문의 떠돌이 무사였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적 앞에 등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쵸코지의 공성전 때도 남편은 도박에 진 탓에 말은 물론이요 갑옷과 투구마저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전쟁이 벌어질 적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 크게 적은 종이 하오리를 벗은 몸 위에 두르고 가지가 달린 대나무를 깃발 대신 삼아 오른손에 삼 척 오 촌의 검을 뽑아 들고 왼손에 붉은 부채를 펼쳐 '남의 와카슈를 훔친다는 건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한 것이렸다'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오다 경의 부하 중 오니라 불리던 시바타의 군세를 베어갔습니다. 그런데 천주께서나 되시는 분이 아무리 십자가에 걸렸다손 쳐도 푸념하듯이 말씀하시다니 실망이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겁쟁이를 모시는 종교에 무슨 볼 게 있을까요? 또 그런 겁쟁이의 말을 주워들은 당신에겐 이 세상에 없는 남편의 위패라도 울 거 같아 아들은 보여드릴 수 없을 거 같습니다. 한노죠도 목을 취하는 한베이라 불리는 남편의 아들입니다. 겁쟁이의 약을 먹이느니 배를 자르는 게 낫겠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일부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텐데――그것만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여자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빙글 걸음을 돌리더니 거친 바람을 피하듯이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신부를 남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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