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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덤불 속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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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비위사의 물음에 대한 나무꾼의 대답

 

 그렇습니다. 그 시체를 발견한 건 분명 저입죠. 저는 오늘 아침 여느 때처럼 뒷산에 나무를 패러 갔습니다. 그러자 산기슭의 덤불 속에 그 시체가 있지 뭡니까. 있던 위치요? 그건 야마나시의 역로에서 네다섯 정 쯤 될까요. 대나무 안에 얇은 삼나무가 뒤섞인 인기척 없는 곳이지요.
 시체는 옥색 스이칸에 수도서나 볼 법한 에보시를 쓴 채로 누워 계셨습니다. 가슴에 칼로 찔린 상처가 남아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시체 주변에 떨어진 대나무 낙엽은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뇨, 피는 더 이상 흐르고 있지 않았지요. 상처도 말라 있었으니까요. 더군다나 그곳에는 말파리 한 마리가 제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착 달라붙어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검은 안 보였나고요? 아무것도 없었습죠. 단지 그 옆 삼나무 뿌리에 밧줄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그래그래. 밧줄 말고 빗도 하나 있었습니다. 시체 주변에 있던 건 이 둘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풀이나 대나무 낙엽은 죄 짓밟혀 있었으니 그 남자가 살해되기 전에 어지간히도 거친 몸부림을 쳤을 게 분명합니다. 네? 말은 없었냐고요? 그곳은 애당초 말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말이 지나갈만한 길은 덤불로 가로막혀 있으니까요.
 

여행 중인 스님의 대답


 확실히 어제 그 남자와 만나기는 했습니다. 어제――글쎄, 점심쯤이었을까요. 장소는 세키야마에서 야마나시로 옮겨 가던 차였습니다. 그 남자는 말에 탄 여자와 함께 세키야마 쪽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발을 하고 있어서 얼굴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보인 건 단지 남색인 듯한 옷뿐입니다. 말은 불그스름한 털의――분명 갈기가 없는 말인 듯했습니다. 덩치 말입니까? 4촌 쯤 될까요?――승려니까 그런 걸 잘 알지 못합니다. 남자는――아뇨, 검은 물론이요 활도 차고 있었습니다. 특히 검게 칠한 화살통에 스무 개 가량의 화살을 담아두고 있던 건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정말로 사람의 목숨이란 게 안개와 같나 봅니다. 나 원 참, 뭐라고 말로 못 하겠군요. 유감입니다.
 

부하의 대답


 제가 붙잡은 남자 말입니까? 타죠마루라고 하는 명성 높은 도둑입니다. 물론 제가 붙잡았을 때에는 말에서 떨어진 걸 테죠. 아와다구치의 돌다리 위에서 응응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시각인가요? 시각은 어제 밤 초경이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놓쳤을 때에도 역시나 이 남색 스이칸에 바깥으로 튀어나온 검을 차고 있었죠. 단지 지금은 그 외에도 보다시피 화살마저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시체의 남자가 가지고 있던 것도――그럼 사람을 죽인 건 이 타죠마루가 분명하겠군요. 가죽을 감은 활, 검게 칠한 화살통, 독수리 깃털의 화살이 열일곱――이건 모두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물건입니다. 네, 말도 이렇게 갈기가 없는 붉은 털이군요. 그런 짐승한테 떨어지다니 뭔가의 인연일지 모르겠군요. 말은 돌다리 조금 지나서 긴 고삐를 끈 채로 거리의 어린 참억새를 먹고 있었지요.
 이 타죠마루란 녀석은 교토를 어슬렁거리는 도둑 중에서도 여자를 좋아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년의 토리베데라의 빈두로 뒤에 자리한 산에서 참배하러 온 여자가 여자아이와 함께 죽은 것도 이 남자가 저지른 일이랴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녀석이 그 남자를 죽인 이상 말을 타고 있던 여자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과분한 간섭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또한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노파의 이야기


 네, 그 시체는 저희 딸이 결혼 간 남자입니다. 하지만 수도 사람은 아닙니다. 와카사 코쿠후의 사무라이였지요. 이름은 카나자와노 타케히로, 나이는 스물여섯 살입니다. 아뇨, 상냥한 성격이었으니 이렇다할 원한은 없습니다.
 딸 말인가요? 딸 이름은 마사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아이는 남자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드센 여자인데 이제까지 타케히로 이외엔 남자를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피부색은 살짝 까무잡잡하고 왼쪽 눈 끝에 점이 있는 갸름하고 작은 굴을 지녔지요.
 타케히로는 어제 딸과 같이 와카사로 향했었죠.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위는 포기하더라도 이것만은 걱정입니다. 부디 이 늙은이의 평생의 부탁입니다. 설령 풀초를 가르더라도 딸의 행방을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원망스러운 건 이 타죠마루라는 도둑 하나뿐입니다. 사위로 모자라 딸까지………(우느라 말을 잇지 못한다)
       ×          ×          ×
 

타죠마루의 자백


 그 남자를 죽인 건 저입니다. 하지만 여자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디로 갔는가?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뭐, 기다려보시죠. 아무리 고문해본들 모르는 걸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게다가 저도 이렇게 된 이상은 비겁하게 숨길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어제 점심 넘어 그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발이 위로 올랐고 살짝 여자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살짝――보였다 생각한 순간에는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그 탓도 있겠지요. 제게는 그 여자의 얼굴이 여자 보살로만 보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 설령 남자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여자를 빼앗자고 결심했습니다.
 무얼,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남자를 죽이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여자를 뺏을 바에야 남자는 무조건 죽여야지요. 단지 저는 죽일 적에 허리의 검을 쓰는데 여러분은 검을 쓰지 않지요.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죠. 혹은 세 치 혀 말만으로도 죽일 수 있습니다. 확실히 피야 흐르지 않겠죠. 남자도 훌륭히 살아 있습니다――그럼에도 죽인 것입니다. 죄의 깊이를 생각하면 여러분이 나쁜지 제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군요.(비웃는 듯한 웃음)
 물론 남자를 죽이지 않고도 여자를 뺏을 수 있다면 부족할 게 없지요. 아니, 그때는 되도록 남자를 죽이지 않고 여자를 빼앗자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 야마나시의 역로에서는 그럴 수 없었지요. 때문에 저는 산 속에 그 부부를 데리고 갈 궁리를 했습니다.
 그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 부부와 같은 길에 올라 저 너머 산에 고분이 있다. 그 고분을 파보니 거울이나 검이 잔뜩 나왔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기슭의 덤불 속에 그런 걸 묻어두었다. 만약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저렴한 값에 넘기고 싶다――그렇게 말했지요. 남자는 어느 틈엔가 제 이야기에 점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어떻습니까. 욕심이란 게 참 무섭지 않습니까? 그렇게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그 부부는 저와 함께 산길로 말을 옮기기 시작했죠.
 저는 덤불 앞으로 와 보물은 이 안에 묻혀 있다. 봐달라 그렇게 말했지요. 남자는 욕심에 목이 말라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기다린다고 했죠. 덤불이 무성한 걸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사실 저는 이 또한 제 생각과 들어맞았으니 여자를 혼자 남긴 채로 덤불 안으로 들어갔죠.
 덤불은 한동안 대나무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반 정도 지난 참에 살짝 열린 삼나무 터가 있지요――제가 일을 이루는데 이만한 장소가 또 있을까요. 저는 덤불을 걷어내며 보물이 삼나무 밑에 묻혀 있다며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남자는 그 말을 듣자 그 삼나무가 보이는 곳까지 열심히 걸었지요. 그러는 사이 대나무가 희소해지고 삼나무가 이어졌지요――저는 그곳에 이르자마자 바로 상대를 덮쳤습니다. 남자도 검을 차고 있는 만큼 힘이 상당했으나 기습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곧장 삼나무 아래에 묶어버렸지요. 줄 말입니까? 줄이야 물론 도둑의 단짝이지요. 언제 울타리를 넘어야 할지 모르니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닌답니다. 물론 목소리를 낼 걱정도 뺨에 대나무 잎을 물려두면 어려울 게 없지요.
 저는 남자를 정리하고는 여자를 찾아갔습니다. 남자가 갑자기 아프니 봐달라고 말했지요. 이 또한 제 생각 대로 된 건 말해드릴 필요도 없을 터입니다. 여자는 이치메카사를 벗은 채로 제 손을 잡고 덤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르니 남자는 나무 밑에 묶여 있지요――여자는 그걸 보고 어느 틈엔가 품 안에서 작은 칼 하나를 뽑았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그렇게나 거친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때 방심했다면 단숨에 옆구리를 찔렸겠지요. 아니, 그걸 피해본들 무작정 두세 번 연이어져서는 어떤 상처를 입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저도 타죠마루니까 어떻게든 검을 뽑지 않고 작은 칼을 떨굴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기가 센 여자라도 재주가 없으면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기어코 바라던 것처럼 남자의 목숨을 뺏지 않고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겁니다.
 남자의 목숨을 뺏지 않고――그렇습니다. 저는 남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울음을 터트린 여자를 뒤로한 채 덤불 밖으로 도망 치려하자 여자가 대뜸 미치광이처럼 제 팔에 들러붙었습니다. 심지어 띄엄띄엄 소리치는 게 당신이 죽던가 남편을 죽이던가 해라, 두 남자에게 수치를 보이는 건 죽음보다도 괴로운 일이라나요. 아니, 이렇게 된 이상 어느 쪽이든 살아남은 남자를 따라가고 싶다――그렇게 띄엄띄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맹렬히 남자를 죽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음울한 흥분)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는 분명 당신들보다 잔혹한 사람처럼 보일 테지요. 하지만 그건 여러분이 그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순간의 불타는 듯한 눈동자를 보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자와 눈을 마주한 후 설령 번개에 맞아 죽더라도 이 여자를 아내로 삼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아내로 삼고 싶다――제가 생각한 건 단지 그뿐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같은 추잡한 색욕이 아닙니다. 만약 그때 색욕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면 저는 여자를 걷어차서라도 도망쳤을 테지요. 그러면 남자도 제 칼에 피로 물드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덤불 속에서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본 찰나, 저는 남자를 죽이지 않는 한 여기서 떠날 수 없다고 각오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를 죽이더라도 비겁하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남자의 밧줄을 풀어준 후 검을 뽑으라고 말했습니다.(삼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던 게 이때 버린 밧줄입니다.) 남자는 혈색을 바꾼 채로 두터운 검을 뽑았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말없이 맹렬히 제게 달려들었습니다――그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할 필요나 잇을까요. 제 검은 스물세 합 째에 상대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스물세 합 째에――부디 이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저는 지금도 이 사실에는 감탄하고 있으니까요. 저와 스물세 합을 나눈 건 천하에 그 남자 하나뿐입니다.(쾌활한 웃음)
 저는 남자가 쓰러지는 동시에 피로 물든 검을 내리고 여자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니――그 여자는 어디에도 없지 뭡니까? 저는 여자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삼나무 사이를 살폈습니다. 하지만 대나무 낙엽 위에는 그럴 듯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귀를 기울여 보아도 들리는 건 남자 목덜미서 새어나오는 단말마뿐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여자는 제가 대결을 시작하자마자 도움을 구하기 위해 덤불을 해치며 도망친 걸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자 이번에는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검이나 활을 빼앗고 곧장 본래의 산길로 나왔습니다. 그곳에선 여자의 말이 얌전히 풀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불필요한 말이 될 테지요. 단지 수도로 들어가기 전에 검은 버려버렸습니다――제 자백은 여기까지입니다. 어차피 한 번은 가죽나무에 걸릴 목이라 생각했으니 부디 극형에 처하게 해주십시오.(태연한 태도.)
 

키요미즈데라를 찾은 여자의 참회


 ――그 남색 스이칸을 입은 남자는 저를 범하고는 묶인 남편을 보며 비웃듯이 웃었습니다. 남편은 얼마나 속이 뒤집혔을까요.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온몸을 묶인 밧줄은 한 층 더 조이기만 할 뿐입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남편을 향해 구르 듯이 달렸습니다. 아니, 달리려 했지요. 하지만 남자는 곧장 저를 그곳으로 걷어찼습니다. 마침 그 순간이었지요. 저는 남편의 눈에 말로 다 못할 빛이 감도는 걸 느꼈습니다. 말로 다 못할――저는 그 눈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습니다. 말 한 마디 못하는 남편은 그 찰나의 눈동자 속에 모든 마음을 담아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빛난 건 분노도 아닐 뿐더러 슬픔도 아닌――단지 저를 경멸하는 차가운 빛이지 뭔가요? 저는 남자에게 걷어차인 것보다도 그 눈동자색에 얻어 맞은 것처럼 저도 모르게 무어라 외친 후 기어코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남색 스이칸을 입은 남자는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단지 삼나무 밑에 남편이 묶여 있는 게 전부였죠. 저는 대나무 낙엽 아래서 몸을 일으켜 남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눈동자색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역시 차가운 경멸 밑바닥에 증오의 색을 보이고 있었죠. 수치, 슬픔, 불쾌함――당시 제 마음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비틀비틀 일어나 남편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하고는 같이 있을 수 없어요. 저는 죽을 생각입니다. 하지만――하지만 당신도 죽어주세요. 당신은 제 수치를 보셨지요. 저는 이대로 당신 혼자 남겨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열심히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남편은 원망스럽게 저를 바라만 보았지요. 저는 찢어질 것 같은 가슴을 억누르면서 남편의 검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도둑이 빼앗아간 걸 테죠. 검은 물론이요 화살마저도 덤불 속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작은 칼만은 제 발밑에 떨어져 있었죠. 저는 그걸 휘두르며 남편에게 다시 한 번 말했습니다.
 "그럼 목숨을 받아 가겠습니다. 저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남편은 이 말을 들은 순간 겨우 입술을 움직였습니다. 물론 입에는 대나무 낙엽이 한가득 담겨 있었으니 목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걸 보고 곧장 어떤 말을 떠올렸습니다. 남편은 저를 경멸하며 "죽여라"라고 한 마디 한 것입니다. 저는 거의 무아몽중히 남편의 옥색 스이칸 가슴에 작은 칼을 꽂았습니다.
 저는 또 이때도 정신을 잃은 거겠죠. 겨우 주위를 둘러볼 때에는 남편은 묶인 채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새파랗게 질린 얼굴 위에는 대나무에 섞인 삼나무의 하늘에서 저물어가는 햇살 한 줄기가 드리워 있었습니다. 저는 우는소리를 삼키며 시체의 밧줄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그리고 제가 어떻게 되었냐고요? 그것만은 말해드릴 힘이 없습니다. 어찌 됐든 저는 도무지 죽을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작은 칼을 목에 찌르거나 산 옆의 연못에 몸을 던지는 등 여러 일을 해보았습니다. 미처 죽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이상 자랑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씁쓸한 웃음) 저처럼 글러 먹은 사람은 아무리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이라도 버리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남편을 죽인 저는, 도둑의 손에 범해진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거죠? 저는 대체――저는――(불쑥 격하게 훌쩍이기 시작한다.)
 

무녀의 입을 빌린 사령의 이야기

 ――도둑은 아내를 범한 후 그 옆에 앉아 아내를 위로했다. 나는 물론 끼어들 수 없었다. 몸도 삼나무에 묶여 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에 몇 번이나 아내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런 남자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무슨 말이든 거짓말이라 생각해라――나는 그런 뜻을 전하고 싶었지. 하지만 아내는 초연히 대나무 낙엽에 앉은 채로 가만히 무릎을 내려다보았어. 그게 꼭 도둑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잖나? 나는 질투에 몸부림쳤지. 하지만 도둑은 그 후로도 교묘하게 이야기를 끌고 갔어. 한 번 몸을 더럽히면 남편하고의 사이도 맞지 않을 거다. 그런 남편을 따라다니느니 자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나? 자신은 당신이 사랑스러워 이런 거창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도둑은 기어코 대담히도 그런 이야기마저 꺼내기 시작했지.
 도둑이 그렇게 말하자 아내는 감정에 젖은 고개를 들어 올렸지. 나는 그때만큼 아름다운 아내를 본 적이 없어. 하지만 그 아름다운 아내가 붙잡힌 내 앞에서 도둑에게 무어라 대답했을까? 나는 저승을 헤매는 동안에도 아내의 대답을 떠올릴 때마다 격한 분노에 휩싸였지. 아내는 분명 이렇게 말했어――"그럼 어디든 데려가 주세요."(긴 침묵)
 아내의 죄는 그게 전부가 아냐. 그게 전부라면 이런 어둠 속에서 이만큼 괴로워하지도 않겠지. 하지만 아내는 꿈만 같이 도둑의 손을 잡고 덤불 밖으로 나가더니 곧장 얼굴색을 잃고서 나무에 묶인 나를 가리키고는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 저 사람을 살려두면 당신하고 같이 갈 수 없어요"――아내는 미치광이처럼 몇 번이나 이렇게 외쳤어.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이 말은 폭풍처럼 지금도 먼 어둠의 밑바닥에 나를 떨어트리려 하지. 이만큼 원망스러운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적이 있을까? 이만큼 증오스러운 말을 들은 사람이 나 말고도 있을까? 이만큼 증오스러운――(불쑥 올라오는 비웃음) 그 말을 들은 순간엔 도둑마저 얼굴색을 잃었지.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아내는 그렇게 외치며 도둑의 팔에 매달렸어. 도둑은 가만히 아내를 바라보며 죽인다고도 죽이지 않겠다고도 대답하지 않았지―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걷어차여 대나무 낙엽 위로 넘어졌지.(다시 한 번 올라오는 비웃음) 도둑은 조용히 팔짱을 끼고는 내 모습을 보았어. "저 여자는 어쩔 셈이지? 죽일 건가? 아니면 도울 건가? 대답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돼. 죽일 거냐?"――나는 이 말만으로도 도둑의 죄를 용서해줘도 좋아.(다시 긴 침묵)

 아내는 내가 주저하는 사이에 무언가 큰 소리로 외치더니 곧장 덤불 안쪽으로 달려갔어. 도둑도 곧장 뛰어들었지만 소매 하나 못 잡은 모양이었지. 나는 단지 환상이라도 보는 것처럼 그런 광경을 바라보았어.
 도둑은 아내가 도망친 후에 검이나 화살을 들어 올리고는 단 한 곳만 내 밧줄을 잘랐지. "이번엔 내 운명인가"――나는 도둑이 덤불 밖으로 모습을 감출 때에 그렇게 중얼거린 걸 기억하지. 주위는 한없이 조용했어. 아니 또 누군가가 우는소리가 들렸지. 나는 밧줄을 풀면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어. 하지만 그 목소리도 알고 보니 내가 우는소리 아니던가(다시 한 번 긴 침묵)
 나는 겨우 나무에서 지친 몸을 일으켰지. 내 앞에는 아내가 떨어트린 작은 칼 하나가 빛나고 있었어. 나는 그걸 손에 들고는 내 가슴을 단숨에 찔렀지. 무언가 비린내 덩어리가 내 입으로 올라왔어. 하지만 조금도 괴롭지 않았지. 단지 가슴이 차가워지자 주위가 더 조용해져 버렸어. 아아, 그 조용함이란. 이 산기슭의 덤불의 하늘에는 작은 새 한 마리 지저귀지 않았지. 단지 삼나무나 대나무의 뒤로 쓸쓸한 그림자만이 드리워 있어. 그림자가――그마저도 서서히 희미해지고――끝내 삼나무도 대나무도 보이지 않게 됐지. 나는 그곳에 쓰러진 채로 깊은 조용함에 휩싸였다.
 그때 조용한 걸음으로 누군가가 내 옆으로 왔지. 나는 그 소리를 보려 했어. 하지만 내 주위에는 어느 틈엔가 옅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지. 누군가가――그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 가슴에 꽂힌 작은 칼을 살며시 뽑았지. 동시에 내 입에는 다시 피가 넘쳤고 나는 그렇게 영원히 중유의 어둠 속에 빠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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