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환
만물의 윤회를 믿는 나지만 직접 세태世態의 변환을 보는 건 조금이나마 감개를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언젠가 울타리 밖에서 "가지 모종, 오이 모종……디기탈리스 모종, 고산 식물 모종"이라는 모종 팔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세상이 달라진 걸 느꼈다. 하지만 더욱 놀란 건 얼마 전 문득 선반 위 책을 엔가와의 햇빛으로 내놓을 때였다. 나는 본래 좀이란 벌레는 결코 일본책이나 중국책 이외엔 먹지 않는다 믿고 있었다. 하지만 1925년의 좀벌레는 배를 타고 건너온 책의 등에도 구멍을 뚫었다. 나는 이 좀벌레의 흔적을 바라보며 진화론을 떠올리고 라마르크를 떠올리고 일본 문화상에 벌어진 유신 이후 60년의 변환을 떠올렸다. 30세기의 좀벌레 쯤 되면 장뇌나 나프탈렌도 먹을지 모른다.
어떤 항의
"문단에 폭을 주고 있는 건 역시 소설이나 희곡이다. 탄카나 하이쿠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폭을 주지는 못한다"――내 견문에 따르면 누구나 이런 말을 믿고 있다. '누구나'란 물론 소설가나 희곡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탄카나 하이쿠를 짓는 사람들마저 대부분은 이렇게 믿고 있거나 혹은 세간이 이렇게 믿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당당한 비평가들의 탄카나 하이쿠 비평을 보면 신기하리만치 결코 위세를 부리지 않는다. 하나같이 '나는 아마추어인데'하는 겸양의 말을 늘어놓고 있다. 겸양의 말을 늘어놓는 것 자체는 높게 살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이런 평론가들이 소설이나 희곡을 비평할 때에는 결코 '아마추어이지만'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마치 부모가 낳아주기 전부터 소설이나 희곡에 통달한 것처럼 나불나불 떠벌떠벌 재잘재잘 불행한 우리를 위해 가르침을 내려주신다. 이러니 문단에 폭을 주는 건 꼭 소설이나 희곡이라 할 수 없다. 되려 히토마로 이후의 탄카이자 바쇼 이후의 하이쿠이다. 그런 걸 소설이나 희곡만 폭을 늘리고 있다는 듯이 모함하는 건 적어도 선량한 우리에게는 하염 없이 민폐라 해야만 하리라. 그뿐 아니라 탄카나 하이쿠만 폭을 늘린다는 것도 물론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생트뵈브는 어쩌면 높은 곳에서 유고나 발자크를 비평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뮈세를 비평할 때에도 격별히 "나는 아마추어이지만"하고 모자를 벗지 않은 건 분명하다. 당당한 일본 비평가들도 조금은 우리를 동정하여 횡포한 카진이나 하이진 위에도 태연히 망치질을 휘두르면 된다. 또 그럴 수 없다면――나는 당연한 권리로 이러한 비평가들에게 요구해야 한다――우리의 작품을 비평할 때에도 일단은 그 고고한 모자를 벗고서 카진이나 하이진을 대할 때처럼 "아마추어지만"하고 단정 지어다오.
여자복
"……나 같은 것에게도 이따금 편지가 와 관계를 요구하는 부인이 열 손가락이 넘는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꿈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 오라버님이라 부르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사진을 보내달라는 사람이 있다. 무언가 피부에 닿은 게 있으면 보내달라는 사람이 있다. 사용한 손수건을 주면 처녀로서 가장 중요한 걸 드리겠단 사람마저 있었다. 이만큼 청렴한 교제가 또 있을까……"
이는 미나카미 타키타로 군의 '친구는 잘 골라야 한다' 중 한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었을 때에 조금의 과장도 없이 크게 놀랐다. 미나카미 군의 소설은 천하의 여성을 기쁘게 할만한 내용이 아니다. 심지어 그러한 독자 중엔 미나카미 군을 오라버님이라 칭하며 또 미나카미 군의 사진 같은 걸(!) 몰래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반면에 내 경우를 생각하면――물론 내 소설은 미나카미 군의 소설보다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여성 독자에게 매력이 있다는 건 "일하는 사람", "해상 일기", "포도주"에 밀리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스물다섯에 재능 있단 소리를 들은 이후로 나를 오라버님이라 부르거나 내 소진을 바라는 미인의 편지는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 하물며 내 손수건을 받으면 "처녀로서 가장 중요한 걸 바치겠다"는 춘풍만리의 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그만 놀라고 만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해야 하리라.
하지만 어쩌다 이런 소리를 했다고 바로 나를 경멸하는 건 물론 너무 이른 넘겨짚기다. 내게도 이따금 호의를 표시하는 여성 독자가 없는 건 아니다. 그들 중 하나는 작년 여름에 끝없이 내게 편지를 보냈다. 심지어 그러한 건 내용 증명 아니면 반드시 배달 증명이었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몇 번이나 그러한 편지를 숙독했다. 또 내게는 숙독할 필요도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한 건 하나같이 백 엔의 돈을 어서 돌려 달라는 편지였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편지를 쓴 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여성이었다. 또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내 "봄옷"을 인쇄할 즘에 끝없이 내게 "아라라기" 풍의 사생조 우타를 보내곤 했다. 우타는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산문적인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아니 꼭 하나도 몰랐다는 건 아니다. "햇살 아래의 만 소리 없이 숨 쉬는 걸로 보여도 그 소리가 잘 들리는구나" 같은 건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괜찮은 거 같았다. 하지만 이 우타는 이미 옛날에 사이토 모키치 군의 가집에 실려 있는 게 분명했다. 또 그들 중 어떤 이는 내가 중국을 찾아 자리를 비운 동안 나를 만나기 위해 상경했다. 나는 물론 불행히도 그녀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름 정도 지난 후 내게 포도색 넥타이 하나를 보냈다. 그녀의 편지에 따르면 그건 메이지 덴노가 애용하던 넥타이이며 그녀가 그걸 보낸 건 몇 년 전에 죽은 어머니의 유령이 한 말을 따른 것이라 했다. 또 그들 중 어떤 이는……
어찌 되었든 내게도 편지를 보낸 여성 독자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대할 때에 미나카미 군을 대할 때의 정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내게 편지를 보낸 몇 명의 천애의 미인을 생각하여 즉 내 여성 독자는 미나카미 군의 여성 독자보다도 사교적 취미가 진보되어 있기 때문이라 단정 지었다. 확실히 그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의 우타 대신에 사이토 군의 우타를 보냈다. 하지만 그건 나를 꿈에서 본다고 말하는 대신에 자신 또한 내 선배인 사이토 군의 가집을 읽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 테지. 또 그들 중 어떤 이는 나를 오라버님이라 부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사려심이 백 엔의 돈을 갚으라는 내용 증명의 편지를 쓰게 한 것이다. 또 그들 중 어떤 이는 메이지 덴노가 애용한――이것만은 솔직히 자백하자면 확실히 나도 난해하다. 하지만 그녀가 정숙한 나머지 내 손수건을 달라는 말 대신에 역사적 의의가 있는 넥타이를 보낸 게 아닐까? 내 여성 독자란 하나같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섬세한 신경을 지니고 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미나카미 군에게 편지를 보낸 무수한 여성 독자보다도 몇 배는 우수하다 해야 할지 모른다. 또 내 단정에 조금의 오해가 있다손쳐도――이를테면 그들 중 어떤 이가 불행한 미치광이였다고 쳐도 적어도 뜬금없이 미나카미 군에게 손수건을 달라고 말한 독자보다는 덜 미친 게 분명하리라.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에 조용히 나 자신의 행운을 참미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문단이 넓다지만 나처럼 여자복이 넘치는 작가는 한 명도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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