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열일곱 음
홋쿠는 열일곱 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열일곱 음 이외의 걸 홋쿠라 부르는 건――혹은 신경향의 구라 부르는 건 단시라 불러 마땅해야 하리라.(물론 그런 단시 작가 카와히가시 헤키도, 나카즈카 잇페키로, 오기와라 세이센스이 같은 분의 단시 작품에도 걸작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만약 단순히 내용에 따라 그런 단시를 홋쿠라 부른다면 홋쿠는 다른 문예적 형식과――이를 테면 한시하고도 차이가 없으리라.
초월파중지(물론 일본풍으로 읽은 것이다) 하손
밝게 뜬 달아 잔잔한 파도 안에서 올라오느냐 시키
단순히 내용만 따르면 시키의 구는 즉 하손의 시이다. 같은 차를 마시더라도 찻잔은 찻종이 될 수 없다. 만약 찻종을 찻종으로 만드는 게 찻종이라는 형식이라면 또 찻잔을 찻잔으로 만드는 게 찻잔이란 형식이라면 홋쿠를 홋쿠로 만드는 건 역시 홋쿠란 형식――요컨대 열일곱 음인 셈이다.
둘 계절어
홋쿠는 꼭 계절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계절어라 불리는 건 양파, 은하수, 크리스마스, 장미, 개구리, 그네, 땀――갖은 걸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계절어가 없는 홋쿠를 만드는 건 사실상 되려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간단하지 않아도 심라만상을 계절어로 삼지 않는 한 계절어 없는 홋쿠도 가능할 터이다.
본래 계절어란 보름달, 가을밤 같은 시어 이외엔 대부분 우리의 일상다반사에 사용되는 말뿐이다. 시어는 물론 시어로서의 문에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다른 당연한 말――이를테면 양파, 은하수 같은 걸 계절어로 삼는 건 되려 홋쿠에 유해하다. 우리는 이러한 당연한 말을 특별히 계절어로 삼기 위해 계절감이라 불리는 걸 낳았기에 되려 속되어 보이기 쉽다. 또 오늘날의 농예나 원예는 종래의 춘하추동에 풀초나 과일이나 채소를 대입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다.
홋쿠는 조금도 계절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되려 계절어는 불필요하다. 실제로 탄카는 홋쿠와 달리 계절어에 손을 대지 않는다. 이게 꼭 홋쿠보다 열네 음 많은 탓만은 아닐 터이다.
셋 시어
계절어는 홋쿠에 불필요하다. 하지만 계절어는 불필요해도 시어는 꼭 불필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떠나가는 봄行春이란 말은 우리 선조에게서 이어진 아름다운 어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어감을 경멸하는 건 우리 자신을 경멸하는 것과 동등하다.
떠나가는 봄 아쉬워 마지않는 오우미 사람 바쇼
추기. 시어와 시어지 않은 말의 구별은 물론 사실상에 애매하기 짝이 없다.
넷 음률
홋쿠 또한 시라면 저절로 음률을 지녀야 할 터이다. 겐로쿠 사람에겐 겐로쿠 사람의 음률이, 다이쇼 사람에겐 다이쇼 사람의 음률이 있다는 게 꼭 잘못된 견해라고 하기엔 어렵다. 하지만 그 음률이란 의미를 열일곱 음인지 아닌지로 국한 짓는 건 소위 신경향 작가들의 잘못된 견해이다.
새해 첫 시장 향선 하나 사볼까 나가야겠네
年の市線香買ひに出でばやな토시노이치 센코우카이니 이데바야나 바쇼
여름 달 하나 교유에서 올라와 아카사카로
夏の月御油<rt>ごゆ</rt>より出でて赤坂や나츠노츠키 고유요리이데테 아카사카야 동상
와세의 향기 갈라진 오른쪽은 아리오우미
早稲の香わけ入る右は有磯海와세노야와 케하이루미기와 아리오우미 동상
이러한 구는 모두 열일곱 음이면서 제각기 다른 음률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절묘한 음률은 다이쇼 사람도 겐로쿠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 시키는 뛰어난 재능보다 완급을 지닌 음률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여파로 시키 이후의 홋쿠의 음률을 조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음률에 노력을 들인단 점에선 소위 열일곱 음만 벗어날 뿐인 신경향 시인들에게는 이기고 있다 해야 하리라. (15・4・23)
추기. 이 문장을 심은 후 야마자키 가쿠도 씨의 '하이쿠 격조의 본의'(시카지다이 게재)를 읽고 적잖은 은혜를 받았다. 특히 열일곱 음에 따르라는 내 형식상의 생각 따위는 좀 더 생각해봐도 좋을 거 같다. 겸사겸사라기엔 실례지만 겸사겸사 감사의 뜻을 밝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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