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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십 엔 지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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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흐린 초여름 아침, 호리카와 야스키치는 맥없이 플랫폼의 돌계단을 올랐다. 물론 대단한 일은 아니다. 단지 바지 주머니 밑바닥에 60몇 전 가량 밖에 없는 걸 불쾌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당시의 호리카와 야스키치는 항상 돈이 궁했다. 영어를 가르치고 받는 보수는 고작해야 한 달에 60엔이었다. 틈틈이 쓰는 소설은 '츄오코론'에 실렸을 때마저 90전 이상이었던 적이 없다. 물론 한 달에 5엔짜리 방값과 한 끼 50전의 식료는 그것만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그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을 사랑한 건――적어도 그 경제적 의미를 중시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은 읽어야 한다. 이집트 담배도 피워야 한다. 연주회 의자에도 앉아야 한다. 친구들 얼굴도 봐야 한다. 친구 이외의 여자 얼굴도――어찌 됐든 주에 한 번은 반드시 도쿄에 가야만 한다. 이런 생활욕에 휩싸여 있던 그는 원고료를 당겨쓰는 건 물론이요 부모형제에게도 손을 빌리곤 했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할 때에는 붉은색유리의 등을 내건 입출입이 적음 전당포에 커다란 화집을 맡기곤 했다. 하지만 빌릴 원고료도 없고 부모형제하고도 싸운 지금은――아니, 지금은 그뿐이기만 할까. 기원절에 새로 산 18엔 50전의 실크햇마저 진작에 그의 손을 벗어나고 말았다………
 야스키치는 북적이는 플랫폼을 걸으며 광택이 아름다운 실크햇을 눈앞에 고스란히 떠올렸다. 실크햇은 원통 위에서 전당포의 창문빛을 희미하게 받고 있다. 또 그 원통은 창밖에 핀 양옥란의 꽃을 비추고 있다……하지만 불쑥 손가락에 닿은 주머니 밑의 60몇 전은 곧장 그 꿈을 깨 놓았다. 오늘은 겨우 열 며칠이다. 28일인 월급날에 호리카와 교관님이라 적힌 서양 봉투를 받으려면 아직도 2주나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는 일요일 도쿄 외출은 벌써 내일로 다가와 있다. 그는 내일 하세나 오오토모와 저녁밥을 같이 먹을 생각이었다. 이 주변에 없는 스콧의 유화 도구나 캔버스도 구입할 생각이었다. 프로일라인 묄렌도르프의 연주회에도 참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60 몇 전 앞에서는 도쿄행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내일아, 그럼 잘 있거라"이다.
 야스키치는 울분을 풀기 위해 담배를 하나 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넣은 주머니 안에는 아쉽게도 한 개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악의를 품은 운명의 미소를 느끼며 대합실 바깥에 걸음을 멈춘 외판원 앞으로 다가갔다. 녹색 사냥모자를 쓴 옅은 멍자국을 가진 외판원은 지겹다는 양 목에 묶은 상자 속 신문이나 캐러멜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일개 상인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을 방해하는 부정적 정신의 상징이다. 야스키치는 그런 외판원의 태도에 오늘도――정확히는 오늘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짜증을 느꼈다.
 "아사히 하나 주게나."
 "아사히요?"
 외판원은 여전히 눈을 숙인 채로 비난하듯 물었다.
 "신문 말씀하시는 거예요, 담배 말씀하시는 거예요?"
 야스키치는 미간이 떨리는 걸 느꼈다.
 "맥주!"
 외판원은 놀라서 야스키치의 얼굴을 보았다.
 "아사히 맥주는 없습니다."
 야스키치는 울분을 삭히며 외판원의 뒤로 걸었다. 하지만 정작 사려 한 아사히는――아사히는 이제 피우지 않아도 되었다. 짜증 나는 외판원에게 한 방 먹인 건 하바나를 피운 것보다 유쾌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 밑바닥의 60몇 엔을 잊은 채로 플랫폼 끝으로 걸어갔다. 마치 바그람 전투서 대승한 나폴레옹처럼……

       ―――――――――――――――――――――――――

 바위인지 진흙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회색 절벽은 높게 흐린 하늘까지 우뚝 뻗어 있다. 또 그 절벽의 정점은 풀인지 나무인지 구분 가지 않는 하얗게 뜬 녹색이 무성하다. 야스키치는 이 절벽 아래서 홀로 멍하니 걷고 있었다. 30분 동안 기차를 탄 후에 다시 30분가량을 모래먼지 날리는 길을 걸어야 하는 건 물론 끊이지 않는 고통이다. 고통?――아니, 고통이 아니다. 타력의 법칙은 어느 틈엔가 고통이란 인식마저 빼앗아 버렸다. 그는 매일 같이 무감격하게 이 지루함 그 자체를 닮은 절벽 아래를 걷는다. 지옥의 고업을 받는 게 꼭 우리의 비극인 건 아니다. 우리의 비극인 지옥의 고업을 고업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는 한 주에 한 번씩 이런 비극의 바깥으로 뛰쳐 나갔다. 하지만 바지 주머니 밑바닥에 60 몇 전 밖에 남지 않은 지금은……
 "안녕하십니까."
 대뜸 말을 건 건 수석 교관 오와노 씨셨다. 오와노 씨는 쉰도 넘으셨겠지. 색이 검은 근시 안경을 쓰셨으며 허리가 꽤나 굽은 신사였다. 본래 야스키치가 일하는 해군 학교 교관은 시대를 초월한 감색 서지 이외엔 어떤 정장도 입지 않는다. 오와노 씨 역시 감색 서지에 새로 구입한 듯한 밀짚모자를 차고 계셨다. 야스키치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푹푹 찌기 시작했네요."
 "따님은 좀 괜찮으셔요?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네요. 어제 겨우 퇴원했지요."
 오와노 씨 앞에서 야스키치는 다른 사람처럼 공손했다. 이게 꼭 허례허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오와노 씨의 어학적 천재성에 굉장한 경의를 품고 있다. 올해로 예순 된 오와노 씨는 라틴어로 카이사르를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도 물론 영어를 시작으로 여러 근대어에 능통했다. 야스키치는 언젠가 오와노 씨가 Asino――아니었을지도 모르나――어찌 되었든 그런 이름의 이탈리어어 책을 읽는 걸 보고 적잖이 탄복했다. 하지만 어학적 천재란 이유 하나만으로 경의를 품은 건 아니었다. 오와노 씨는 참으로 연장자 다운 넓은 그릇을 갖추고 계신다. 야스키치는 영어 교과서 속에서 난해한 곳을 발견하면 반드시 오와노 씨께 가르침을 받으러 갔다. 난해한――물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때로는 사전도 찾아보지 않고 가르침을 받으러 간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우와노 씨께 예의상 당혹스러움을 갖추는 데 전력을 다한 것도 사실이다. 오와노 씨는 언제나 간단히 그의 의문을 해결했다. 하지만 너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경우만은――야스키치는 아직도 분명히 생각에 잠긴 듯한 오와노 씨의 위선적 태도를 기억하고 있다. 오와노 씨는 야스키치의 교과서를 앞에 두고 불이 꺼진 파이프를 문 채로 언제나 조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치 갑자기 하늘의 묵시라도 받은 것처럼 "이건 이렇겠지요"하고 단숨에 그 부분을 해결했다. 야스키치는 이런 연기 때문에――어학적 천재성보다도 되려 위선자 같은 가르침 때문에 오와노 씨를 존경하는 셈이었다……

 "내일이면 벌써 일요일이군요. 요즘에도 일요일이면 꼭 도쿄로 외출하십니까?"
 "네――아, 아뇨. 내일은 가지 않으려고요."
 "어쩐 일로?"
 "사실 그게――돈이 없어서요."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오와노 씨는 작게 웃어 보였다. 살짝 다갈색을 띈 콧수염 그림자서 어금니가 간신히 보일 정도로 조심스러운 웃음이었다.
 "호리카와 군은 매달 월급 말고도 원고료도 받으니 수익이 제법 되지 않나요?"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이번에는 상대인 야스키치가 그렇게 말했다. 그마저도 오와노 씨의 말보다는 훨신 진지하게 말한 것이었다.
 "월급은 아시다시피 한 달 60엔이죠. 하지만 원고료는 한 장에 90전이에요. 가령 한 달에 50 장을 쓰더라도 고작해야 59 해서 45엔이네요. 게다가 소설 잡지 원고료는 60전 전후니까……"
 야스키치는 글을 팔아 입에 풀칠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열변을 다 했다. 열변하기만 했을까. 그가 타고 난 시적 정열은 서서히 그런 걸 과장했다. 일본 희곡가나 소설가는――특히 그의 친구는 참담한 곤궁함을 겪고 있다. 하세 마사오란 친구는 술 대신에 덴키브란을 마신다. 오오토모 유키치도 처자식과 함께 3첩 방의 2층을 빌리고 있다. 마츠모토 호죠도――마츠모토 호죠는 결혼 이후로 조금은 편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전 번까지는 역시 야키토리 가게를 오갔다……
 "Appearances are deceitful겉보기로는 모르는 일인가 보군요."
 오와노 씨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 가지 않는 투로 이런 미적지근한 맞장구를 쳤다.
 길 양옆에는 어느 틈엔가 빽빽한 건물들로 변모했다. 모래먼지에 섞인 쇼윈도와 광고, 전신주――시라 불리긴 해도 도심스러운 색채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커다란 갠트리 크라운이 기와지붕 옆에 누워 있거나 또 하늘에 검은 안개나 하얀 증기가 오르는 건 전율하기 마땅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다. 야스키치는 밀짚모자 아래에서 이런 광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일부러 과장한 글쟁이의 비극에 감격했다. 동시에 평생 존중한 참을성마저 잊은 것처럼 지금도 한 손을 꽂아 둔 바지 주머니 내용물을 음미하고 있었다.
 "실은 도쿄로 가고 싶은데 60 몇 전밖에 없어서요."

       ―――――――――――――――――――――――――

 야스키치는 교관실 책상 앞에서 교과서를 미리 읽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유틀란트 해전의 기사 따위는 평소에도 유쾌하게 읽을 게 되지 못 했다. 특히 오늘은 도쿄에 가고 싶어 괜히 속이 갑갑할 지경이다. 그는 영어로 된 해상어 사전을 한 손에 든 채 한 페이지만 뚫어져라 보며 또 우울하게 주머니 밑바닥의 60몇 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열한 시 반의 교관실은 인기척이 끊겨 조용했다. 열 명 가량의 교관도 오와노 씨 혼자 남겨둔 채로 모조리 수업을 나갔다. 오와노 씨는 그의 책상 반대편에서――다만 두 사람의 책상을 가로막은 살풍경한 책장 너머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하지만 옅은 파란색의 파이프 연기는 오와노 씨의 존재를 증명하듯이 하얀 벽을 배경으로 한 공간 안에 이따금 희미하게 올라오고 있다. 창밖 풍경 또한 역시 조용하기 짝이 없다. 어두운 하늘에 모인 어린잎이 달린 가지, 그 너머에 이어진 회색 교사. 또 그 너머서 희미하게 빛나는 만――모든 게 땀을 머금은 채 울적한 조용함에 잠겨 있다.
 야스키치는 담배를 떠올렸다. 하지만 곧 외판원에게 한 방 먹인 후 담배를 사는 걸 잊었던 걸 발견했다. 담배도 피우지 못하는 건 비참한 일이다. 비참?――어쩌면 비참하지 않을지 모른다. 의식주에 쫓기는 빈민의 고통에 비하면 60몇 전을 한탄하는 건 물론 사치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고통 그 자체는 그도 빈민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빈민보다도 예민한 신경을 가진 그는 한 층 더 고통을 맛봐야 할지 모른다. 빈민은――꼭 빈민이 아니어도 좋다. 어학적 천재인 오와노 씨는 고흐의 해바라기에도 볼프의 리드에도, 내지는 벨아란의 도심의 시에도 굉장히 냉담하셨다. 이런 오와노 씨에게 예술이 없는 건 개에게 풀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리라. 하지만 야스키치에게 예술이 없는 건 당나귀에게 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60몇 전인가는 호리카와 야스키치에게 정신적 갈증의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오와노 렌타로에겐 어떤 가려움도 주지 않으리라.
 "호리카와 군."
 파이프를 문 오와노 씨는 어느 틈엔가 야스키치 앞에 와있었다. 와있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벗겨진 이마에도 근시 안경 너머의 눈에도 짧게 잘린 콧수염에도――약간의 과장을 더하자면 기름에 빛나는 파이프에도 거의 여인의 수줍음에 가까운 겸연쩍음이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야스키치는 당황하여 한동안은 "왜 그러세요?" 말도 못하고 처녀의 분위기를 두른 늙은 교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호리카와 군, 이거 얼마 안 되는 돈인데……"
 오노와 씨는 부끄럽다는 양 웃으며 네 번 접힌 십 엔 지폐를 건넸다.
 "정말 안 되는 돈인데 도쿄 갈 때 기차비로 써요."
 야스키치는 크게 당황했다. 록펠러에게 돈을 빌리는 건 수없이 공상했었다. 하지만 오와노 씨께 돈을 빌리는 건 이제껏 꿈도 꾸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곧장 떠올린 건 오늘 아침 오와노 씨께 주야장천 글쟁이의 비극을 늘어놓았단 사실이었다. 그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로 머뭇머뭇 변명을 했다.
 "아뇨, 그 용돈은――용돈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도쿄에 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거고――애초에 도쿄에 갈 생각부터 없어져서……"
 "그러지 말고 받아두세요. 이거라도 없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정말로 필요 없어서요. 마음은 감사한데……"
 오와노 씨는 조금 당혹스러운지 물고 있던 파이프를 내려 놓으며 네 번 접은 십 엔 지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들고는 다시 한 번 검은테 근시 안경 안쪽에 수줍음에 가까운 미소를 드리웠다.
 "그런가요? 그럼――공부 중에 실례했네요."
 오와노 씨는 되려 자신이 돈을 빌리는데 실패한 것처럼 십 엔 지폐를 주머니 안에 넣자마자 사전이나 참고서가 줄지은 서재 너머로 물러났다. 그 후엔 또 힘 없고 어딘가 땀을 머금은 침묵만이 남았다. 야스키치는 니켈 시계를 꺼내 그 니켈 뚜껑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평상심을 잃으면 싫더라도 시계 속 자신을 바라보는 게 그가 십 년간 이어 온 습관이다. 물론 니켈 시계의 뚜껑은 그의 얼굴을 정확히 비추지 않는다. 작은 원 속 그의 얼굴은 전체가 굉장히 몽롱한 데다가 코만 굉장히 컸다. 다행히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서서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동시에 또 오와노 씨의 호의를 소홀히 한 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와노 씨는 십 엔 지폐를 거절하기 보다도 되려 흔쾌히 받아 드는데 만족감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그런 걸 내친 건 실례이다. 그뿐 아니라――
 야스키치는 이 '그뿐 아니라' 앞에 선풍을 두고 몸이 떨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곤궁함을 호소해놓고 은혜를 거절하는 건 비겁한 일이다. 의리 인정은 유린해도 된다. 비겁한 사람이 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돈을 빌리는 건――적어도 돈을 빌리면 28일 월급날까지 갚을 수 없는 건 분명하다. 그는 원고료를 앞당겨 받는 건 얼마든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와노 씨에게 빌린 돈을 이주 넘게 갚지 못하는 건 거지가 되는 것보다도 불쾌했다……
 십 분 가량 망설인 후, 그는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거의 시비라도 걸려는 것처럼 씩씩하게 오와노 씨의 책상으로 향했다. 오와노 씨는 오늘도 담배캔, 재떨이, 출석부, 만년풀을 질서정연히 놓은 책상 앞에서 파이프 연기를 나부끼는 채로 유유히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 소설을 읽고 계셨다. 하지만 야스키치가 온 걸 보고 교과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탐정 소설을 덮은 후 조용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오와노 씨, 방금 전 돈을 빌려주세요. 생각을 좀 해봤는데 빌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야스키치는 단숨에 이렇게 말했다. 오와노 씨는 아무 대답도 않고 일어났던 거 같다. 하지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 후로 7, 8년이 지난 오늘날, 야스키치가 희미하게 기억하는 건 커다란 오와노 씨의 오른손이 그의 눈앞에 뻗은 것뿐이다. 혹은 그 손가락 끝에(니코틴은 두터운 검지 손톱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네 번 접힌 십 엔 지폐가 한 장, 그 자체로 수줍음을 두른 것처럼 머뭇머뭇 나온 것뿐이었다………

       ―――――――――――――――――――――――――

 야스키치는 모레 월요일에 반드시 이 십 엔 지폐를 오와노 씨에게 돌려드리자 결심했다. 혹시 몰라 반복하자면 정말로 이 한 장의 십 엔 지폐였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다. 원고료를 미리 받을 일도 없고 부모 형제하고도 싸운 지금은 설령 도쿄에 가본들 돈이 생기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럼 십 엔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이 십 엔 지폐를 보존해야만 한다. 이 십 엔 지폐를 보존하기 위해서는――야스키치는 어두컴컴한 이등객차 구석에서 발차 신호를 기다리며  오늘 아침보다도 한 층 더 통렬히 육십몇 전에 뒤섞인 한 장의 십 엔 지폐를 생각했다.
 오늘 아침보다도 한 층 더 통렬히――하지만 오늘 아침보다도 우울하진 않았다. 오늘 아침은 단지 돈이 없는 걸 불쾌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외에도 이 한 장의 십 엔 지폐를 돌려줘야 한다는 도덕적 흥분을 느끼고 있다. 도덕적?――야스키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단연코 도덕적이지 않다. 그는 단지 오와노 씨 앞에서 자신의 위엄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위엄을 지키는 방법은 빌린 돈을 갚는 것 말고도 존재한다. 만약 오와노 씨도 예술을――적어도 문예를 사랑한다면 작가 호리카와 야스키치는 한 편의 걸작을 만들어내는 걸로 위엄을 지키려 꾀했으리라. 혹은 만약 오와노 씨도 자신처럼 일개 어학자에 지나지 않았다면 교사 호리카와 야스키치는 어학적 교양을 보여주는 걸로 위엄을 지킬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예술에 관심이 없고 어학적 천재인 오와노 씨 앞에서는 어느 쪽도 통용되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야스키치는 싫더라도 사회인으로서의 위엄을 지켜야만 했다. 즉 빌린 돈을 갚아야 했다.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억지로 위엄을 지키려 하는 건 어쩌면 우습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된 건지 누구보다도 특히 오와노 씨 앞에――그 검은테 근시 안경을 쓰고 어느 정도 등이 굽은 노신사의 앞에서 자신의 위엄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러는 사이 기차가 움직였다. 어느새인가 흐린 구름을 무너트린 비는 희미하게 푸른빛을 머금은 바다 위에서 몇 척의 전함 앞에 물 안개를 만들었다. 야스키치는 어쩐지 마음을 내려놓으며 두세 명 밖에 승객이 없는 걸 틈타 길게 쿠션 위에 누웠다. 그러자 곧장 떠오르는 건 혼고에 자리한 어느 잡지사였다. 이 잡지사는 한 달 전에 기고를 의뢰하는 긴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 잡지사가 발행하는 잡지에 증오와 경멸을 느끼던 그는 아직 그 의뢰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아아, 이런 잡지사에게 작품을 파는 건 딸을 매춘부로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얼마라도 원고료를 앞당겨 받을 수 있는 건 이 잡지사 하나뿐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앞당겨 받을 수 있다면――
 그는 터널에서 터널로 들어가는 차 안의 명암을 올려다보며 앞당겨 받으면 어느 정도의 향락을 받을지 상상했다. 갖은 예술가의 향락은 자기발전의 기회이다. 자기발전의 기회로 잡는 건 남이나 하늘에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이는 2시 30분에는 도쿄에 들어가는 급행차이다. 조금이나마 앞당겨 받으려면 이대로 도쿄까지 가면 된다. 50엔――적어도 30엔 돈만 받을 수 있다면 오랜만에 하세나 오오토모와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을 터이다. 프로일라인 묄렌도르프의 연주회에도 갈 수 있을 터이다. 캔버스나 그림 도구도 살 수 있을 테지. 아니, 그뿐일까. 단 한 장의 십 엔 지폐를 필사적으로 보존하려 들지도 않을 터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앞당겨 받지 못하면――그때는 그때 생각해야만 한다. 본래 그는 무엇을 위해一오와노 렌타로 앞에서 위엄을 지키고 싶다 생각했는가? 확실히 오와노 씨는 군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스키치의 내재적 생명에는――그의 예술적 정열에는 길거리 행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길거리 행인을 위해 자기 발전 기회를 잃는 ――빌어먹을, 이런 논리는 위험하다!

 야스키치는 불쑥 몸을 떨면서 쿠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터널을 빠져나온 기차는 괴롭게 연기를 내뿜으며 비가 섞인 바람에 살랑이는 푸른 갈대 언덕 사이를 달리고 있다……

       ―――――――――――――――――――――――――

 다음 월요일 오후였다. 야스키치는 하숙방의 낡은 등나무 의자 위에서 유유히 담배에 불을 옮겼다. 그의 마음은 근래 없는 만족으로 넘치고 있었다. 넘치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먼저 그는 십 엔 지폐를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두 번째로 어떤 출판사는 지금 막 받은 편지 안에 한 권 당 50전의 인세를 500부 어치 봉입해 보내주었다. 세 번째로――가장 의외였던 건 이 사건이다. 세 번째로 하숙집은 저녁밥 접시에 은어 소금구이 한 마리가 올라와 있었다!
 초여름의 저녁노을은 집앞에 심어진 벚나무 가지에 떠올라 있었다. 버찌가 떨어진 정원의 모래 위에도 떠올라 있었다. 야스키치의 무릎 위에 오른 한 장의 십 엔 지폐에도 떠올라 있다. 그는 그 저녁노을 안에서 네 번 접힌 십 엔 지폐를 보았다. 회색 덩굴무늬나 국화 문장 안에 붉은 도장을 찍은 십 엔 지폐는 신기하리만치 아름다운 지폐였다. 타원형 안의 초상화도 우둔한 상을 두르고 있다고는 해도 평소 느낀 것처럼 속되어 보이진 않았다. 뒤도――질 좋은 녹색에 갈색을 배치한 뒷장도 한 층 더 훌륭했다. 이만큼 때 묻지만 않았다면 이대로 액자에 넣어도――아니, 때뿐일까. 무언가 커다란 10 위에 얇은 잉크로 낙서가 되어 있다. 그는 조용히 십 엔 지폐를 들어 올려 입으로 그 문자를 읽어 보았다.
 "초밥이나 먹을까."
 야스키치는 십 엔 지폐를 무릎 위로 돌렸다. 그리고 정원의 저녁노을 속에 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 한 장의 십 엔 지폐도 이런 낙서의 작가에게는 단지 초밥이나 사 먹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돈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넓은 세상 속엔 이 한 장의 십 엔 지폐를 위해 비극이 일어난 적도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도 어제 오후엔 이 한 장의 십 엔 지폐 위에 그의 혼을 걸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는 어찌 되었든 오와노 씨 앞에서 자신의 위엄을 다 해냈다. 500부 인세도 월급날까지의 용돈 삼기엔 충분하리라.
 "초밥이나 먹을까."
 야스키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십 엔 지폐를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어제 주파한 알프스를 돌아보는 나폴레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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