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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켈트의 여명'에서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역

by noh0058 2021.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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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을 먹는 자 

 평속한 명성과 이익을 떼어놓은 채 잠시 세상만사를 잊을 때 나는 이따금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는 한다. 한 번은 모호한 그림자 같은 꿈을 꾼다. 한 번은 또렷하여 내 발밑의 대지처럼 구체적인 꿈을 꾼다. 그렇게 모호하고 또렷함을 구분치 않고 꿈은 항상 제멋대로 흘러서 나는 그 일각을 바꾸는 권능마저도 지니지 못한다. 꿈은 꿈 스스로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잡아당기는 통에 나와 내 모습도 그 의식을 따라 모습을 바꾸고 만다.
 하루는 가슴가까지 오는 담을 두른 끝을 모르는 구덩이를 보았다. 구덩이는 칠흑 같이 어두웠다. 벽 위에는 무수한 원숭이가 자리하여 손바닥에 쌓은 보석을 먹고 있다. 보석은 때로는 녹빛을 때로는 붉은빛을 내뿜었다. 원숭이는 질리지 않는 먹이처럼 하염없이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나는 스스로가 켈트 민족의 지옥을 보았음을 알았다. 나 자신의 지옥이다. 예술의 땅의 지옥이다. 나는 또 그칠 수 없는 욕심과 갈망으로 아름다운 걸 추구하고 기이한 물건을 쫓는 사람들이 평화와 형태를 잃고 끝내는 무형과 평속함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나는 또 다른 사람들의 지옥을 본 적이 있다. 그중 하나서 사도라 불리는 유령을 보았다. 얼굴은 검고 입술은 하얗다. 기이한 이중 천칭의 원반 위에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저지른 악행과 실행하지 않고 그친 선행의 양을 재고 있다. 내게는 천칭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사도 주위에 모여 있는 수많은 '우령'은 끝내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외에 또 갖은 형태의 악마 무리를 보았다. 물고기 같은 형태를 한 악마도 있었다. 뱀의 형태를 한 악마도 있었다. 원숭이의 형태를 한 악마도 있었다. 개 형태를 한 악마도 있었다. 그 모든 게 내 지옥에 자리해 있던 어두운 구덩이 주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천공의 달이 반사되어 드리운 구덩이 밑바닥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Ⅱ 세 사람의 오뷸룬과 사악한 정령들

 유암의 왕국에는 귀중한 물건이 무수히 있었다. 지상보다도 더 많은 사랑이 있었다. 지상보다도 더 많은 무도가 있었다. 그리고 지상보다도 많은 보물이 있었다. 태초에 대지는 분명 인간의 바람을 충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노쇠하여 멸락의 땅에 잠겨 있다. 우리가 다른 세계의 보물을 훔치려 하는 게 이상할 리도 없을 터이다.
 내 친구 중 한 명이 어느 날 슬리브, 리그 가까이에 있던 마을에 머무른 적이 있다. 어느 날 그 남자가 카셸, 노아라 불리는 요새 주변을 산책하고 있자니 한 남자가 요새로 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굴은 초췌하고 머리는 빗질도 하지 않았다. 옷은 너덜너덜 찢어져 있다. 내 친구는 옆에서 일하던 농부에게 저 남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저건 삼 대째 오뷸룬입니다"하고 농부가 대답했다.
 그로부터 대여섯 날이 지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수많은 보물이 이교가 돌던 옛날부터 그 요새 안에 묻혀 있다. 그리고 사악한 요정(페어리) 무리가 그 보물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 그 보물은 오뷸룬 가문의 사람이 찾아내 그 사람들의 물건이 되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세 사람의 오불륜 가문 사람이 그 보물을 찾고 죽어야만 한다. 두 사람은 이미 그렇게 했다. 첫 번째 오뷸룬은 파고 또 파서 이미 보물이 들어 있는 석관을 보았다. 하지만 곧 커다랗고 털이 많은 개가 산에서 내려와 그를 찢어발기고 말았다. 보물은 다음 날 아침 다시 땅 깊숙한 곳에 묻혀 보이지 않게 숨겨졌다. 그로부터 두 번째 오뷸룬이 와 다시 땅을 파고 또 팠다. 기어코 궤짝을 찾아내 뚜껑을 열고 안에서 황금이 빛나는 것까지 보았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에 무언가 무서운 걸 보고 발광하더니 기어코 미쳐 죽고 말았다. 그렇게 보물 또한 땅 아래에 잠들어 버렸다. 세 명째 오뷸룬은 지금 파고 있다. 그는 자신이 보물을 발견할 찰나에 무섭게 죽으리라 믿고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저주가 풀려 오뷸룬 가문이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영원한 부귀를 누리란 것도 믿고 있다.
 이웃 농부 중 한 사람은 과거에 그 보물을 보았다. 그 농부는 풀 안에서 토끼의 정강이뼈가 떨어져 있는 걸 찾아냈다. 들어 올려보니 구멍이 빛났다. 그 구멍을 들여다보니 지하에 산처럼 쌓인 황금이 있었다. 해서 서둘러 집에서 쟁기를 가져와 돌아왔는데 요새에 와보니 이번에는 아무리 찾아도 그 장소를 발견해낼 수 없었다. 

       Ⅲ 여왕이여, 난쟁이의 여왕이여 내가 왔노라

 어느 밤, 평생을 떠들썩함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보낸 남자와 그 친척인 젊은 소녀와 나 세 사람이 먼 서쪽의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다. 그 소녀는 들판 위에서 가축 사이를 오가는 수상쩍은 불 하나도 놓치지 않는 능력을 지닌 여자였다. 우리는 "잊기 쉬운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잊기 쉬운 사람들"이란 정령(페어리) 무리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이야기가 절반가량 흘렀을 때 우리는 정령이 출몰하는 장소로 명성 높은 검은 바위 안의 얕은 동굴에 이르렀다. 젖은 모래 위에는 동굴의 그림자가 반사되고 있다.
 나는 그 소녀에게 뭐가 좀 보이냐고 물었다. 그건 내가 "잊기 쉬운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잔뜩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몇 분 동안 조용히 서있었다. 나는 그녀가 눈을 뜬 채로 몽환에 빠지는 걸 보았다. 차가운 바닷바람도 이제는 그녀를 번거롭게 하지 않을뿐더러 울적한 파도 소리도 지금은 그녀의 주의를 흐트러 놓지 않았다.
 나는 그때 목소리를 높여 위대한 정령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곧장 바위 안에서 먼 음악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북적이는 말소리나 보이지 않는 악사를 떠받들 듯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때까지 조금 떨어진 곳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때 우리 옆을 지나며 불쑥 "어딘가의 바위 너머서 아이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분명 성가실 거예요"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이건 그에게 또한 이곳의 정령이 매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곧 그의 몽환은 소녀 덕에 더 강해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악성, 떠들썩한 목소리, 발소리에 섞여 들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지금은 전보다도 깊어진 것처럼 보이는 동굴에서 새어 나오는 밝은 빛과 불그스름함에 이긴 수많은 색의 옷을 입고서 잘 모를 박자를 따라 춤추는 난쟁이 무리가 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난쟁이의 여왕을 불러 자신들과 이야기하게 해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의 명령에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자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곧 아름답고 키가 큰 여자가 동굴에서 나왔다. 그때에는 나 또한 몽환의 일종에 빠진 것이다. 그 몽환 속에는 공화나 경화 같은 모든 게 엄숙하며 침범하기 어려운 진실로서 몸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 여자의 황금 장식이 빛나는 것도 검게 물든 머리에 꽂혀 있는 어두운 꽃을 보는 것도 가능했다.
 나는 소녀에게 그 키 큰 여왕에게 이야기해 그 사람들을 본래의 구획을 따라 진열시키도록 말했다. 그건 내가 그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이전처럼 내 명령을 스스로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자들이 동굴에서 나왔다. 그리고 만약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네 열로 나뉘어 정렬했다. 그 중 한 열은 손에 산진피 가지를 들고 있다. 또 한 열은 뱀가죽으로 만들어진 걸로 보이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상은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건 내가 그 빛나는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 동굴이 요 근래 정령이 출몰하는 장소가 되었는지 물어 달라고 소녀에게 부탁했다. 그녀의 입술은 움직였지만 답을 들을 순 없었다. 나는 소녀에게 손을 여왕의 가슴에 얹으라 말했다. 그러자 소녀는 여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곳이 가장 정령이 모이는 곳은 아니다. 좀 더 가면 더 많이 모이는 곳이 있다. 나는 그리고 정령이 인간이 데리고 가는 게 사실인지를 물었다. "우리는 형태를 바꾼다" 그게 여왕의 답이었다. "이제까지 당신들 속에 인간으로 태어난 자가 있었나요" "있었다" "내생 이전에 당신들 속에 있었다는 걸 자신이 알고 있나요" "알고 있지" "그건 네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는 그로부터 여왕과 그 사람들이 우리의 기분이 표현된 게 아닌지는 물었다. "여왕은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정령은 인간과 닮아 있고 때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을 한다지요"하는 게 친구의 답이었다.
 나는 여왕에게 또 여러 가지를 물었다. 여왕의 성격을 묻거나 우주에 관한 그녀의 목적을 묻고는 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녀를 괴롭히는 일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끝내 여왕은 견딜 수 없었는지 모래 위에 이렇게 적었다――환상의 모래다. 발소리가 나는 모래가 아니다――"잘 알아두어라. 우리에 관해 너무 많이 알려 하지 말라" 여왕은 화가 난 걸로 보였고 나는 그녀가 말해준 것, 이야기해준 것에 감사했다. 또 원래대로 그녀를 동굴로 돌려보냈다. 잠시 후 소녀가 그 환상에서 눈을 뜨고 다시 이곳의 차가운 바람을 느껴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되도록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또 이야기를 망칠만한 모종의 이론도 덧붙이고 있지 않다. 필경 세상 모든 이론은 애처로운 것이다. 그리고 내 이론의 대부분은 그 이전에 존재를 잃고 감춰져 있다.
 나는 어떠한 이론보다도 문을 여는 "상아의 문"의 울림을 열애하고 있다. 그리고 또 장미가 뿌려진 그 현관을 지난 자만이 "뿔의 문"의 먼 빛을 잡으러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만약 점성술사 릴리가 윈조아의 숲에 한 외침―― REGINA, REGINA PIGMEORUM, VENI(여왕이여, 난쟁이의 여왕이여 내가 왔노라)의 목소리를 외쳐 그와 마찬가지로 신이 꿈에 앳됨을 가져다준다는 걸 기억한다면 그건 아마 우리를 위한 행복을 가져오리라. 키만 크고 눈부신 여왕아. 바라건대 내게 와라. 와서 그대의 검은 머릿결에 꽂힌 어두운 꽃을 보여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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