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도
운림의 작품 중 본 건 하나뿐이다. 그 하나는 선통제의 어물인 금고기관이란 화첩 속에 있었다. 화첩 속 그림의 대부분은 동기창의 옛창고에 저장되어 있었던 물건이라고 한다.
운림필이라 통칭되는 물건은 분카덴에도 서너 폭이 있었다. 하지만 그 화첩 속의 웅장하고 강한 소나무 그림에 비하면 질이 많이 떨어진다.
나는 매도인의 묵적을 보고 황대치의 수산을 보고 왕숙명의 폭포를 보았다.(분카덴의 폭포도가 아니다. 진옥침 씨가 소장하는 폭포도이다.) 하지만 기품에 저절로 고가 숙여진 건 운림의 소나무에 미치지 못했다.
소나무는 뾰족한 바위 안에서 똑바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그 가지에는 수정처럼 각진 운연雲煙이 옆으로 뻗어 있다. 그림 속 광경은 그게 전부이다. 하지만 이 수려한 세계엔 운림 이외엔 가보지 못 했다. 황대치 같은 거장도 이곳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런 마당이니 명과 청의 화가들은 오죽할까.
남화는 가슴속의 기질만 묘사하면 다른 건 묻지 않는다는데 묵으로만 이뤄진 이 소나무에도 자연은 충분히 살아 있지 않은가? 유화는 진실을 그린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의 빛과 그림자는 한 시도 동일하지 않다. 클로드 모네의 장미를 진실이라 하는 것도 운림의 소나무를 가짜라 하는 것도 결국은 말하기 나름 아닌가? 나는 이 그림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연로도
시가 나오야 씨가 소장한 송화 중에 연꽃과 백로를 그린 게 있다. 남빈이 그리는 연꽃은 이 그림에 비하면 소위 사생写生에 가깝다. 옅은 화판이나 잎의 광택은 좀 더 여실히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그림 속 연꽃처럼 일렁이는 듯한 무게감은 없다.
이 그림의 연꽃은 꽃도 잎도 하나같이 잘 내려앉아 있다. 특히 연밥 따위는 낡은 명주 위로도 그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금속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백로도 단순한 백로가 아니다. 등의 날개를 거꾸로 쓰다듬으면 손바닥에 날개 끝이 닿을 것만 같다. 이만큼 전체적인 무게감은 근대 그림에 없을뿐더러 대륙 풍도에 뿌리를 내린 인근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다.
물론 일본 그림은 중국 그림과 친근한 사이다. 하지만 이런 완고함은 고화나 남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일본 건 좀 더 가볍다. 또 동시에 좀 더 부드럽다. 하치다이의 물고기나 신라의 섬마저 다이가의 바위 아래서 놀거나 부손의 나무 위에 살기에는 너무 듬직하지 않은가. 중국 그림은 생각보다 일본 그림과 닮지 않은 모양이다.
귀취도
텐신에 사는 방야 씨의 컬렉션 중에 보기 드문 김동심의 그림 한 폭이 있었다. 이는 2척인가 1척 정도 되는 종이에 여러 괴물을 그린 것이다.
나양봉의 귀치도는 사진판으로 본 적이 있었다. 양봉은 동심의 제자였으니 그 귀취도의 프로토 타입도 이런 곳에 있을지 모른다. 사진판으로 본 양봉의 괴물은 묘하게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동심은 그런 요기妖気는 없다. 대신 귀여운 맛이 있다. 이런 괴물이 있다면 밤도 낮보다는 밝을 테지. 나는 쓸쓸한 수목 사이에서 그들이 무리 짓는 걸 바라보며 괴물도 우습게 볼 건 아니지 싶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독일 책 중에 괴물 그림만 모은 게 있다. 그 책 안의 괴물은 대부분 보여주기 위한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 잘 그렸다 싶은 것도 묘하게 자연미가 빠져 병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동심의 괴물에게 그런 경향이 없는 건 입장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출가 죽반승의 눈은 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기괴한 한산 습득의 얼굴에 "영혼의 웃음"을 본 게 키시다 류세이 씨였던가. 만약 그 "영혼의 웃음" 뒤에 약간의 장난심을 더하면 그게 바로 동심의 괴물이다. 이 수묵의 여명 속에 때론 울고 때론 웃는 미워할 수 없는 이류의 이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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