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나는 무작정 책만 쌓아 둔 서재 안에 꿇어앉아 쓸쓸한 봄소나무의 시간을 한없이 나른하게 보내고 있었다. 책을 펼쳐 보고 적당한 문장을 써보고 그에도 질리면 엉망진창 하이쿠를 지어 보기도 하고――요컨대 태평 시대의 사람처럼 느긋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이웃 사모님이 아이를 데리고 연시 인사를 겸해 놀러 왔다. 이 사모님은 옛날부터 젊게 살고 싶단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러니 데리고 온 여자아이가 벌써 다섯 살이나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녀일 적의 아름다움을 어제 일처럼 보존하고 있었다.
그날 내 서재에는 매화꽃이 펴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매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치에라는 여자아이는 그 동안 서재에 걸린 그림이나 족자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지루하다는 양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에가 불쌍해져 사모님께 "이제 내려가셔서 어머니하고 말씀하시죠"하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라면 사모님과 이야기하면서도 아이를 지루하게 하지 않을 수완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모님은 품에서 거울을 꺼내 치에에게 건네더니 "얘는 이거만 주면 절대 지루해하지 않아요"하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하고 물어보니 사모님의 남편이 즈시의 별장에서 요양하던 때, 사모님이 아내를 데리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도쿄와 즈시를 왕복했다고 한다. 치에는 물론 기차를 탈 때마다 지루해 했다. 그뿐 아니라 그 지루함을 풀 생각에 장난을 하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때는 모르는 사람한테 "프랑스어 할 줄 아세요?"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을 묻기도 했다. 때문에 사모님도 그림책을 주거나 하모니카를 주는 등 이래저래 지루함을 달래 줄 궁리를 해보았지만 끝내는 손거울을 두면 의외로 계속 얌전히 앉아 있는단 사실을 발견했다. 치에는 그 거울을 들여다보며 분 뿌린 걸 바로잡거나 머리를 다듬거나 또 일부러 얼굴을 찌푸려 보는 둥 거울 속 자신을 상대로 한사코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모님은 거울을 건네준 이유를 설명하며 "역시 애는 애에요. 거울만 보고 있으면 전부 잊을 수 있으니까요"하고 덧붙였다.
나는 찰나의 순간 이 사모님에게 가벼운 악의를 느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웃으며 이런 말로 비꼬았다.
"당신도 거울만 보면 모든 걸 잊지 않습니까. 지루한 게 기차 안일 뿐인지 이 세상 그 자체인지, 치에와 다른 건 단지 그뿐이죠."
번호표
이 또한 어느 봄에 있었던 일이다. H란 젊은 미국인이 우리 집에 놀러와 대뜸 주머니에서 신발을 보관하는 사물함의 번호표를 꺼내며 "뭔지 알겠어?"하고 물었다. 번호표는 아직 나무 냄새가 날 정도로 새로운 겉면에 굵고 삐뚤삐뚤한 글자로 "눈의 십칠 번"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그 글씨체를 보고 어째서인지 료고쿠의 하시노타모토에 가게를 낸 감주 가게의 붉은 짐을 떠올렸다. 하지만 "눈의 십칠 번"에 얽힌 인연을 알 리도 없었다. 그러니 이 황당한 문답을 가져온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야 모르지"하고 답했다. 그러자 H는 안경의 뒤에서 묘한 눈 깜빡임을 한 번 보내더니 불쑥 히죽히죽 웃었다.
"이건 어떤 게이샤가 준 기념품SOUVENIR이야."
"흐음, 기념품치고는 또 묘한 걸 받았네."
우리 사이에는 정월 요리가 놓여 있었다. H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도소주가 담긴 잔에 입을 얹고는 츠케모노 그릇을 손에 든 채로 쉼없이 번호표에 얽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H가 교사로 있는 학교가 어제 아카사카에 위치한 어떤 오차야에서 신년회를 열었다고 한다. 일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H는 아직 게이샤에게 아양을 떠는 공부도 하지 못했으니 그저 나오는 요리를 전부 해치우며 잔에 채워지는 술을 모조리 마시고는 했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열 명 가량의 게이샤 중에 시종 그를 향해 추파를 보내는 한 여자가 있었다. 일본 여자는 복사뼈 아래 빼고는 모두 아름답다는 H니까 물론 이 게이샤도 그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였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도 그릇과 잔을 비워가는 와중에도 이따금 그 여자를 보았다.
하지만 일본어가 통하지 않는 H라도 일본주는 사양 없이 작용한다. 그는 한 시간가량 지난 가운데 말 그대로 만취했다. 그 결과 거의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한적한 중앙 정원은 석등 빛만을 희미하게 빛내며 은은한 대나무 속 어둠을 이루고 있다. H는 몽롱한 눈으로 경치를 바라보는 동안 일본의 정서에 젖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정서가 그의 이국정서를 만족시킨 건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복도로 나오자마자 뒤를 쫓아 소매를 끌고 온 한 게이샤가 불쑥 그의 목에 안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술 냄새 나는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물론 그건 아까부터 그에게 추파를 보내던 게이샤였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두 손으로 그 게이샤를 안았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굉장히 이상적으로 발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안는 동시에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지더니 H는 그대로 복도에 무례하게도 구토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고막에는 "나는 X코야. 다음에 혼자 오게 되면 불러줘"하는 교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걸 듣는 동시에 그는 마치 천사의 악성을 들은 성도만 같이 정신을 잃고 말았다.
H는 다음 날 아침 열 시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오차야의 한 방에서 두터운 이불에 둘러싸여 누워 있는 자신을 보고 모든 게 마치 한 세기 전의 일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신에게 입맞춤한 게이샤의 모습만은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오늘 밤에도 여기에 와서 그 게이샤에게 말을 걸면 분명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올 게 분명하다. 그는 그런 생각에 기세 좋게 이불을 걷어찼다. 하지만 술에 씻긴 그의 두뇌로는 그 게이샤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게이샤에게 말을 걸 수 없다는 건 아무리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된 그라도 명백했다. 그는 바닥에 앉은 채로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잃은 채 긴 발만 괜히 바라봐야만 했다――
"그래서 그 밤의 번호표 한 장을 받아왔어. 이거도 그 게이샤의 기념품이 분명해."
H는 그렇게 말하며 그릇을 놓거는 봄에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안경을 고쳐 썼다.
소세키 공방의 가을
밤의 추위가 매섭게 스며드는 오르막 거리를 오르자 낡은 판잣집 문 앞에 이른다. 문에는 전등이 들어 와 있지만 기둥에 걸린 명패는 거의 존재 여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문을 넘자 모래와 돌이 깔린 길이 나온다. 또 그 돌과 모래 위에는 정원수의 낙엽이 난잡하게 떨어져 있다.
모래와 낙옆을 밟고 현관으로 향하니 역시나 낡은 격자문 이외에는 벽이라고 할 게 못 됐다. 하나 같이 덩굴에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안내를 구하려면 먼저 마른 덩굴 잎을 치우며 벨 버튼을 찾아야만 한다. 그렇게 겨우 벨을 누르면 불이 들어와 있는 문이 열리고 머리를 묶은 여종 하나가 바로 격자문의 잠금쇠를 풀어준다. 현관 동쪽으로는 복도가 있고 그 복도 난간 밖에는 겨울을 모르는 목적색이 정원을 한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객실의 유리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전등불도 지금은 거기까지 비춰주지 않는다. 아니, 그 빛이 들어 오는 만큼 반대편 건물에 걸린 풍경의 그림자도 되려 짙어져 어둠 속에 숨어버렸을 정도이다.
유리문으로 손님방을 들여다보니 비가 샌 자국이나 쥐가 좀 먹은 구멍 따위가 하얀 종이를 붙인 천장에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열 첩 가량 되는 바닥에는 붉은 오학선 융단이 깔려 있어 다다미의 상태를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손님방의 서쪽(현관 쪽)에는 경시 당지 두 장이 있고 그중 한 장 위에는 색이 바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마지에 노란 백합 같은 꽃을 누빈 것은 츠다 세이후 씨의 도안인 듯하다. 이 당지의 좌우 벽 쪽에는 썩 질이 좋지 않은 유리문 책장이 있어 서양 서적으로 빼곡했다. 또 복도에 접한 남쪽에는 살풍경한 철격자 서양 창문 앞에 커다란 자단 책상이 놓여 있다. 그 위에는 벼루나 펜이 종이나 법첩과 같게 의외로 깔끔하게 늘어져 있다. 창문이 달린 남쪽벽과 반대된 북쪽 벽에는 항상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조타쿠의 묵죽이 황흥의 "문장천고사"와 인사하던 적도 있다. 목암의 '화개만축국'이 오창석의 목련과 마주한 적도 있다. 하지만 손님방을 장식한 서화는 비단 이 정도가 아니다. 서쪽 벽에는 야스이 소타로 씨의 유화 풍경화가, 동쪽 벽에는 사토 요리 씨의 유화 꽃그림이, 그리고 또 북쪽 벽에는 메이게츠 센지의 무현금 같은 그림이 항상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그런 액자나 그림 밑에는 동병에 담긴 매화나 청자에 담긴 국화가 이따금 꽂혀 있는 건 물론 사모님의 풍류임이 분명하다.
만약 먼저 온 손님이 없다면 이 손님방을 본 눈을 바로 안방으로 옮겨야 한다. 안방이라 해도 손님방의 동쪽에는 당지도 무엇도 없으니 사실상 한 방이나 다름없다. 다만 여기는 판자가 깔려 있고 중앙에 펼쳐진 낡은 융단 외에는 한 장의 다다미도 깔려 있지 않다. 그리고 동쪽과 북쪽 두 벽에는 서양과 중국, 일본의 신간과 구간이 큰 책장 안에 가득 담겨 있다. 그럼에도 책장이 부족한지 아래 바닥에 깔려 있는 수도 적지 않다. 그런 데다가 남쪽 창가에 놓인 책상 위에도 그림이니 법첩이니 화집 같은 게 난잡히 쌓여 있다. 그러니 중앙에 갈린 낡은 융단도 사방에 줄지은 서적 덕에 화려한 붉은색이 조금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한가운데에는 자단 책상이 놓여 있고 또 그 책상 반대편에는 방석 두 장이 깔려 있다. 동으로 된 도장이 하나, 돌로 된 도장이 둘이나 셋, 펜받침으로 쓰는 대나무 찻잔, 그 안에 만년필, 그리고 옥으로 된 문진을 둔 한 뭉텅이의 원고용지――책상 위에는 그 외에도 돋보기안경 같은 게 놓여 있는 경우도 보기 드물지 않다. 그 바로 위에선 전등이 빛을 내뿜고 있다. 옆에는 세토 각로가 벌레 우는소리처럼 타닥거리고 있다. 만약 밤 추위가 심하면 조금 떨어진 가스난로에도 붉게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책상 뒤편, 두 장을 겹친 방석 위에 어딘가 사자를 방불케 하는 키가 작고 머리가 반쯤 하얗게 변색된 노인이 때로는 편지지에 붓을 놀리고 때로는 시집을 훑으며 홀로 앉아 있다……
소세키 공방의 가을 밤은 그렇게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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