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어느 겨울 저녁, 야스키치는 칙칙한 레스토랑 2층에서 기름 찌든 내가 나는 구운 빵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의 테이블 앞에는 균열이 생긴 하얀 벽이 있었다. 벽에는 또 "핫(따듯한) 샌드위치도 있습니다"하고 적힌 얇고 긴 종이가 기울어져 붙어 있었다. (그의 동료중 하나는 이걸 "아따듯한 샌드위치"라 읽어 그를 정말로 신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왼쪽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오른쪽에는 바로 유리 창문이 있었다. 그는 구운 빵을 물면서 이따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거리 하나를 둔 아연 지붕의 옷가게 하나가 직공용 작업복이나 카키색 망토 따위를 진열해두고 있었다.
그날 밤 학교에선 여섯 시 반부터 영어 회화 모임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는 출석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학교 주변에 살지 않는 관계상 싫어도 방과 후 여섯 시 반까지는 어디선가 시간을 때워야 했다. 분명 토키 젠마로 씨의 우타에――틀렸다면 미안하다――"멀리 와서 쓰레기 같은 비프 스테이크를 먹어야 하다니. 아내여, 아내여 그립구나"하는 게 있었다. 그는 여기에 올 때면 항상 그 노래를 떠올렸다. 물론 그리워할 아내는 아직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옷가게를 바라보며 기름 찌든 내 배긴 구운 빵을 먹으며 "핫(따듯한) 샌드위치"를 보고 있자면 "아내여, 아내여, 그립구나"하는 말이 저절로 입술 위에 오르고는 했다.
야스키치는 요전 번에도 그의 뒤에 젊은 해군 무관 둘이 맥주를 마시고 있는 걸 보았다. 그중 한 명은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같은 학교의 주계관이었다. 무관하고는 친하지 않은 그는 이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아니 이름뿐일까. 소위인지 중위인지도 알지 못했다. 단지 그가 아는 건 매달 월급을 받을 때에 이 사람을 통한다는 것뿐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둘은 맥주를 주문할 때마다 "이봐"니 "거기" 같은 말을 썼다. 여종은 그럼에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두 손에 컵을 든 채로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리곤 했다. 그런 주제에 야스키치의 테이블에는 홍차 한 잔도 쉽사리 가져다주지 않았다. 이건 여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거리의 카페나 레스토랑은 어딜 가도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며 무언가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야스키치라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건 아니었으나 "멍이라고 해봐"란 말은 불쑥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개를 좋아하지 않았다. 개를 좋아하지 않는 문학자 중에 괴테와 스트린드베리가 있단 사실을 유쾌하게 여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때문에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요즘 주위에서 자주 기르는 커다란 서양견을 떠올렸다. 동시에 그게 그의 뒤에 있는 듯한 꺼림칙함도 느꼈다.
그는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다행히 개로 보이는 건 없었다. 단지 그 주계관이 창밖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야스키치는 아마 창문 아래에 개가 있으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그러자 주계관이 다시 한 번 "멍이라 해봐. 야, 멍이라 해보라고"하고 말했다. 야스키치는 살짝 몸을 비틀어 반대편 창문 아래를 들여다 보았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 온 건 마사무네의 광고를 겸한 아직 불이 들어 오지 않은 헌등이었다. 그리고 감겨져 있는 차양이었다. 또 맥주통 위에 말린 채로 잊어 먹은 덧가죽이었다. 아니면 거리의 물웅덩이었다. 그 외엔――어찌 되었든 그곳에 개의 그림자는 없었다. 대신 열둘인지 열셋 먹은 거지 하나가 2층 창문을 올려다 보며 쓸쓸히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멍이라고 해봐, 멍이라고 해보라니까!"
주계관은 또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는 무언가 거지의 마음을 지배하는 힘이 있는 듯했다. 거지는 거의 몽유병 환자처럼 눈은 역시 위로 올린 채로 한두 걸음 창문 아래로 다가갔다. 야스키치는 겨우 사람 안 좋은 주계관의 장난을 발견했다. 장난?――혹은 장난이 아닐지 모른다. 아니라면 이건 실험이다. 인간은 배를 채우기 위해 어디까지 자신의 존엄을 희생할 수 있는가?――그런 실험이다. 야스키치의 생각에 따르면 이건 새삼스레 실험해볼 만한 문제가 아니다. 에사오는 불콩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고 야스키치는 빵을 위해 교사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충분할 일이다. 하지만 저 실험 심리학자는 그 정도로는 연구심을 만족시키지 못한 걸 테지. 그렇다면 오늘 학생들에게 가르친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취미에 대해선 논쟁하지 않는다이다. 오이는 거꾸로 먹어도 제맛이라지. 실험하고 싶다면 하면 된다――야스키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문 아래의 거지를 바라보았다.
주계관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거지는 조마조마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서 돌기 시작했다. 개의 흉내를 내는 건 딱히 아무래도 좋지만 주위 시선만은 신경 쓰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시선이 다 가시기도 전에 주계관은 창밖에 새빨간 얼굴을 내밀며 이번에는 무언가를 흔들어 보았다.
"멍이라고 해봐. 하면 이거 줄게."
거지의 얼굴은 순간 욕심으로 불타는 듯했다. 야스키치는 이따금 거지란 것에 로맨틱한 관심을 느꼈다. 하지만 연민이나 동정은 단 한 번도 느끼지 않았다. 만약 느낀 적이 있다면 바보거나 거짓말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저 어린 거지가 목을 살짝 위로 올리며 눈을 빛내는 걸 보면 조금 안타까웠다. 단지 이 "조금"이란 건 가치 없는 조금이다. 야스키치는 안타깝다는 생각보다도 그런 거지의 모습에서 렘브란트풍의 효과를 보았다.
"멍이라고 하라니까? 멍이라고 해보라고."
거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멍."
목소리는 참으로 작았다.
"좀 더 크게 해봐."
"멍멍."
거지는 기어코 두 번 울었다. 그랬더니 창밖으로 네이블오렌지 하나가 떨어졌다――그 후의 일은 적을 필요나 있을까. 거지는 물론 오렌지에 뛰어들었고 주계관은 물론 웃음을 터트렸다.
그로부터 일주일가량 지난 후, 야스키치는 월급날이 되어 주계부에 월급을 받으러 갔다. 주계관은 바쁘게 이곳저곳의 장부를 열어 보거나 서류를 펼쳐보고는 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고는 "봉급 찾으러 오셨죠"하고 한 마디 했다. 그 또한 "맞습니다"하고 한 마디로 답했다. 하지만 주계관은 볼일이 많은지 쉽사리 월급을 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끝내는 그의 앞에 군복 엉덩이를 들이민 채로 한사코 주판만 두드릴 뿐이었다.
"주계관님."
야스키치는 한동안 기다린 후 애원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주계관은 어깨너머로 돌아보았다. 그 입술은 분명히 "곧 됩니다"하고 말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먼저 제대로 마무리된 말을 짜내었다.
"주계관님, 멍이라 해보시겠습니까? 네, 주계관님."
야스키치가 믿는 바로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천사보다도 상냥할 정도였다.
서양인
이 학교에는 서양인 두 명이 회화나 영작문을 가르치러 와있었다. 한 명은 타운젠드란 영국인, 또 한 명은 스탈렛이란 미국인이었다.
타운젠드 씨는 머리가 벗겨지고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 좋은 할아버지였다. 본래 서양인 교사란 어떠한 속물이라도 셰익스피어나 괴테를 이야기 속에 툭툭 집어넣는 편이다. 하지만 다행히 다우젠트 씨는 문예의 문자도 꺼내지 않았다. 언제 한 번 워즈워스 이야기가 나왔더니 "시는 전혀 모르겠어. 워즈워스 같은 것도 뭐가 좋은지 모르겠고"하고 말했다.
야스키치는 타운젠드 씨와 같은 피서지에 살았기에 학교를 오갈 때에도 같은 기차에 탔다. 기차는 이래저래 삼십 분 가량 걸렸다. 두 사람은 그 기차 안에서 글래스고 파이프를 물면서 담배 이야기나 학교 이야기, 유령 이야기 따위를 나누었다. 시오소피스트인 타운젠드 씨는 햄릿에는 관심이 없어도 햄릿의 아버지 유령에는 관심을 가지고는 했다. 하지만 마법이나 연금술 같은 occult sciences 이야기가 나오면 타운젠드 씨는 반드시 고개를 파이프와 함께 저으며 "신비의 문은 속세 사람이 생각하는 정도로 열기 어려운 게 아냐. 되려 그러한 것들이 무서운 이유는 쉽게 닫기 어렵단 점이지. 그런 건 손에 대지 않는 게 좋아"하고 말했지.
다른 한 명인 스탈렛 씨는 훨씬 어린 패셔니스트다. 겨울에는 암녹색 오버 코트에 붉은 머플러를 두른 채 왔다. 이 사람은 타운젠드 씨에 비하면 이따금 신간서도 들여다 보고는 하는 모양이다. 실제로 학교 영어 모임에서 "최근의 미국 소설가"란 대강연을 한 적도 있다. 물론 그 강연에 따르면 최근 미국의 대소설가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나 오 헨리라고 한다!
스탈렛 씨도 같은 피서지는 아니더라도 역시 선로 근처에 위치한 곳에서 지나기에 이따금 기차를 같이 타고는 했다. 야스키치는 스탈렛 씨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단 하나 기억하는 건 대기실 난로 앞에서 기차를 기다릴 때뿐이다. 야스키치는 그때 하품 섞인 목소리로 교사란 직업의 지루함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무테안경을 쓴 남자다운 스탈렛 씨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교사가 되는 건 직업이 아니지. 되려 천직이라 불러야 할 거야. You know, Socrates and Plato are two great teachers …… Etc."하고 말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양키든 뭐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마저 교사라 하는 건――야스키치는 그 후로 스탈렛 씨한테 은근한 우정을 느꼈다.
점심 시간
――어떤 공상――
야스키치는 2층 식당을 나왔다. 문관 교관은 점심 밥 후 대개 옆의 흡연실로 들어간다. 그는 오늘 흡연실을 찾지 않고 정원으로 나가는 계단을 내려가기로 했다. 그러자 아래에서 하사 하나가 한달음에 세 계단씩 메뚜기처럼 올라왔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니 대뜸 엄격히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달음에 야스키치의 머리보다 높은 곳으로 올랐다. 그는 아무도 남지 않은 공간에 인사를 하고는 유유히 계단을 내려갔다.
정원에는 마키나무나 비자나무 사이에 목련꽃이 피어 있다. 목련은 어째서인지 해가 드는 남쪽에 모처럼 핀 꽃을 뻗지 않았다. 하지만 신이는 목련과 비슷하게 생긴 주제에 반드시 남쪽에 꽃을 뻗고 있다. 야스키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목련의 개성을 축복했다. 거기에 돌을 떨어트리듯이 할미새 한 마리가 내려왔다. 할미새도 그에게는 친근한 존재였다. 작은 꼬리를 흔드는 건 그를 안내하는 신호였다.
"여기! 여기! 그쪽이 아니라 여기! 여기!"
그는 할미새의 말을 따라 모래가 깔린 좁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할미새는 무슨 생각인지 대뜸 하늘에 날아올랐다. 대신 키가 큰 기관병 하나가 좁은 길을 걸어왔다. 야스키치는 그 기관병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거 같았다. 기관병은 역시나 경례 후 재빠르게 그의 옆을 지나갔다.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다. 두 걸음, 세 걸음, 다섯 걸음――열 걸음 째에 야스키치는 발견했다. 저건 폴 고갱이다. 혹은 고갱의 환생만 같다. 지금은 분명 샤브르 대신에 붓필을 쥐고 있을 게 분명하다. 또 그 끝에 미치광이 친구에게 등 뒤에서 총격을 당하는 것이다. 불쌍하지만 도리가 없다.
야스키치는 기어코 좁은 길을 따라 현관 앞 광장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전리품인 대포 두 정이 소나무나 조릿대 사이에 놓여 있다. 포신에 귀를 얹어 보니 어쩐지 숨이 통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포도 하품을 하는 걸지 모르겠다. 그는 대포 아래에 앉았다. 그러고는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차를 굴리는 모래 위에는 도마뱀 한 마리가 빛나고 있다. 인간은 다리가 잘리면 두 번 다시 다리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도마뱀은 꼬리를 잘라도 곧 다른 꼬리를 만들 수 있다. 야스키치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도마뱀은 분명 라마르크보다도 라마르키언임이 분명하다 생각했다. 한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도마뱀은 어느 틈엔가 모래에 뿌려진 한 줄기 중유로 바뀌어 버렸다.
야스키치는 자리서 일어섰다. 페인트칠된 교사를 따라 다시 한 번 정원 반대편으로 빠져 바다에 접한 운동장으로 나왔다. 흙이 붉은 테니스 코트에는 무관 교관 몇 명인가가 열심히 승부를 겨루고 있다. 코트 위 공간은 끝없이 무언가를 파열시키고 있다. 동시에 네트의 우나 좌로 희미한 하얀색의 직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저건 공의 궤적이 아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샴페인이 빠지는 것이다. 또 그 샴페인을 와이셔츠를 입은 신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다. 야스키치는 신들을 찬미하면서 이번에는 교사의 뒤뜰로 향했다.
뒤뜰에는 장미가 잔뜩 있다. 물론 꽃은 한 송이도 없다. 그는 그곳을 걸으며 길까지 나온 장미의 가지서 모충 한 마리를 발견했다. 또 옆의 잎 위에서도 다른 한 마리가 기고 있었다. 모충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야스키치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첫 번째 모충 이 교관은 언제 나비가 될까? 우리 증증증조부 때부터 땅만 기고 있잖아.
두 번째 모충 인간은 나비가 못 되는 거 아냐?
첫 번째 모충 아냐, 되는 사람은 되나 봐. 저기서도 날고 있잖아.
두 번째 모충 정말이네, 날고 있잖아. 그나저나 정말 추하다! 미의식이란 건 없는 사람인가 봐.
야스키치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로 머리 위로 나는 비행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동료 모습을 한 악마 한 명이 무언가 유쾌하다는 양 걸어왔다. 과거엔 연금술을 가르치던 악마도 이제는 학생들에게 응용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사람이 히죽히죽 웃으며 야스키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오늘 밤에 한 잔 할래?"
야스키치는 악마의 웃음 속에서 파우스트의 두 줄을 뼈저리게 느꼈다――"이론은 잿빛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그는 악마와 헤어진 후 교사 안으로 신발을 옮겼다. 교실은 모두 한적했다. 지나가며 들여다 보니 어떤 교실의 칠판 위에 기하학 그림이 하나씩 그리다 만 채로 있었다. 기하학 그림은 지워질 거라 생각한 걸까. 그가 본다는 걸 알자 바로 늘어나다 줄어들다 하며,
"다음 시간에 필요해요"하고 말했다.
야스키치는 내려가던 계단을 올라 어학과 수학 교관실로 들어갔다. 교관실에는 머리가 벗겨진 타운젠트 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이 노교사는 지루함을 풀기 위해 휘파람을 불며 홀로 댄스를 추고 있다. 야스키치는 작게 쓴웃음을 지은 채로 세면대 앞으로 가서 손을 씻었다. 그때 문득 거울을 보니 놀랍게도 타운젠트 씨는 어느 틈엔가 미소년으로 바뀌고 야스키치는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부끄러움
야스키치는 교실로 가기 전엔 반드시 교과서를 먼저 읽고 갔다. 그건 월급을 받고 있으니 엉망으로 수업할 수 없다는 의무심 때문은 아니었다. 교과서에는 학교 성질상 해상 용어가 잔뜩 나온다. 그런 걸 미리 알아두지 않으면 엄청난 오역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Cat's paw라기에 고양이 발인가 싶었더니 산들바람일 정도이다.
어느 날 그는 2학년 학생에게 역시나 항해를 다룬 짧은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지독한 악문이었다. 머스트에 바람이 몰아치고 해치에 파도가 쳐도, 이 파도나 바람은 문자를 조금도 띄어주지 못했다. 그는 학생에게 해석을 시키며 자신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만큼 학생을 상대로 사상 문제니 시사 문제를 논하고 싶단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본래 교사란 학문 이외의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는 법이다. 도덕, 취미, 인생관――어떻게 이름 붙여도 지장이 없다. 어찌 됐든 교과서나 칠판보다는 교사 자신의 심장에 가까운 걸 가르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생이란 학과 이외의 것은 무엇도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니,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아니다. 가르치려 드는 걸 혐오한다. 야스키치는 그렇게 믿기에 이때에도 지루하기 짝이 없게 해석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학생의 해석을 듣고 잘못을 고쳐주는 지루하지 않을 때마저 야스키치는 꽤나 귀찮아했다. 그는 한 시간의 수업 시간 중 삼십 분 가량이 지난 후 기어코 해석을 중단시켰다. 대신 이번에는 자신이 한 줄씩 읽고 해석했다. 교과서 안 항해는 여전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또 동시에 그의 가르침도 지지 않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무풍지대를 지나는 범선처럼 동사의 시제를 놓치거나 관계 대명사를 실수하는 등 띄엄띄엄 진행해 갔다.
그러는 사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미리 보고 온 부분은 이제 네다섯 줄밖에 남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면 해상 용어의 암초로 가득 찬 방심할 수 없는 거친 바다가 펼쳐진다. 그는 곁눈질로 시계를 보았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나팔까지 이십 분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되도록 정성스레 미리 봐온 네다섯 줄을 해석했다. 하지만 해석하고 보니 시곗바늘은 아직 3분 밖에 지나 있지 않았다.
야스키치는 절체절명이었다. 이 경우 유일한 활로는 학생의 질문을 받아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남으면 수업을 끝내면 됐다. 그는 교과서를 덮으며 "질문은――"하고 입을 열려다 대뜸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렇게나 붉어졌는가?――그건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학생은 물론 아무것도 모른 채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교과서를 들어 올리자마자 억지로 다음을 읽기 시작했다.
교과서 속 항해는 그 후로도 지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야스키치는 아직도 확신하고 있다. 태풍과 싸우는 범선보다도 더 가열차기 짝이 없었음을.
용맹한 수위
늦가을일까 초겨울일까. 그런 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찌 됐든 학교에 가면서 오버 코트를 입을 때였다. 점심 테이블에 앉으니 어떤 젊은 무관 교관이 옆에 앉은 야스키치에게 얼마 전에 있었던 불행 하나를 이야기해주었다――불과 2, 3일 전 심야. 철 도둑 두세 명이 학교 뒤편에 배를 대었다. 그런 걸 야간 순찰 중 발견한 수위가 홀몸으로 그들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격렬한 격투 끝에 바다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수위는 젖은 쥐 꼴을 한 채 겨우 기어 올라왔다. 물론 도둑의 배는 그동안 바다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긴지 오래였다.
"오오우라란 수위인데요. 정말 지독한 꼴을 당했죠."
무관은 빵을 먹으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오오우라는 야스키치도 알고 있었다. 수위는 몇 명인가가 교대로 문 옆의 초소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무관과 문관을 구분 않고 교관이 출입할 때마다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야스키치는 경례를 받는 것도 경례에 답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경례할 새를 주지 않기 위해 초소 옆을 지날 때는 특히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 오오우라란 수위만은 간단히 놓아주지 않는다. 첫 초소에 앉은 채로 문 안팎을 끊임 없이 주시하고 있다. 때문에 야스키치가 지나는 걸 보면 그 앞에 이르기도 전에 경례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래서야 숙명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야스키치는 기어코 체념했다. 아니, 체념한 것만이 아니다. 그쯤부턴 오오우라를 보자마자 방울뱀한테 노려지는 토끼처럼 먼저 모자를 벗고는 했다.
그런 사람이 도둑 때문에 바다에 던져졌다지 않은가. 야스키치는 조금 동정하면서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대여섯 날이 지나 야스키치는 정차장의 대기실의 우연히 오오우라를 발견했다. 오오우라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그런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자세를 고치고 엄격히 거수경례를 했다. 야스키치는 그의 뒤에 초소가 보이는 거 같았다.
"요전 번에――"
잠깐의 침묵 후 야스키치는 그렇게 운을 뗐다.
"네, 도둑을 잡다 놓쳐서요――"
"지독한 꼴을 봤다죠."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는데――"
오오우라는 쓴웃음을 지은 채로 스스로 비웃듯이 말을 이었다.
"뭐, 억지로 붙잡으려 했으면 한 명 정도는 잡았을 테죠. 하지만 잡아 본들 그게 전부이고――"
"전부라니요?"
"상여도 뭣도 없거든요. 도둑을 잡으면 어떻게 하라는 내용은 수위 규칙에 없으니까요――"
"순직하더라도요?"
"순직하더라도요."
야스키치는 힐끔 오오우라를 보았다. 오오우라의 말에 따르면 그는 꼭 용맹하게一목숨을 걸고 덤빈 건 아니다. 상여를 가산에 넣고 잡아야 할 도둑을 보내준 것이다. 하지만――야스키치는 담배를 꺼내면 되도록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래서야 바보 꼴이 되는군요. 모험을 해본들 손해만 보는 거니까요."
오오우라는 "하아"하고 말했다. 그런 주제에 별로 들 뜬 거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여를 준다고――"
야스키치는 살짝 우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을 준다고 누구라도 모험을 할까요?――그것도 또 조금 의문이군요."
오오우라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않았다. 하지만 야스키치가 입에 담배를 물자 불쑥 자신의 성냥을 문질러 그 불을 야스키치 앞으로 내밀었다. 야스키치는 붉게 나부끼는 불을 담배 끝으로 옮기며 저도 모르게 올라 온 미소를 들키지 않도록 입을 깨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요."
오오우라는 별 일 아니라는 말과 함께 성냥갑을 주머니로 되돌렸다. 하지만 야스키치는 오늘도 이 용맹한 수위의 비밀을 간파했다고 믿고 있다. 이 성냥불은 야스키치를 위해 붙은 게 아니다. 실은 오오우라의 무사도를 몰래 들여다보는 신을 위해 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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