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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눈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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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겨울날 오후. 나는 중앙선 기차의 창밖 너머로 산맥 하나를 바라보았다. 산맥은 물론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눈보다도 산맥의 피부에 가까운 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산맥을 바라보며 문득 어떤 작은 사건을 떠올렸다.


 벌써 4, 5년은 된 역시나 어느 겨울날 오후. 나는 어떤 친구의 작업실에서――허름한 철제 스토브 앞에서 친구나 그의 모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작업실에는 그의 유화 말고는 어떤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다. 담배를 물고 있던 단발 모델도――모델은 혼혈아 같은 일종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자연스레 자랄 속눈썹을 한 올도 남김없이 뽑고 있었다.
 대화는 어느 틈엔가 그쯤의 험악한 추위로 옮겨가 있었다. 친구는 정원의 흙이 어떻게 계절을 느끼는지 이야기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겨울을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를 말했다.
 "즉 정원의 흙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지."
 그는 파이프에 담배를 넣고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답 없이 향이 없는 커피를 홀짝였다. 하지만 그 말은 단발 모델에게 모종의 감명을 준 듯했다. 모델은 붉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자신이 뱉은 둥근 연기에 살짝 시선을 준다. 그렇게 역시나 공중을 올려다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피부도 똑같아. 나도 이 장사를 시작한 이후로 피부가 많이 거칠어졌거든……"

 어느 겨울날 오후. 나는 중앙선 기차의 창밖 너머로 산맥 하나를 바라보았다. 산맥은 물론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눈보다는 사람의 거칠어진 살갗에 가까운 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산맥을 바라보며 문득 그 모델을 떠올렸다. 속눈썹 한 올 없는, 혼혈아 같은 일본 아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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