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험담하는 게 아니다. 되려 변호해보려 한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작가로 구분되는 걸 보면 네가 변호할 필요는 없단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란 무엇이랴. 여러 사람이 제각기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는데 나는 프롤레타리아 문명이 낳은 문학으로 부르주아 문명이 낳은 부르주아 문학과 대비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엔 프롤레타리아 문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문명에 따라 만들어진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터이다. 그럼 달리 해당하는 게 없는가 하면, 같은 부르주아 문명이 낳은 문예 중 하나를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봐야 하리라. 그럼 같은 문명 아래에 있어도 작가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문학도 되고 부르주아 문학도 되는 셈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만든 게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작가의 존재 여부는 고찰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분류되는 그 버나드 쇼는 꽤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여 일본의 부르주아 작가보다도 더 부르주아적 생활을 보냈다. 대륙에는 비슷한 생활을 보내는 프롤레탈리아 문학가가 쇼 이외에도 많이 존재할 터이다. 그럼 작품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이 그려지느냐로 부르주아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구분해야 하는가. 이 또한 의문이다. 쇼의 작품 중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이 표면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나오는 인물 중 대부분은 부르주아 혹은 중산 계급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을 보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물이나 생활은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더라도 배후서 부르주아 생활의 붕괴가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부르주아 문학의 구별은 작가나 소재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작가의 태도로 결정되는 것이리라. 작가가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로 구분된다.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정신이 드러나지 않아도 아군인 작가가 쓴 건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다. 하지만 그렇게 흑과 백으로 나눌 수도 없는 일이다. 흑백 이외에 적이나 청도 있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반대하지 않는가 하면 아군도 아닌 중립적 입장도 존재한다. 또 이러한 입장은 부르주아 정신에도 마찬가지다. 또 문학 중 하이쿠 같은 건 작가가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찬동하더라도 구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정신을 고조할 수는 없다. 또 음악도 군가처럼 프롤레타리아 행진곡이라도 만들면 프롤레탈리아 음악처럼 받아들여지는데 그건 군가지 음악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예술에는 형식이나 본질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의 아군이 되어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런 면에서 자유로운 소설, 희곡에서도 연애를 중심으로 하면서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정신을 고조하는 건 어려운 것처럼 그 예술이 프롤레타리아 정신을 표현하지 않는다 해서 부르주아 예술이라 부르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때문에 명확히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반항하는 뜻을 보인 것만을 프롤레탈리아 문학과 대립시켜야 한다.
그럼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편드는 사람은 대략 둘로 나눠지지 싶다. 하나는 선전이 목적이다. 또 하나는 문예를 만드는 한 편으로 선전하는 것이다. 두 번째 분류에는 쇼의 작품이 속하지 싶다. 그럼 그 선전이란 무엇인가. 대다수의 사람은 제일 먼저 계급 투쟁의 정신을 드러내 싸우러 가게 하는 힘이 선전의 내용이자 목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사회는 굉장히 복잡하여 적당히 자본가와 프롤레탈리아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하나 예를 들어 보자. A라는 과자집과 B라는 단골의 관계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에 가까우나 그 A란 과자집은 C라는 제빵사에겐 자본가가 된다. 이렇게 소위 선전의 대조도 확실히 하지 않은 선전 때문에 폐를 보는 사람 중에는 자본가가 아닌 사람도 있다. 때문에 프롤레탈리아 문학은 무엇보다 먼저 뛰어나야 한다. 부족해서는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겉으로나 속으로나 선전을 주장하는 걸로 상상할 수 있듯이, 그들의 목적이 아무리 프롤레타리아의 천하를 장래하기 위한 계발적이고 일시적이란 거라도 장래엔 문학으로서 훌륭한 프롤레탈리아 문학이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은 그 받침대인 셈이다. 그렇기에 부족해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으리라 본다. 또 갖은 문예는 사멸할 수밖에 없다. 전통은 사라진다. 하지만 과거에 사멸한 문학도 당시에는 훌륭히 살아 있었던 것처럼 장래에 좋은 게 나올 거란 이유로 현재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부족함을 묵인할 수는 없다. 미래만 아니라 지금에도 좋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 나라는 인간은 금세 죽고 말 테지만 지금은 이렇게 살아 있다. 그야 견식이 뛰어난 사람이 보면 나는 살아 있는 듯해도 맛은 죽었을지 몰라도 어찌 됐든 내가 이렇게 살아 있듯이, 하나의 과도기에 만들어지는 산물이자 장래의 발판이 될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도 지금의 가슴에 두드리는 힘이 있어야 한다. 에술작품으로서 잘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사토 하루오 군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에는 생생한 실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 또한 우수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찾는 외침이었지 싶다.
문단서도 3, 4년 전부터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외침이 들리곤 하는데 내가 보기에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는 프롤레탈리아 문학은 아직 찾아 볼 수 없는 듯하다. 또 동시에 프롤레탈리아 문학은 이제까지 누구도 형태를 갖추지 못한 처녀지 같기도 하다. 우리 같은 현대의 작가 중 대다수가 소위 부르주아적이기에 앞으로 새로운 문학을 심으려는 신인은 프롤레탈리아 문학의 처녀지를 개척해야지 싶다. 좋은 건 좋은 것이다. 프롤레탈리아 문학의 완성을 나는 크게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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