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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점귀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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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우리 어머니는 미치광이였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께 어머니 다운 친근함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항상 머리를 위로 올린 채로 시바에 자리한 집에 홀로 앉아 긴 담뱃대로 뻐끔뻐끔 담배만 피웠다. 얼굴도 작을뿐더러 몸도 작다. 또 얼굴은 어떻게 된 건지 조금도 생기가 없는 회색을 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서상기를 읽고 토구에서 나는 악취란 말과 만났을 때 바로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마른 옆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어머니는 한 번도 나를 돌봐주신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의붓어머니와 일부러 2층까지 올라 가 인사를 했더니 대뜸 담뱃대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대개 조용한 미치광이였다. 나나 누나가 그림을 그려달라 다가가면 네 번 접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주셨다. 그릴 때 먹을 쓰는 법은 없었다. 우리 누나의 수채화 도구로 아이용 외출복이나 풀초의 꽃을 그려주고는 했다. 단지 그런 그림 속 인물은 하나같이 여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내가 열한 살일 적인 가을이었다. 병이 아니라 쇠약해져 죽은 것이리라. 그 죽음을 전후로 한 기억만큼은 의외로 똑똑히 남아 있다.
 위독하단 전보라도 온 걸 테지. 나는 어느 바람 없는 심야에 의붓어머니와 인력거를 타고 혼죠에서 시바까지 달려갔다. 나는 오늘까지도 목도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만큼은 남화의 산수인지가 그려진 얇은 비단 손수건을 두르고 있었던 걸 기억하고 있다. 또 그 손수건에선 '아야메 향수'란 향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2층 바로 아래의 여덟 첩 방에 누워 있었다. 나는 네 살 차이 나는 누나와 어머니의 머리맡에 앉아 끊임없이 울었다. 특히 누군가가 내 뒤에서 "임종하셨습니다"하고 말할 때에는 한 층 더 참을 수 없는 게 올라왔다. 하지만 이제까지 눈을 감고 있던 시체나 다를 바 없었던 우리 어머니는 대뜸 눈을 뜨더니 무언가 말을 하셨다. 우리 모두 슬픈 와중에도 작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나는 그다음 밤에도 어머니의 머리맡에서 새벽 가까이까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더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나는 우는소리가 거의 끊이지 않는 누나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열심히 우는 흉내를 했다. 동시에 내가 슬프지 않은 만큼 어머니가 죽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 믿었다.
 우리 어머니는 삼일째 밤에 거의 괴로움도 없이 죽어 갔다. 죽기 전에는 제정신을 되찾았는지 우리 얼굴을 보며 불쑥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평소처럼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납관을 끝낸 후에도 이따금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왕자의 숙모님"이라는 어느 먼 친척 할머니가 "정말로 기특하네요"하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묘한 일을 기특해하는 사람이구나 싶을 뿐이었다.
 우리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날, 우리 누나는 위패를 들고 나는 그 뒤에서 향로를 들고 인력거를 탔다. 나는 이따금 졸다가 놀라서 눈을 뜨는 박자에 자칫 향로를 떨어트릴 뻔했다. 하지만 야나카에는 좀처럼 이르지 못 했다. 꽤나 긴 장례식 행렬이 맑은 가을날의 도쿄에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 탓이다.
 우리 어머니 기일은 11월 28일이다. 또 계명은 귀명원묘승일진대자였다. 나는 그런 주제에 친아버지의 기일이나 계명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열한 살이었던 내게 기일이나 계명을 외우는 게 자랑거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누나 하나를 지녔다. 누나는 아픈 몸으로도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내 '점귀부[각주:1]'에 적고 싶은 건 물론 이 누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불쑥 요절한 누나를 말한다. 우리 세 남매 중에서도 가장 똑똑했다는 누나 말이다.
 누나가 하츠코라 불린 건 장녀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우리 집 불단에는 아직도 '하츠'의 사진 한 장이 작은 액자 안에 담겨 있다. 하츠는 조금도 약해 보이지 않다. 작은 보조개가 자리한 두 뺨도 잘 익은 살구처럼 동글동글하다………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를 가장 많이 받은 건 역시 '하츠'였다. '하츠'는 시바의 신제니자에서 일부러 츠키지의 섬머즈 부인 유치원인지에 다녔다. 하지만 주말 동안은 반드시 우리 어머니 집에――혼죠의 아쿠타가와 집안에서 머물렀다. '하츠'는 그런 외출 때마다 메이지 20년대에도 보기 드물었던 서양 옷을 입었으리라.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하츠'가 입던 옷의 옷감을 받아 고무 인형에 입힌 걸 기억하고 있다. 그 옷감은 하나같이 얇은 꽃이나 악기가 그려진 외국 캘리코 옷감뿐이었다.
 어느 봄의 일요일 오후, '하츠'는 정원을 걸으며 방에 있는 큰어머니께 말을 걸었다.(나는 물론 이때도 누나가 서양옷을 입고 있었다 상상하고 있다.)
 "큰엄마, 저 나무는 뭐야?"
 "어떤 나무?"
 "저기 봉오리 난 나무."
 어머니의 친정 정원에는 크지 않은 모과나무 한 그루가 우물에 가지를 뻗고 있었다. 머리를 내린 "하츠"는 아마 눈동자를 크게 뜬 채로 가지가 뾰족뾰족한 모과나무를 바라봤으리라.
 "이건 네 이름과 같은 나무란다."
 큰어머니의 농담은 아쉽게도 통용되지 않았다.
 "그럼 바보란 나무겠네."
 큰어머니는 '하츠'의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이 문답을 반복하고 있다. 사실 '하츠'의 이야기는 달리 남은 것도 없다. '하츠'는 그로부터 며칠도 지나지 않아 관에 들어갔으리라. 나는 작은 위패를 만든 '하츠'의 계명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츠'의 기일이 4월 5일이란 것만은 묘하게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어째서인지 이 누나에게――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누나에게 어떤 친밀함을 느끼고 있다. '하츠'는 지금도 살아 있다면 마흔이 넘었을 테지. 마흔이 넘은 '하츠'의 얼굴은 어쩌면 시바의 집 이층에서 멍하니 담배만 피우던 우리 어머니의 얼굴과 닮아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따금 환상처럼 우리 어머니도 누나도 아닌 마흔 가량의 여자 하나가 어디선가 내 평생을 지켜보는 걸 느낀다. 이건 커피나 담배에 지친 내 신경이 만들어내는 일일까? 아니면 모종의 기회로 현실 세계에 얼굴을 보이는 초자연적인 힘의 짓일까?
 


 나는 어머니가 발광한 탓에 태어나자마자 양부모 밑에서 자랐으니(양부모는 외가 큰아버지 부부셨다) 우리 아버지께도 냉담했다. 우리 아버지는 우유 가게를 하셨고 작게 성공을 이루셨다. 내게 당시엔 새로웠던 과일이나 음료를 가르쳐주신 건 전부 우리 아버지셨다. 바나나, 아이스크림, 파인애플, 럼주――또 그 외에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당시 신주쿠에 있던 목장 바깥의 떡갈나무 잎에 럼주를 마신 걸 기억하고 있다. 럼주는 굉장히 알콜이 적은 오렌지색 음료수였다.
 우리 아버지는 내게 이런 보기 드문 걸 권하여 양가에서 나를 되찾으려 했다. 아버지는 하루는 오오모리의 생선가게서 내게 아이스크림을 권하며 노골적으로 집으로 도망쳐 오라며 꼬드긴 적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럴 때면 굉장히 교묘한 말을 쓰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권유는 한 번도 효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건 내가 양부모를――특히 큰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또 성질이 급하셔서 번번이 싸움을 하셨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와 스모를 하여 내가 잘 쓰는 발다리후리기로 아버지를 쓰러트렸다. 아버지는 일어나자마자 "다시 한 번"이라고 말하며 내게 덤비셨다. 나는 어려움 없이 다시 던졌다. 아버지는 또 "다시 한 번"하고 말씀하시며 얼굴색을 바꾸어 달려드셨다. 이 스모를 보고 있던 우리 이모――어머니의 여동생이자 아버지의 후처였던 이모는 두세 번 내게 눈을 껌뻑여 보였다. 나는 아버지와 아둥바둥하던 끝에 일부러 거창하게 넘어졌다. 만약 그때 지지 않았다면 우리 아버지는 내게도 드잡이질을 하셨을 게 분명했다.
 내가 스물여덟일 적――아직 교사를 하던 적에 "아버지 입원"이란 전보를 받아 황급히 카마쿠라에서 도쿄로 향했다. 우리 아버지는 인플루엔자 때문에 도쿄 병원에 입원하셨다. 나는 이래저래 삼 일 동안 큰어머니나 이모와 함께 병실 구석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는 사이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와 친하게 지내던 어떤 아일랜드 신문기자 한 명에 츠키지의 어떤 식당으로 밥 먹으러 오라는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 신문기자가 가까이 온 걸 구실로 삼아 죽기 직전인 아버지를 남긴 채로 츠키지의 어떤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는 네다섯 명의 게이샤와 함께 유쾌하게 일본풍 식사를 했다. 식사는 분명 열 시 가량에 끝이 났다. 나는 신문기사를 남긴 채로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뒤에서 "저기요"하고 누가 나를 불렀다. 나는 중단에 발을 걸친 채로 위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게이샤 한 명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계단서 내려 현관 바깥의 택시를 탔다. 택시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보다도 생생한 서양풍 머리를 한 그녀의 얼굴을――특히 그녀의 눈을 생각했다.
 내가 병원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뿐 아니라 두 장짜리 병풍 이외엔 사람을 물린 채 내 손을 잡고 쓰다듬으며 내가 모르는 옛날이야기를――어머니와 결혼한 당시의 이야기를 했다. 그건 우리 어머니와 둘이서 서랍을 샀다던가 초밥을 먹었다던가 하는 별 대단치 낳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이 어느 틈엔가 눈꺼풀이 뜨거워져 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살이 빠진 뺨에 역시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다음 날 아침 큰 괴로움 없이 돌아가셨다. 죽기 직전에는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깃발을 단 군함이 저렇게나 왔구나. 다들 만세를 하거라"하는 소리를 했다.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우리 아버지의 시체를 병원에서 집으로 옮길 때에 큼지막한 봄 달 하나가 우리 아버지의 영구차 위를 비춰준 걸 기억하고 있다.
 


 나는 올해 삼월 중순에 손난로를 넣은 채 오랜만에 아내와 묘를 찾았다. 오랜만에――하지만 작은 묘는 물론이요 묘 위에 가지를 뻗은 한 그루 적송도 달라진 게 없었다.
 "점귀부"에 실린 세 사람은 모두 야나카의 묘지 구석에――심지어 같은 돌비석 아래에 그들의 뼈를 묻고 있었다. 나는 이 묘 아래에 조용히 우리 어머니의 관히 묻혔을 때를 떠올렸다. 그건 '하츠'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단지 우리 아버지만큼은――아버지는 아버지의 뼈가 하얗게 가루난 와중에 금니가 섞여 있던 걸 기억하고 있다………
 나는 묘를 찾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잊을 수 있다면 우리 부모님도 누나도 잊고 싶다. 하지만 특히 그날만은 육체적으로 약해져 있던 탓인지, 봄의 오후 햇살 속에서 검게 때가 탄 석탑을 바라보며 그들 중 누가 행복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루살이야 무덤의 바깥에서 살아가거라

 나는 이때만큼 죠소의 심정이 밀려 오는 걸 느껴 본 적이 없었다.

 

 

 

 

  1. 죽은 사람의 성명(姓名)을 기록(記錄)하는 장부(帳簿)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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