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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가사키 작품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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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컴컴한 유리 찬장 안. 그림, 도자기, 당피, 갱묘, 상아조각, 주금 등등 여러 나라의 사료가 빼곡히 놓여 있다. 초여름 오후. 멀리서 차르멜라의 소리가 들린다.
 긴 침묵 후, 시바 코우칸이 그린 네덜란드인, 대뜸 슬픈 탄식을 내쉰다.
 코이마리 찻잔에 그려진 카피탄, (네덜란드 인을 보면서) 왜 그런가? 얼굴색이 안 좋은데――
 네덜란드인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금 두통이 있어서――

 카피탄   오늘은 묘하게 푹푹 찌니 말이야.

 당피 꽃 사이에 멈춰 선 앵무 (옆에서 카피탄에게)거짓말이에요 카피탄! 저 사람은 두통 같은 게 아니에요.

 카피탄   두통이 아니라니?

 앵무    사랑인 거죠.

 네덜란드인 (앵무를 위협하며) 괜한 말하지 마!

 카피탄   (네덜란드인에게) 가만히 있어보게. (앵무에게) 그래서, 누구에게 반했단 건가?

 앵무    저 여자요. 왜, 저기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접시 속에 있는――

 카피탄   항상 부채를 들고 있는 여자 말인가?

 앵무    네, 저 여자지요. 저 여자는 얼굴은 이쁘지만 기고만장하니까요.

 네덜란드 (다시 앵무를 위협하며) 이 녀석, 쓸데 없는 소리 말아라!

 카피탄   그러냐? 그거 참 유감이구나. (금상감으로 된 작은 반천련에게) 어떻게 보십니까? 신부님!

 반천련   글쎄, 혼례는 내가 봐줘도 좋다만――네덜란드 출신이니까 저 여자의 건방짐은 유명하지.

 네덜란드인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여차하면 저 화승총에게 심장을 뚫어 달라 할 거니까요.

 화승총   (유감이라는 양) 힘들 거야. 난 녹슬어 버렸으니까――사벨식 일본도한테 부탁하지 그래?

 상아 조각 그리스도 (자단의 십자가 위에 팔을 펼치며) 무분별하게 말하면 쓰나. 평소에 말한 것처럼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마리아관음에게) 어머니! 어떻게 해주실 수 없습니까?

 마리아관음 그렇구나. 그럼 내가 부탁해볼까?

 반천련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피탄   힘이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네덜란드인에게) 자네도 어머니께 부탁해보게.

 네덜란드인 (부끄러운 듯이) 부탁드립니다.

 앵무    자비로운 마리아 님!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리아관음 (네덜란드 접시에 그려진 여인에게) 저기요!

 네덜란드 여자 무슨 일이시죠?

 마리아관음 실은 이 젊은 분이 당신을 연모한다는데――

 네덜란드 여자 어머 불쾌하네요. 저는 저분이 정말로 싫습니다.

 마리아관음 하지만 마를 정도로 고민하고 계시니까――

 네덜란드 여자 그건 저분이 멋대로 고민하는 거죠? 애당초 저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분을 좋아하지 않아요.

 마리아관음 그런 말씀 마세요. 저분도 당신처럼 서양 문명의 생명을 가슴에 품고 있는걸요. 말하자면 형제 같은 거 아닐까요? 부디 저희 모자도 부탁드릴 테니 조금은 불쌍히 여겨주세요.

 네덜란드 여자 (성을 내며) 쓸데없는 말 마세요. 애당초 당신도 히라도 근방의 촌 출신 아닌가요? 유리그림이니 분수니 장미꽃이니 벽에 거는 커튼――그런 건 보지도 못 하셨겠죠. 얼굴도 우리나라의 성모 마리아하고는 딴판이고요. 하물며 저분을 보세요. 확실히 저분도 이 나라선 네덜란드인일지 모르죠. 하지만 사실은 네덜란드는 고사하고 일본인도 서양인도 아닌, 즉 이 나라 그림에만 존재하는 흑인보다도 꺼림칙한 사람이죠.

 네덜란드인 아아, 정말로 한심한 일이야!(울음을 터트린다.)

 네덜란드 여자 (여전히 화가 사그라들지 않는지) 그런 사람이 저를 연모한다니――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하물며 저분의 일가일족――나가사키 그림에 나오는 서양인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에요.

 나가사키 그림에 나오는 영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들 (놀라서) 아니!

 마리아관음 그럼 저분하고 절대 친하게 지낼 수 없다 이건가요?

 네덜란드 여자 당연하죠. 저는 오늘부로 당신하고도 어울리고 싶지 않네요. 코이마리의 카피탄, 자그마한 반천련, 카메야마야키의 남만 여자――아뇨아뇨, 그뿐일까요. 칼밑동에 새겨진 천사마저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말아주세요. 저 사람들과 저는 출신도 자란 환경도 다르니까요――

 마리아관음 (네덜란드인에게) 들으셨죠? 제 말마저 통하지 않으니 당신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어요.

 네덜란드인 (울면서) 네, 이제 도리가 없지요.

 카피탄   남자답게 포기해라. (카메야마야키 남만 여자에게) 그나저나 지독한 여자구만.

 남만여자  정말로 오만한 사람이네요――됐어요. 앞으론 제가 저 여자 대신에 저분을 돌볼 테니까요.

 반천련   정말 상냥한 사람이야.

 그리스도  조용히! 조용히! 사람이 온 모양입니다――

 앵무    쉿! 쉿!

 집주인, 몇몇 손님과 함께 찬장 앞에 선다.
 주인    이게 제 컬렉션입니다.

 손님    꽤나 많이 모으셨군요. 이 코우칸의 네덜란드인은 재밌군요.

 주인    거기 있는 건 카메야마야키입니다. 이건 제가 아끼는 건데――

 손님    남만 여자군요. 네덜란드 접시에 그려진 여자보다 훨씬 미인 같은데요?

 주인    이거 말인가요? (네덜란드 여자가 그려진 접시를 꺼낸다) 어라? 어째 젖어 있는데――

 손님    설마 네덜란드 여자가 운 것도 아닐 테지요.

 다른 손님  또 모르죠? 험담을 하는 게 분해서 우는 걸지(웃는다).

 손님    일본에서 만든 남만 물건서는 서양에서 만든 물건보다 독특한 맛이 있지요.

 주인    그런 게 일본이지요.

 손님    맞습니다. 거기서 오늘의 문명도 만들어진 거니까요. 장래엔 더 대단한 게 만들어질 겁니다.

 다른 손님  이 네덜란드인이나 남만 여자도 기분이 좋겠군요――어라!

 주인    왜 그러십니까?

 다른 손님  어쩐지 이 그리스도가 웃는 거 같아서요.

 손님    저는 마리아관음이 웃는 것처럼 보였네요.

 주인    잘못본 거겠지요.

 주인과 손님이 조용히 유리 선반 앞을 떠난다. 다시 조용히 들리는 차르멜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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