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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동물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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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

 코끼리여. 키플링은 과거에 네 선조가 악어에게 코를 물려 너까지 코를 길게 늘어 틀이며 걷고 있다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네 선조는 부처가 살아 있을 적에 분명 갠지스강의 등심초 속에서 낮잠을 잤던 것이다. 그러자 강의 진흙에 숨어 있던 한없이 큰 거머리가 아직 짧았던 네 선조 코에 빨려 들어가 버린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 코가 이만큼 큰 거머리처럼 길게 뻗거나 짧게 줄어들지 않을 테지. 코끼리여. 너는 인도의 명문에서 태어났다. 부디 내 말처럼 그 키플링의 설 따위는 입에서 되는 대로 나온 헛소리라고 선조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코를 들고 나팔 같은 소리를 내다오.

     황새

 저 목을 넥타이처럼 묶어버리면 저 녀석은 대체 어떻게 풀려 들까.

     낙타

 할아버지. 만년청 손질은 끝나셨나요. 그럼 한 잔 드시지요. 어라, 그 창포초 담배 상자는 어디에 두셨습니까?

     호랑이

 호랑이여, 너는 코스모폴리탄이다. 풍간 선사를 태운 너. 정성공 와토나이의 손에 죽은 너. 그리고 윌리엄 브레이크의 유명한 시에 나오는 너. 호랑이야, 너는 최대의 코스모폴리탄이다.

     집오리

 아이가 검은 판에 백막으로 장난스레 쓴 산수용 숫자. 2, 2, 2, 2, 2, 2.

     백공작

 이 녀석은 나이 먹은 귀부인이다. 눈이 살짝 붉게 촉촉해져 있다. 등껍질 테로 만든 안경을 들고 구경꾼을 하나씩 보면 된다.

     큰박쥐

 네 날개는 닛키 단죠의 병이다. 앞뒤로 세워진 촛불 정도는 날개짓 한 번에 꺼져 갈 테지. 그러면 코가 뾰족하고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삐쭉거린 얼굴이 어두컴컴한 키라즈리를 뒤로하여 꺼림칙하게 떠오르리라. 낙관은 토슈샤이 샤라쿠……

     캥거루

 뱃속 주머니에는 아이 한 마리가 담겨 있다. 저걸 내버리면 혹여 영국 국기 같은 게 마술처럼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앵무

 너는 오래된 당화 복숭아 가지에 가만히 멈춰 있어라. 그만 날개짓하면 몸의 물감이 벗겨지고 말 테니까.

     원숭이

 원숭이여, 너는 대체 우는 거냐 웃는 거냐. 네 얼굴은 비극인 듯 또 동시에 희극만 같다. 내 기억은 엔니치의 원숭이극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벚꽃 츠리이타, 하리코 종, 또 아세틸렌 가스의 신경질적인 빛. 너는 금색 종이로 만든 에보시를 쓰고 히가노코의 소매를 휘두르며 참으로 아이러니한 시라뵤시 하나코역을 맡았다.  내 가슴에 처음으로 의심이 서린 건 시라뵤시를 추는 네 얼굴에 우연찮게 시선이 갔을 때였다. 너는 대체 우는 거냐 웃는 거냐. 원숭이여,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원숭이여. 나는 너만큼 교묘한 트래직 코미디언을 본 적이 없다――내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원숭이는 대뜸 몸을 날려 내 앞의 그물망에 매달리더니 귀에 거슬리는 높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의 그 찌푸린 얼굴은?"

     도롱뇽

 내가 말야, 너는 대체 뭐냐고 머리를 향해 물으니 저는 도롱뇽이에요 하고 꼬리가 나한테 대답했다니까.

     학

 현 제일 여관의 현관, 작약과 소나무가 자란 꽃병, 이토 히로부미의 글자가 담긴 액자, 그리고 너희의 박제……

     여우

 잘도 자는구나. 이 목도리 같은 것.

     원앙

 고운 눈이 쌓인 버들. 은분으로 검게 탄 물. 그 위에 떠오른 극채색의 너희 부부――너희를 그린 건 이토 쟈쿠츄다.

     사슴

 이 훌륭한 칼걸이에는 해바라기 문양의 도와 와키자시라도 걸어 두면 되겠지.

     페르시안 고양이

 햇살, 말리화 냄새, 노란 비단옷, Fleurs du Mal, 그리고 너희의 촉감……

     앵무

 로쿠메이칸에서는 오늘도 무도회가 열린다. 제등의 빛, 하얀 국화꽃, 너는 로티와 함께 춤춘 아름다운 "미야고니치"의 아가씨다.

     일본개

 조화 버들에 밝은 달이 오른다. 너는 단지 멀리서 으르렁거리면 된다.


     난쿄쥐

 웃옷은 하얀 벌벳, 눈은 석류돌, 또 장갑은 복숭아색 수자――너희는 모두 귀여운 중국 미인과 똑 닮았다. 후궁의 아름다운 삼천 명이라 하면 나는 항상 너희가 겹쳐진 누각 안에 둥지를 튼 걸 상상한다. 서시가 감자 껍질을 베어 먹고 있는가 하면 양귀비는 열심히 바퀴를 굴리고 있지 않은가.

     성성

 저 성성의 코 위에는 금테두리의 Pince-nez가 걸려 있다. 저게 자네로 보이나? 만약 보이지 않는다면 오늘 부로 시 쓰는 건 그만두게나.

     백로

 상서의 강촌은 어둡게 저물어 있었다. 남색 버들, 남색 다리, 남색 초가집, 남색 물, 남색 어부, 남색 갈대――모든 게 살짝 어두운 남색의 밑바닥에 저물었을 때, 곧 아무렇지 않게 날아 오른 너희 세 마리의 날개색――접시 바깥까지도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이련만.

     하마

 일어서다. 양무제, 달마 대사에게 묻는다. 이런저런 불법. 달마 말하다. 물속의 하마.

     펭귄

 너는 영세 고용인이다. 슬픈 네 눈동자 속에는 이전에 근무하던 호텔의 대식당이 지금도 Aurora australis처럼 눈부신 과거의 환상을 띄우고 있지 않은가?

     말

 늦가울 바람이 부는 거리 구석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네게 올라탄 역시나 청동으로 만든 나리가 추워 보이는 거리의 남녀노소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그리고 나리의 군복 가슴가에는 외람되게도 까마귀의 하얀 똥이……

     부엉이

 Brocken산으로! 빗자루에 걸터앉은 할머니가 붉은 달이 뜬 하늘을 향해 굴뚝에서 똑바로 날아오른다. 그 뒤에서 한 마리 부엉이가――아니, 이건 할머니가 기르던 고양이가 어느 틈엔가 날개를 자란 걸지도 모르겠다.

     금붕어

 희미한 햇살이 드리우면 마름에 찾아온 가을도 눈에 띄었다. 나는――곳곳의 비늘이 벗겨진 금붕어는 이윽고 이 차가운 물 위에 주검을 띄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마지막 날까지는 역시 끝이 잘린 꼬리를 흔들며 그 멋쟁이 브루멜처럼 유유히 헤엄치고 싶다.

     토끼

 콘쟈쿠 모노가타리 5권. 삼수행보살도토소신어란 Jātaka 안에 이런 너의 초상화가 있다――"토끼는 격려의 마음을 들게 하며……귀는 높게 굽어져 있으며 눈은 크고 앞다리가 짧으며 엉덩이 구멍은 크게 열려 있다. 동서남북을 활보할 수만 있다면 더 바라는 게 없다……"


     참새

 이건 남화다. 쓸쓸히 나부끼는 대나무 위에 사라질 거 같은 네가 올라타 있다. 검은 글자를 읽어 보면 대명방외지인이라 적혀 있다.

     사향수

 붉은발 안에서 오늘도 홀로 잠든 음부반금련의 요염한 꿈.

     수달

 매일 밤 복도에 두는 남은 주방 재료가 사라져요. 수달이 가져간다나요. 어젯밤도 배로 돌아오는 손님의 제등 불이 꺼져버렸죠.

     흑표

 너는 이빨이 아름다운 Black Mary다. 난킨타마 목장식이나 털실 어깨걸이를 가지고 가면 분명 갸르릉거리며 기뻐하리라. 

     해오라기

 비가 그친 후의 버들 내음이 강가를 메우던 때였다. 너는 그 버들 끝자락에 홀로 멈추어 있었다. 그때 "저녁 노을, 저녁 하늘, 내일도 맑아라."――그런 노래를 하며 지나간 어릴 적의 나를 기억하는가?

     다람쥐

 아오도 덴젠의 동판화 숲이 시대가 내려앉은 옅은 빛 속에 두꺼운 가지와 가지를 교차하고 있다. 그 가지 위에 앉은 우스울 정도로 슬픈 너의 눈초리……

     까마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 대나무숲은 바람이 불면 소란스럽기 짝이 없답니다." "네, 그런 데다가 달이 뜨는 밤은 더욱 진정이 안 되지요――그런데 은망굴은 어떠셨나요?" "은망굴인가요? 거기는 오늘도 여전히 문에 얻어 맞은 시체가 있었지요." "아, 그 여자의 시쳇말인가요. 어라, 당신 부리에는 머리털 몇 개가 걸려 있군요."

     기린

 이건 장난감이다. 노란 물감이나 검은 물감 같은 게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질척질척 발라져 있다. 물론 인간 아이의 장난감치고는 너무 큰 걸지도 모른다. 분명 애늙은이 같은 어린 그리스도의 장난감으로는 딱일 테지.

     카나리아

 이발소에는 아침해가 선명히 들어와 만년청 화분을 씻어주고 있다. 가위 소리, 물소리, 신문지 펼치는 소리――그런 소리에 뒤섞이는 건 새장을 한가득 날아다니는 너희의 울음소리――누구니, 지금 주인장한테 인사한 신참은?

     양

 어느 날 나는 우리의 양에게 여러 책을 먹여주었다. 성서, Une Vie, 당시선――양은 무엇이든 먹었다. 하지만 그 중 단 하나, 아무리 코 앞에 내밀어도 먹지 않는 책이 있다 싶었더니 그건 내 책이었다. 두고 보자, 면세공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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