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은 기관차 흉내를 내고 있다. 물론 정차한 기관차는 아니다. 손을 휘젓고, "칙칙폭폭"하고 말하는 등 진행 중인 기관차 흉내를 내고 있다. 꼭 우리 아이들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리라. 그럼 왜 기관차 흉내를 내는가? 물론 기관차에게 모종의 위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 본인 또한 기관차처럼 격한 생명을 지니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요구를 지닌 건 아이들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어른들 또한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어른들의 기관차란 말 그대로의 기관차가 아니다. 하지만 제각기 돌진하고 심지어 궤도 위를 달리는 것 또한 역시 기관차와 마찬가지다. 이 궤도란 금전이기도 하고, 혹은 명예기도 하며, 마지막으로 여인이기도 하리라. 우리는 어른 아이를 구분 않고 자유에 돌진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그런 욕망을 지녔기에 스스로 자유를 내려놓는다. 이것은 조금도 역설이 아니다. 역설적인 인생의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들 안에 담긴 무수한 선조들이나 한 시대의 한 나라의 사회적 약속은 다소 그런 요구에 맞물리고는 한다. 하지만 그런 요구는 고대 이후로 우리의 안에 숨죽이고 있다.
나는 높은 둑 위에 서서 아이들과 기관차가 달리는 걸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둑 위에는 또 다른 둑이 있는데, 그곳에는 괘나 시들시들한 모밀잣밤 나무 한 그루가 기울어져 있었다. 저 기관차――3271호는 무솔리니이다. 무솔리니가 달리는 궤도는 빛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 하지만 어떤 궤도에나 끝자락엔 단 한 번도 기관차를 태우지 못 하는 녹슨 두세 척이 있는 걸 생각하면 무솔리니의 일생 또한 아마 우리의 일생처럼 늙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없이 돌진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동시에 궤도를 달리고 있다. 이 모순은 적당히 두고 볼 수 없다. 우리의 비극이란 그야말로 이 점에서 발생한다. 맥베스는 물론 코하루 지헤 역시 기관차이다. 코하루는 맥베스처럼 강한 성격을 지니지 못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연애를 위해 역시나 무작정 돌진하고 있다.(서양인들의 비극론은 불행히도 여기선 통용되지 않는다. 비극을 만드는 건 인생이다. 미학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비극을 제3자의 눈으로 옮기면 갖은 동기가 또렷이 드러나지 않기에(갖은 동기를 또렷이 하는 건 극중 인물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을지 모른다.) 무작정 돌진하고, 어쩌다 정지하고――혹은 전복하는 걸 보았을 따름이다. 그러니 희극이 되어버리고 만다. 즉 희극은 제3자의 동정이 투과되지 않은 비극이다. 우리는 필시 크고 작음을 구분치 않고 하나 같이 기관차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저 고풍스러운 기관차――굴뚝이 높은 3236호에서 나 자신을 느끼고 있다. 트랜스 테이블 위에 올라 천천히 위치를 바꾸는 3236호에.
하지만 한 시대 한 나라의 사회나 우리의 선조는 그런 기관차와 얼마나 맞물려 있는가? 나는 그곳에서 정체를 느기는 동시에 엔진을――석탄을――불타는 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 본인이 아니다. 사실은 역시 기관차처럼 긴 역사를 거듭해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피스톤이나 톱니바퀴를 모으고 있다. 심지어 우리를 달리게 하는 궤도는 기관차가 알지 못 하듯이 우리 또한 알지 못 한다. 이 궤도도 아마 터널이나 철교를 지날 때가 있으리라. 갖은 해방은 이 궤도를 탓에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엄금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두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실과 다르지 않은 건 분명하다.
만약 기관차만 확실하다면――그마저도 기관차의 자유가 아니다. 어떤 기관사를 어떤 기관차에 얹는지는 변덕스러운 신들의 의지이다. 단지 대부분의 기관차는 전부 녹슬 때까지 달리는 걸 단념하지 않는다. 갖은 기간촤의 외견상 장엄함은 그렇게 빛나고 있으리라. 마치 기름을 바른 철처럼.
우리는 하나 같이 기관차이다. 우리의 역할은 하늘에 연기나 불을 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둑 아래를 걷는 사람들 또한 이 연기나 불 덕에 기관차가 달리고 있음을 알리라. 혹은 이미 달려 간 기관차가 있는 걸 알리라. 만약 전기 기관차라면 안개나 불은 그 울림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사람은 전무, 일은 전부"란 플로베르의 말은 때문에 나를 움직이게 했다. 종교인, 예술인, 사회운동가――갖은 기관차는 그들의 궤도를 따라 반드시 어딘가로 돌진해야만 한다. 좀 더 빠르게――그 외에 그들이 할 일은 없다.
기관차를 볼 때마다 스스로를 느끼는 게 꼭 나에게만 한정된 일은 아니다. 사이토 료쿠는 하코네 산을 넘는 기관차가 "이 산은 뭐냐, 이 산은 뭐냐"고 외친 걸 기록했다. 하지만 우스이 고개를 내려가는 기관차는 환희로 가득 차 있었으리라. 그는 항상 가볍게 "타카보코 타카유키 타카보코 타카유키"하고 노래했다. 전자가 비극적 기관차라면 후자는 희극적 기관차일지 모른다.
'고전 번역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면' 사람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3 |
---|---|
형 같은 느낌 ――키쿠치 칸 씨의 인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3 |
헛소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3 |
이른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3 |
한 마디?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