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른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2. 23.
728x90
반응형
SMALL

 대학생 나카무라는 얄팍한 봄철 오버코트 아래로 자신의 체온을 느끼며 어두컴컴한 돌계단을 올라 박물관 2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가면 파충류 표본실이 나왔다. 나카무라는 그 안에 들어가기 전에 금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손목시계 바늘은 다행이 아직 두 시를 가리키지 않았다. 의외로 늦지 않았다――나카무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안도하기 보다는 손해를 본 느낌이 들었다.
 파충류 표본실은 고요했다. 간수마저 오늘은 걸어 다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희미한 방충제향만이 풍겼다. 나카무라는 실내를 돌아본 후, 심호흡하듯이 기지개를 폈다. 그러고는 커다란 유리 선반 안에서 두터운 썩은 가지를 휘감고 있는 남쪽 나라의 뱀 앞에 섰다. 이 파충류 표본실은 대략 작년 여름부터 미에코와 만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딱히 두 사람의 취향이 병적이었던 건 아니다. 단지 주위 시선을 피하기 위해 도리 없이 이곳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공원, 카페, 전철역――하나같이 소심한 그들에게는 당혹감만 줄 뿐이었다. 특히 이제 막 성인이 된 미에코에겐 당혹 이상이었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의 등에 모이는 걸 느꼈다. 아니, 두 사람의 심장마저 사람들 앞에 또렷이 드러나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 표본실에 오면 박제된 뱀이나 도마뱀 말고는 아무도 둘을 보지 않았다. 이따금 간수나 관람객과 마주해도 고작 몇 초 동안 뚫어져라 보고 말 따름이었다.
 만나는 시간은 두 시였다. 손목시계 바늘이 어느 틈엔가 두 시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마저 10분이나 기다리게 하지는 않겠지――나카무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파충류 표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가슴은 기쁘게 뒤지 않았다. 되려 모종의 의무에 대한 체념 따위로 충만했다. 그 또한 갖은 남성처럼 미에코에게 권태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하지만 권태를 느끼기 위해서는 같은 걸 접해야만 한다. 오늘의 미에코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의 미에코와 전혀 달랐다. 어제의 미에코는――야마노테선 전차 안에서 그와 목례만 나눈 미에코는 참으로 정숙한 여학생이었다. 아니, 처음으로 그와 같이 이노카시라 공원을 산책했던 미에코 또한 어딘가에 상냥함과 쓸쓸함을 두르고 있었다.
 나카무라는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보았다. 두 시 오 분을 지나 있다. 그는 살짝 망설인 후 반대편 조류 표본실로 향했다. 카나리아, 금계, 봉작――아름다운 크고 작은 박제새는 유리 너머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미에코도 이런 새처럼 형태만 남은 채 혼의 아름다움을 잃고 말았다.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미에코는 요전 번에 만났을 때 츄잉 껌을 씹고 있었다. 그전에 만났을 때에도 오페라 노래만 불렀다. 특히 그를 놀라게 한 건 한 달 정도 전에 만난 미에코였다. 미에코는 한참을 장난을 치더니 풋볼이랍시고 베개를 천장을 향해 걷어 차올렸다.
 손목시계는 두 시 십오 분을 가리킨다. 나카무라는 한숨을 내쉬며 파충류 표본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미에코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마음이 편해져 눈앞의 큰 도마뱀에게 '실례'를 했다. 큰 도마뱀은 메이지 몇 년인가 이후로 영원히 작은 뱀을 물고 있다. 영원히――하지만 그는 영원하지 않다. 손목시계가 두 시 반이 되면 바로 박물관을 나설 생각이었다.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하지만 료다이시마에에 자리한 나무는 어두운 하늘을 투과하는 나뭇가지에 붉은 봉우리를 두르고 있다. 이런 공원을 산책하는 게 미에코와 어딘가로 외출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할지 모른다.
 두 시 이십 분! 이제 십 분만 기다리면 된다. 그는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누르며 표본실 안을 둘러본다. 열대 밀림을 잃은 도마뱀이나 뱀의 표본은 묘한 덧없음을 풍기고 있다. 어쩌면 이건 상징일지 모른다. 어느 틈엔가 정열을 잃은 그의 연애의 상징일지 모른다. 그는 미에코에게 충실했다. 하지만 미에코는 반 년 사이에 조금도 익숙하지 않은 불량소녀가 되어버렸다. 그가 정열을 잃은 건 전적으로 미에코의 책임이다. 적어도 환멸의 결과이다. 결코 권태의 결과는 아니었다.
 나카무라는 두 시 반이 되자마자 파충류 표본실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현관에 이르기 전에 빙글 발걸음을 돌렸다. 어쩌면 미에코가 엇갈려 이 방에 들어올지 모른다. 그래서야 미에코에게 미안해진다. 미안?――아니, 미안하지는 않다. 그는 미에코를 동정하기보다도 스스로의 의무감에 고민하고 있다. 이 의무감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십 분 가량 기다려야 한다. 무얼, 미에코는 반드시 오지 않는다.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오늘의 오후는 유쾌하게 홀로 지낼 수 있을 터이다.
 파충류 표본실은 여전히 고요했다. 간수마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희미한 방충제향만이 풍겼다. 나카무라는 점점 스스로에게 어떤 짜증을 느꼈다. 미에코는 필시 불량소녀이다. 하지만 그의 연애는 조금도 식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는 진작에 박물관 밖을 걸었으리라. 물론 정열을 잃었다손 쳐도 욕망은 남아 있을 터이다. 욕망?――하지만 욕망이 아니다. 그는 새삼 돌아보니 확실히 미에코를 사랑하고 있었다. 미에코는 베개를 걷어차 올렸다. 하지만 그 발색은 하얀 걸로 모자라 발가락을 부드럽게 굽히고 있었다. 특히 그때 들은 웃음소리는――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린 미에코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두 시 사십 분.
 두 시 사십오 분.
 세 시.
 세 시 오 분.
 세 시 십 분이 되었을 때이다. 나카무라는 봄철 오버코트 아래에서 스며드는 듯한 추위를 느끼며 인기척 없는 파충류 표본실을 뒤로해 돌계단을 내렸다. 항상 해질녘처럼 어두컴컴한 돌계단을.
       ×          ×          ×

 전등에 불이 들어올 시각, 그날도 나카무라는 한 카페 구석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친구는 호리카와라 하여 소설가 지망생인 대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한 잔의 홍차를 앞에 두고 자동차의 미적 가치를 논하거나 폴 세잔의 경제적 가치를 논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지친 후, 나카무라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마치 남일처럼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내가 멍청한 걸까."
 이야기를 마친 나카무라는 하찮다는 양 이렇게 덧붙였다.
 "흥, 멍청하다고 말하는 게 제일 멍청한 짓이지."
 호리카와는 간단히 냉소했다. 그러고는 마치 낭독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돌아갔어. 파충류 표본실은 텅 비었고. 그때――시간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 고작해야 세 시 십오 분 정도일까? 그때 얼굴이 창백히 질린 여학생 하나가 들어와. 물론 간수도 아무도 없지. 여학생은 뱀이나 도마뱀 속에서 한사코 가만히 있는 거야. 거기는 의외로 머물러 있기 좋지. 그런 가운데 빛이 희박해져. 폐관 시간이 다가와. 하지만 여학생은 역시나 한사코 기다리고만 있어――그렇게 생각하면 소설이지. 물론 그럴싸한 소설은 아냐. 미에코라면 모를까 너를 주인공으로 삼는 날에는……"
 나카무라는 히죽히죽 웃었다.
 "아쉽게도 미에코도 살쪄서 말야."
 "너보다 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나는 88kg이야. 미에코는 아마 63kg쯤 될 거고."
 어느 틈엔가 십 년이 흘렀다. 나카무라는 지금 베를린의 미쓰이인가에 근무하고 있다. 미에코도 진작에 결혼했다고 한다. 소설과 호리카와 야스키치는 어떤 부인 잡지 신년호의 권두 그림에서 우연히 미에코를 발견했다. 미에코는 사진 속에서 커다란 피아노를 뒤로한 채 세 남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용모는 십 년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으리라. 눈매도――야스키치는 몰래 두려워했다. 눈매만 보면 75kg을 조금 넘었을지도 모른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