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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생의 믿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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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생은 아까부터 다리 아래서 여자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
 올려다보니 높은 돌난간에는 담쟁이덩굴에 반쯤 뒤덮여 있고 이따금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소매는 선명한 햇살을 받으며 유유히 바람에 나부꼈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휘파람을 불면서 가볍게 다리 아래의 주[각주:1]를 둘러보았다.

 노란 진흙으로 된 다리 아래의 주는 두 평 가량의 넓이를 지녀서 곧장 물과 이어져 있다. 물과 갈대 사이에선 분명 게라도 살고 있을 테지. 둥근 구멍이 몇 개나 뚫려 있고 그곳에 파도가 닿을 때마다 작게 철렁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기다리기 힘들다는 양 물가까지 이동해 배 한 척 지나지 못할 법한 조용한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강가에는 푸른 갈대가 빼곡히 자라 있다. 그뿐 아니라 그 갈대 사이에는 곳곳에 강버들이 빽빽하고 둥글게 자라 있다. 덕분에 그 사이를 지나는 수면도 강폭에 비해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단지 얄팍하고 투명한 물이 운모 같은 구름 그림자를 두른 채로 갈대 안에서 흐르고 있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물가에서 걸음을 돌려 이번에는 넓지도 않은 주 위를 이리저리 돌며 천천히 어두워져 가는 주위의 조용함에 귀를 기울였다. 
 다리 위는 한동안 발걸음이 끊긴 듯했다. 신발 소리도, 발굽 소리도, 혹은 바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바람 소리, 갈대 소리, 물소리――그리고 어디선가 요란한 왜가리 울음소리도 들렸다. 그런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자 어느 틈엔가 밀물이 들어왔는지 노란 진흙을 씻는 물색이 아까보다도 가까이서 빛났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다리 아래의 어두컴컴한 주를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강물이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주 위로 올라왔다. 또 동시에 강에서 올라오는 마름 냄새나 물 냄새도 차갑게 피부를 두르기 시작했다. 올려다보면 다리 위에는 선명한 햇빛이 사라지고 단지 돌난간만이 희미한 푸른색으로 어둑해진 하늘을 검게 잘라내고 있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기어코 그 자리에 섰다.
 강물은 신발을 적시며 강철보다도 차가운 빛을 두른 채 다리 아래서 넓게 펼쳐져 있다. 그러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도, 배도, 가슴도 이 만조의 물에 가려질 게 분명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수위는 점점 높아져 이제는 기어코 두 종아리마저 강물 아래에 잠그어 버렸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물 안에 선채로 아직 일말의 희망을 갖고 몇 번이나 다리 위를 보았다.
 배를 침범한 물 위에는 창망한 저녁 색이 내려앉았고 곳곳에 울창한 갈대나 버들도 쓸쓸하게 서로 스치는 소리만을 희미한 안갯속에서 전해준다. 그때 농어로 보이는 물고기 하나가 미생 코를 스치며 하얀 배를 드러냈다. 그 물고기가 날아 오른 하늘에도 띄엄띄엄이나마 별빛이 보였고, 덩굴진 돌난간 형태마저 이른 밤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오지 않는다……

       ―――――――――――――――――――――――――

 밤중, 달빛이 강의 갈대와 버들에 흘러넘칠 때, 강물과 미풍은 조용히 속삭임을 나누며 다리 아래서 죽은 미생 시체를 상냥히 바다 쪽으로 옮겨주었다. 하지만 쓸쓸한 하늘의 달빛을 동경했던 탓일까. 미생 혼은 조용히 시체서 빠져나와 희미하게 밝은 하늘을 향해 마치 물 냄새도 마름 냄새가 소리도 없이 강에서 오르는 것처럼 살랑살랑 높이 올라가 버렸다……
 그로부터 몇 천 년이 지난 후, 이 혼은 무수한 환생을 거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야 했다. 그게 이렇게 말하는 내게 깃든 혼이다. 그러니 나는 현대에 살고 있을지언정 이렇다 의미 있는 일은 하나도 할 수 없다. 밤에도 낮에도 막연히 꿈꾸는 듯한 생활을 보내며 단지 무언가 찾아와 마땅할 불가사의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미생이 어두컴컴한 저녁 다리 아래서 영원히 오지 않은 연인을 한사코 기다린 것처럼.

  1. 토사가 물 속에 퇴적하여 강·호수·바다의 수면에 나타난 곳.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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