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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무도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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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메이지 19년 11월 3일 밤이었다. 당시 17살이었던 ――가문의 아가씨 아키코는 머리가 벗겨진 아버지와 함께 오늘밤 무도회가 열린다는 로쿠메이칸의 계단을 올랐다. 밝은 가스등을 받은 폭이 넓은 계단 양쪽에는 거의 인공에 가까운 커다란 국화꽃이 삼중의 바자울을 이루고 있었다. 국화는 가장 안쪽이 옅은 붉은색이었고, 중간이 짙은 노란색, 가장 앞에 하얀 꽃잎을 유소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런 국화 바자울이 끝나는 계단 위 무도실에서는 밝은 관현악 소리가 억누르기 힘든 행복의 숨결처럼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키코는 일찍부터 프랑스어와 무도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정식 무도회에 오르는 건 오늘 밤이 난생처음이었다. 때문에 마차 안에서 이따금 말을 거는 아버지에게도 속이 빈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가슴에 유쾌한 불안이라 형용해야 할 일종의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 뿌리내려 있었기 때문이다. 창밖으로는 도쿄의 빈곤한 등불이 흘러갔다. 마차가 로쿠메이칸 앞에 멈출 때까지 진정되지 않는 눈초리는 몇 번이나 그 광경을 향했을까. 아키코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로쿠메이칸에 발을 들인 아키코는 곧 그런 불안을 잊을 만한 사건과 조우했다. 계단의 중간까지 왔을 때, 두 사람은 한 발 먼저 오르던 중국 고관을 따라잡았다. 그러자 고관은 살이 오른 몸을 열어 두 사람을 먼저 보내며 멍한 얼굴로 아키코를 보았다. 청초한 장미색 무도복, 기품 있게 목에 두른 하늘색 리본, 또 짙은 머릿결에서 향기를 품기는 단 한 떨기 장미꽃――그날 밤 아키코의 모습은 긴 변발을 늘어 트린 고관을 놀래킬 정도로 개화한 일본 소녀의 아름다움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계단을 급하게 내려오던 연미복 차림의 젊은 일본인 또한 도중에 둘과 엇갈리면서 반사적으로 돌아보더니 역시나 멍한 시선을 아키코의 뒷모습에 남겼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얀 넥타이에 손을 가져가더니 다시 국화 속으로 바쁘게 달려 현관 쪽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이 계단을 다 오르자 2층 무도실 입구에는 반백의 턱수염을 기른 주인 백작이 가슴가에 수많은 훈장을 붙이고서 루이 15세식 차림을 한 연상의 백작 부인과 함께 위엄 있게 손님을 맞이하였다. 아키코는 이 백작마저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그 관록 있는 얼굴 어딘가에 순간 순수한 감탄의 색이 드리운 걸 놓치지 않았다. 사람 좋은 아키코의 아버지는 기쁜 미소를 지으며 백작과 부인께 짧게 딸을 소개했다. 아키코는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뒤섞인 맛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거만한 백작부인의 얼굴에 일말의 추악함이 깃든 걸 알아차릴만한 여유는 지니고 있었다.
 무도실 곳곳에는 국화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또 온갖 곳에 상대를 기다리는 부인들의 레이스나 꽃이나 상아 부채가 상큼한 향수 냄새 속에서 소리 없는 파도처럼 움직였다. 아키코는 곧장 아버지와 헤어져 기라성 같은 부인들 집단과 함께 했다. 다들 비슷하게 하늘색이나 장미색 무도복을 입은 동년배 소녀들이었다. 그녀를 맞이한 소녀들은 아기새처럼 쫑알거리며 口口에게 오늘밤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운 걸 칭찬해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사이에 끼자마자 보지 못한 프랑스 해군 장교가 어디선가 조용히 걸어왔다. 그리고 두 팔을 내려놓은 채로 정중히 일본식 인사를 했다. 아키코는 피가 뺨으로 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인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물을 것도 없이 명백했다. 때문에 아키코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맡기기 위해 옆에 서있던 하늘색 무도복의 아가씨를 돌아보았다. 의외였던 건 그 프랑스 해군 장교 또한 그와 동시에 뺨에 미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미묘한 악상[각주:1]을 두른 일본어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같이 춤추시겠습니까."


 곧 아키코는 그 프랑스 해군 장교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블루스를 추었다. 장교는 뺨이 햇살에 타고 눈코가 또렷한 짙은 콧수염을 지닌 남자였다. 그 군복 왼어깨에 긴 장갑을 한 손을 얹기에는 아키코의 키가 너무나 작았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 익숙한 해군 장교는 교묘히 다루어 가볍게 군중 속에서 춤춰냈다. 그리고 이따금 그녀의 귀에 붙임성 좋은 프랑스어 아부도 속삭였다.
 그녀는 그 부드러운 말에 부끄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따금 그들이 춤추는 무도실 주위를 보았다. 황실 문장을 새긴 치리멘 장막이나 손톱을 뻗은 청룡이 몸을 꿈틀이는 중국 국기 아래에는 꽃병의 국화꽃이 어떤 건 경쾌한 은색을, 어떤 건 음울한 금색을 인파 사이서 제 모습을 힐끔힐끔 드러냈다. 심지어 그 인파는 샴페인처럼 터지는 화려한 독일 관현악 선율 바람에 등 떠밀려 번잡한 동요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춤을 추는 한 친구와 눈이 맞은 아키코는 바쁜 와중에도 서로 유쾌한 끄덕임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다른 무용수들이 마치 커다란 이가 꼬이듯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키코는 그런 와중에도 상대인 프랑스 해군 장교의 눈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걸 알았다. 그건 일본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이 그녀의 쾌활한 무도에 얼마나 관심을 지녔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도 역시 종이와 대나무 집 안에서 인형처럼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얇은 금속 젓가락으로 푸른 꽃을 그린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릇에서 쌀알을 건져 먹을까――그의 눈에는 그러한 의문이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몇 번이나 오고 갔다. 아키코에겐 그게 우스우면서 동시에 자랑스럽기도 했다. 때문에 자신의 가련한 장미색 무도화에 신기하다는 듯한 상대의 시선이 떨어질 때마다 한 층 더 가볍고 매끄럽게 발재간을 부렸다.
 하지만 이윽고 상대 장교는 아기 고양이 같은 아가씨가 지쳐 가는 걸 알아차렸는지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좀 더 추시겠나요?"
 "Non merci."
 아키코는 숨을 헐떡이며 이번에는 똑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프랑스 해군 장교는 아직 블루스 걸음을 계속하면서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레이스나 꽃의 파도를 꿰매듯이 하여 벽 쪽 국화병에 유유히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바퀴 후, 그곳에 놓인 의자 위에 깔끔히 그녀를 앉히고는 군복 가슴을 펼치고 이전처럼 정중히 일본풍 인사를 했다.

 그 후 또 폴카나 마주르카를 춘 후, 아키코는 이 프랑스 장교와 팔짱을 낀 채로 백황홍 세 종류의 국화 사이를 지나 복도가 넓은 방으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연미복이나 하얀 견장을 한 사람들이 오가는 가운데 은이나 유리 식기류로 덮인 몇몇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어떤 테이블은 고기와 송로가 산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고, 또 어떤 테이블은 샌드위치와 아이스크림을 탑처럼 높게 쌓여 있었고, 또 어떤 테이블은 석류와 무화과로 삼각탑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국화로 묻힌 방 한 켠의 벽 위에는 교모한 인공 포도 덩쿨이 걸린 아름다운 금색 격자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포도 잎 사이에는 벌집 같은 포도가 자색을 내뿜으며 걸려 있었다. 아키코는 그 금색 격자 앞에서 머리 벗긴 아버지가 동년배 신사와 함께 담배를 물고 있는 걸 보았다. 아버지는 아키코를 보고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윽고 신사를 보며 다시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프랑스 해군 장교는 아키코와 한 테이블로 가서 같이 아이스크림을 떴다. 아키코는 그동안에도 상대의 눈이 이따금 자신의 손이나 머리, 하늘색 리본을 한 목으로 향하는 걸 알았다. 물론 아키코가 불쾌하게 여길 리도 없었다. 하지만 찰나에는 여성스러운 의심도 번뜩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검은 비로드 가슴에 붉은 동백꽃을 찬 독일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둘이 옆을 지나, 그녀는 이 의심을 죽이기 위해 이런 감탄사를 발명했다.
 "서양 여자분들은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그 말을 들은 해군 장교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본 여자분들도 아름답지요. 특히 당신은――"
 "그렇지 않답니다."
 "아뇨, 아첨이 아닙니다. 이대로 바로 파리 무도회에도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럼 다들 놀랄 테지요. 바토의 그림속에서 뛰쳐나온 공주님 같아 보일 테니까요."
 아키코는 바토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해군 장교가 일으킨 아름다운 과거의 환상도――어두운 숲의 분수와 조각되어 가는 포도의 환상도 한순간 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남보다 감이 날카로운 아키코는 아이스크림 수저를 움직이며 달리 남은 화제에 매달리는 걸 잊지 않았다.
 "저도 파리 무도회에 참가해보고 싶네요."
 "아뇨, 파리 무도회도 이와 똑같습니다."
 해군 장교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의 테이블을 돌고 있는 인파와 국화 꽃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곧 비웃는 듯한 미소의 파도가 눈동자 밑바닥에서 움직이더니 아이스크림 수저를 멈추고는,
 "파리뿐일까요. 무도회는 어디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반쯤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한 시간 후, 아키코와 프랑스 해군 장교는 역시나 팔짱을 낀 채로 수많은 일본인이나 외국인과 함께 무도실 밖에 있는 발코니에 서있었다.
 난간 하나를 둔 발코니 너머에는 넓은 정원을 가득 채운 침엽수가 가지를 서로 뒤엉킨 채 그 끝자락서 붉은 등의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차갑게 식어내린 공기 밑바닥서는 아래의 정원서 올라오는 이끼 냄새나 낙엽 냄새가 쓸쓸한 가을 호흡을 풍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바로 뒤의 무도실에서는 역시나 레이스나 꽃의 파도가 열여섯 국화로 물들인 치리멘 장막 아래서 쉬지 않는 동요를 거듭하였다. 또 템포 빠른 관현악 바람은 여전히 그런 인간 파도 위에 용서 없는 채찍질을 가하고 있다.
 물론 이 발코니 위에서도 북적거리는 말소리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밤기운을 흔들고 있었다. 하물며 어두운 침엽수의 하늘에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오를 때에는 술렁임에 가까운 소리가 일동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일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서있던 아키코 또한 주위에 있던 아가씨들과 가벼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정신이 들어 보니 그 프랑스 해군 장교는 아키코에게 팔을 빌린 채로 정원 위의 밤하늘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키코에겐 그게 어쩐지 향수라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아키코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향 나라를 생각하시지요."하고 반쯤 부끄러워하듯 물었다.

 그러자 해군 장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눈초리로 조용히 아키코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논"하고 대답하는 대신에 아이처럼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뭔지 맞춰보시죠."
 그때 발코니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엔 바람 같은 술렁임이 들렸다. 아키코와 해군 장교와 말을 맞춘 것처럼 대화를 멈추고 정원의 침엽수를 누르는 밤하늘 쪽에 눈을 주었다. 그곳에는 붉고 푸른 불꽃놀이가 사방팔방으로 어둠을 튕겨내며 사라지려 하던 참이었다. 아키코는 어째서인지 그 불꽃놀이가 슬플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저는 불꽃놀이를 생각했답니다. 우리의 삶vie 같은 불꽃놀이를."

 곧 프랑스 해군 장교는 아이코의 얼굴을 상냥하게 내려보며 가르치듯이 이렇게 말했다.

       둘

 다이쇼 7년 가을이었다. 그해의 아키코는 카마쿠라 별장을 찾는 도중에 일면식이 있는 청년 소설가와 우연찮게 기차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 청년은 그때 짐칸 위에 카마쿠라의 지인에게 줄 국화 다발을 얹어두고 있었다. 그러자 그해의 아키코――지금의 H 노부인은 국화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며 그에게 로쿠메이칸 무도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청년은 그 사람의 입으로 이런 추억을 듣는 데에 막대한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가 끝난 후, 청년은 H 노부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모님께서는 그 프랑스 해군 장교의 이름을 알고 계시나요."
 그러자 H 부인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알다마다요. Julien Viaud라는 분이셨죠."
 "그럼 Loti였군요. 그 '국화 부인'을 쓴 소설가 피에르 로티 말입니다."
 청년은 유쾌한 흥분을 느꼈다. 하지만 H 노인은 의아하다는 양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이렇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아뇨, 로티란 분이 아니셨어요. 줄리앙 비오[footnote] 피에르 로티의 본명[/footntoe]란 분이셨죠."

 

 

 

  1. 프랑스어로 악센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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