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타바타 사람들 이야기를 서볼까 한다. 꼭 교유라고는 할 수 없다. 되려 나의 스승들이라 해야 하리라.
시모지마 이사오 시모지마 선생님은 의사이다. 우리 일가는 항상 선생님께 신세를 지고 있다. 또 공욕산인이라 하여서 걸식 하이진 세이게츠의 구를 모은 세이게츠 구집의 편집자이다. 나하고는 부모 자식 정도의 나이차인데 그 나이에도 톨스토이 같은 걸 읽으시며 논전에 임하시는 자세는 감복해 마땅하다.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내 마음도 선생님께는 이기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기왕 더 말해보자면 선생님께서는 이따금 꿈속에서 괴물에게 쫓기곤 하는데 도망치는 법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대담함은 혹여 타조알보다 크지 않을까.
카토리 호즈마 카토리 선생님은 통칭 "이웃 선생님"이시다. 주금가이자 네기시파의 우타요미인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선생님의 옆집에 살기 때문에 형태의 미학을 배웠다. 물론 배웠다고 온전히 내 것으로 삼지는 못했다. 또 선생님께는 아직 배울 게 많으니 내가 훔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훔칠 생각이다. 그걸 위해서도 "이웃 선생님"의 수명이 길기를 바란다. 카토리 선생님께도 신세 지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삼촌 한 명이 생긴 거 같아서 어리광 부릴 때도 있다.
코즈키 미세이 이분 또한 물론 연장자이다. 본직인 유화나 남화 이외에도 시를 쓰시거나 구를 쓰시거나 노래를 지으신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재주가 많은 분이다. 일본과 중국의 무예에 관심을 가지거나 테니스나 야구를 하는 모습은 호걸처럼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아라키 마타에몬처럼 거칠고 날카롭기만 한 야만인은 아니시다. 나는 무언가 재난을 당해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고 싶을 때면 일단 미세이 노인께 불평을 늘어놓을 생각이다. 다행히 이제까지 불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카시마 류조 역시나 부모 자식 뻘 되는 사업가시다. 어릴 적에 서양에 사셔서 샤미센이나 등을 보아도 정취를 느끼지 못하신다. 대신 요염한 램프 등을 보시면 곧장 정취를 느끼신다고 한다. 글, 전각, 노래, 춤, 나가우타, 토키와즈, 우타자와, 쿄우겐, 테니스, 얼음 타기 등 온갖 것에 정통하여 누구나 놀라고는 한다. 하지만 카시마 씨의 다채로움은 내가 존경하는 점이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점은 카시마 씨의 '사람 됨됨이'다. 카시마 시처럼 뜨겁게 지지 않는 도쿄인은 요즘 날에 잘 찾아 볼 수 없다. 훗날에는 더욱 희소해지리라. 나는 도쿄인과 촌뜨기를 겸하는 문명적 혼혈아지만 도쿄인인 카시마 씨에겐 성자와 현인 사이의 정――혹은 여우와 너구리 사이의 정을 품을 수밖에 없다. 카시마 씨가 다시 서양에 놀러 가신 다기에 활자로 한 마디 하겠다. 너무 램프 등에 심취하시면 안 됩니다.
무로우 사이세이 몇 번이나 쓴 적이 있는지라 새삼스레 덧붙일 것도 없다. 단지 아랑곳 않고 내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제 그만 서양식 팬티 좀 입지?"니 "그 스틱은 그만 좀 들어라"니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이 달리 또 있을까. 물론 내가 그런 잔소리 앞에 항복할 리도 없다. 내게는 무로우의 약점인 의논을 던진다는 계책이 있다.
쿠보타 만타로 역시나 많은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 역시나 내가 의논을 시작하면 곧장 거리를 두는 점은 무로우와 같다. 더 말해보자면 쿠보타 군은 주객이지만(무로우를 부를 때는 편하게 부르는데 쿠보타 군은 아직 그게 안 된다.) 해삼 내장은 먹지 않는다. 카라스미를 먹지 않는다. 하물며 오징어 먹물(이건 나도 사오 일 전에 처음 먹었지만)도 먹지 않는다. 주객이 아닌 나보다도 미각이 진보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다.
기타하라 다이스케 나보다도 두세 살 연장자인데 참 얼굴이 미운 사람이다. 다행히도 나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만약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이 사람의 모방뿐이랴 혹은 이 사람을 죽이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본직은 미술학교를 나온 화가인데 그럼에도 내게 어려운 사람인 건 변함이 없다. 단지 나는 키타하라 군의 정원 살림을 받아가는 것에 비해 키타하라 군은 내게 받아 가는 게 없으니 필경 이득을 보는 건 내쪽이리라. 이것만은 조금 즐겁다. 겸사겸사 덧붙이면 키타하라 군은 꽤나 거나한 주객인데 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걸 보지 못했다. 평소의 키타하라 군보다도 좀 더 가볍게 정체를 드러낼 뿐이다. 그때 키타하라 군의 눈은 아주 즐거워 보이는 게 그림 속 사람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아마 키타하라 군의 작품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겠지만 눈만은 반드시 전해지리라. 즉 키타하라 군의 못난 얼굴을 이야기하다 취한 눈에 이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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