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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봄볕이 드는 거리를 홀로 느긋이 걷는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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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볕이 드는 거리를 홀로 느긋이 걷는다. 반대편에서 보이는 건 지붕 가게 주인이었다. 지붕 가게 주인도 이 계절엔 남색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고무인지로 된 장화를 신고 있다. 그건 그렇고 참 긴 장화다. 무릎――정도가 아니다. 허벅지도 절반가량 가려져 있다. 저런 장화를 신었을 때엔 장화를 신었다기보다도 모종의 박자로 장화 속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 테지.
 단골 골동품상을 찾았다. 정면의 붉은 선반 위에 무시아케에서 만든 듯한 술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술병 입구가 묘하게 외설적이다. 그래그래, 언젠가 본 고비젠의 술병도 살짝 입을 얹어 보고 싶었다. 눈앞엔 문양이 그려진 접시 한 장이 놓여 있다. 남색 버들 가지 아래에 역시 남색으로 된 사람 하나가 바보 같이 긴 낚시대를 뻗고 있다. 누구인가 싶어 들여봤더니 카나자와에 있는 무로우 사이세이 아닌가!
 다시 느긋이 걷기 시작한다. 채소가게에 쇠귀나물이 조금 있다. 쇠귀나무 껍질색은 보기 좋은 걸. 오래된 진흙칠보의 청색과 닮아 있다. 저 쇠귀나물을 살까. 거짓말쟁이. 살 생각 없는 걸 아는 주제에. 그나저나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싶어지는 심정은 대체 무엇일까. 이번에는 새를 파는 가게. 하나같이 새장투성이인걸. 오, 주인도 편하다는 양 곤줄박이 새장 안에 앉아 있지 않은가!
 "즉 말을 탄 거하고 똑같은 거지."
 "칸트의 논문에 놀아났네."
 뒤에서 길을 지나는 교복 차림의 대학생 둘. 힐끔 듣는 남의 대화는 참 미치광이의 대화 같단 말이지. 이쯤부터 슬슬 언덕이 시작된다. 저 집 참죽나무는 벌써 잎이 떨어져 갈색으로 변했군. 물론 언덕 쪽 대나무는 여전히 노랗기만 하지만………이런 반대편에서 말이 오는군. 말의 눈동자는 참 크지. 대나무도 참죽나무도 내 얼굴도 모두 눈동자 안에 비친다. 말 뒤로는 배추 흰나비 따른다."
 "이제 막 나온 계란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저는 계란 필요 없는데――봄볕이 드는 거리를 홀로 느긋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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