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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란 애드거 앨런 포를 말합니다. 포가 처음 프랑스에 소개되었을 때에는 포어라 불렸습니다. 영국인 중에서도 이렇게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포가 바른 건 명확합니다. 또 하나 이름 이야기를 하자면 애드거는 괜찮지만 앨런은 결코 스스로가 바란 게 아니라 합니다. 즉 앨런만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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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 아버지는 에드거 데빗 포라고 하며 포는 차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포를 포함해 세 아이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때문에 도리 없이 포는 존 알란이란 담배학자 아래서 자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벗어납니다. 때문에 포 본인은 단 한 번도 앨런 포라는 서명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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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이라 불리게 된 건 포의 전집을 편집한 그리스보트란 남자가 고의로 덧붙인 게 처음입니다. 이 남자는 사사건건 포에게 시비를 걸고 독기를 품은 남자로, 단지 그뿐임에도 예술사상에 이름을 남긴 남자입니다.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는 자는 후세에 생명에 넘칠 법한 예술가에게 무작정 시비를 걸고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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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는 1809년 보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상에 비평가로 알려졌었습니다. 스물여섯 살일 적, 그는 이미 훌륭한 비평가로 미국 전역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포의 비판은 신랄하게 울렸습니다. 관여한 신문 잡지 수가 마흔 개 가량 되고 발표한 논문이 팔백 개 가량 되며 이런 사실을 통해 그가 뛰어난 문장을 쓸 수 없다 없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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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장 속에 항상 최상급의 말만 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칭찬할 때면 저 하늘 높은 곳까지 띄어 올립니다. 나무랄 때는 산 밑바닥까지 떨굽니다. 어떤 사람의 시를 비평한 내용 중에는 '이 시는 실수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실수는 이걸 인쇄했다는 점이다'란 구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칭찬을 받은 사람과 폄하를 받은 사람 사이서 그만한 차이가 인정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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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는 중용의 자리서 평가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매도하고 비난하는 쪽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로엘마저 포는 독약과 잉크병을 착각하고 있다 말할 정도로 그의 글은 불을 내뿜는 것처럼 신랄하게 사람을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니 그에겐 아군이라 할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가 평생을 불운하게 보낸 이유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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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의 험담은 스스로의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니 도리가 없습니다. 포에 따르면 비평의 역할이란 결점을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품의 미점은 비평가가 설명해야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자연스레 드러나고 자연스레 느낄 수 있지 않으면 미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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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진정한 미점이란 누구나 간단히 알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비평의 사명이란 미점을 열거하는 게 아니라 결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신조가 있기에 줄곧 험담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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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는 시란 쾌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말합니다. 시의 목적이란 그곳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시라고 해도 그건 예술을 대표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쾌락은 어디서 태어나는가, 그건 미점을 느끼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그를 예술을 위한 예술의 선구자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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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포는 소위 교훈 주의에는 반대했습니다. 미를 대하는 포의 사고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멜랑꼴리했습니다. 포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할 당시는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윽고 프랑스에 영향을 주고 러시아와 영국 모두 풍미한 건 아실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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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는 Totality of effect란 말을 썼습니다. 그는 이러한 견해에서 시란 한숨에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긴 시가 크게 득세하였으니 그럴 때에 태연히 이런 말을 한 그의 식견과 자신감은 대단하다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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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는 실락원 같은 건 결코 시가 아니다, 그건 시가 곳곳에 있을 뿐이지 산문을 이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시란 백 행 내외가 적절하다고 말했습니다. 소설 또한 단숨에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후대에 길이 남을 작품은 짧은 것이라 단언한 것입니다. 포가 죽은 후의 경향을 비추어 보면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가 위대한 선구자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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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는 1841년 죽었습니다. 그 죽음은 비참했을 뿐 아니라 사후에도 좀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포에게는 묘를 세울 유산도 없었습니다.
볼티모어의 친척이 간신히 돌을 구하고 장인에게 부탁해 겨우 만들어냈을 때에는 열차가 탈선하여 그 집에 꽂히는 통에 포의 비석도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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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어떤 학교의 여교사가 주체가 되어 오랜 시간 동안 기부금을 모아 겨우 비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제막식에는 당시 영국 문인 중 이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단 한 명, 쓸쓸한 한 그림자만이 묵묵히 그 묘비 앞에 서있었습니다. 그게 휘트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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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는 죽은 후에도 불행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중 가장 큰 불행은 전집 편집자가 '적'인 크리스보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포의 위대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후대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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