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어느 봄날의 저녁입니다.
당의 수도 낙양의 서쪽 문 아래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이름은 두자춘이라 해서, 본래는 부자의 아들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재산을 전부 다 써서 하루를 넘기는 게 곤란할 정도로 가련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럴만한 게 그 즘의 낙양은 천하에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번성을 이룬 곳이었으니까 길거리에는 사람이나 수레로 빼곡했습니다. 문 한 가득 드리우는 기름 같은 저녁놀 빛 속에서 노인이 쓴 비단 모자나 터기 여자의 금귀고리, 백마에 장식된 색이 진한 고삐 따위가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두자춘은 여전히 문벽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하늘에는 벌써 얄팍한 달이 하늘하늘 나부끼는 아지랑이 속에서 마치 손톱자국인 것처럼 희미하고 하얗게 떠올라 있는 것이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배는 고프고, 그런데다가 어디 간다고 재워줄 거 같지도 않고――이러고 살 바에야 차라리 강에라도 투신해서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 모르겠네."
두자춘은 아까부터 홀로 이런 도리 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디서 온 걸까요. 대뜸 그의 앞에 한 쪽 눈이 사시인 노인이 발걸음을 멈춥니다. 노인은 저녁놀을 받아 문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두자춘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고 거창하게 물었습니다.
"저 말입니까. 오늘 밤에 잘 곳이 없어서 어쩌면 좋나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노인이 대뜸 묻는 통에 두자춘은 살짝 시선을 피하며 저도 모르게 정직하게 대답해버렸습니다.
"그러냐. 그거 불쌍하구나."
노인은 잠시간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습니다만 이윽고 길거리에 드리운 저녁놀을 가리키며,
"그럼 내가 좋은 걸 하나 가르쳐주마. 지금 이 저녁놀 안에 서서 네 그림자가 땅에 드리우면 그 머리에 닿는 부분을 새벽에 파보거라. 분명 수레를 한가득 채울 황금이 묻혀 있을 테니까."
"정말인가요?"
두자춘은 놀라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입니다. 노인은 어디로 갔는지 주위에서 그럴싸한 그림자나 형태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대신 하늘에 뜬 달이 전보다도 더 하얗게 물들어, 쉬지 않는 길거리의 인파 위에 성질 급한 박쥐 두세 마리가 하늘하늘 날고 있었습니다.
둘
두자춘은 하루 만에 낙양에서 둘도 없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노인의 말처럼 저녁놀에 드리운 그림자서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밤에 몰래 파보니 커다란 수레로도 부족할 정도로 황금이 잔뜩 튀어나온 것입니다.
부자가 된 두자춘은 곧장 화려한 집을 사서 현종 황제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난릉 술을 사지 않나 계주의 용안육을 구하질 않나 하루에 네 번이나 색을 바꾸는 모란에 정원에 심지를 않나, 백공작을 몇 마리나 키우질 않나, 옥을 모으지를 않나, 비단을 두르질 않나. 향목으로 수레를 만들지 않나, 상아 의자를 맞추지를 않나, 그 사치를 하나하나 적어서는 이 이야기가 도무지 끝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이런 소문을 듣고서 이제까지는 거리서 만나도 인사도 안 하던 친구들이 아침저녁으로 놀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마저도 하루같이 숫자가 늘어서 반 년 가량이 지났을 즘에는 낙양에 이름이 알려진 똑똑한 사람이나 미인 중에서 두자춘의 집에 오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두자추는 이런 손님들을 상대로 매일 같이 술축제를 벌였습니다. 그 술축제 때 벌어진 일이 또 입으로는 다 할 수 없습니다. 극히 일부만 찝어 이야기해도 두자춘이 금으로 된 잔에 서양에서 온 포도주를 따라 마시며 천축에서 태어난 마법사가 칼을 먹는 기예를 보고 있자니, 주위에 있던 스무 명의 여자들이 열 명은 비취 연꽃을, 열 명은 마노로 된 모란꽃을 하나 같이 머리에 장식하면서 피리나 거문고를 재미있게 연주하는 경치 따위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한계는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사치스러운 두자춘이라도 1, 2년도 지나지 않아 점점 가난해져 갔습니다. 그럼 인간은 박정하기 짝이 없어서, 어제까지는 매일 오던 친구들도 이제는 문앞을 지날 때마저 인사 한 번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기어코 3년차 봄, 다시 두자춘이 이전과 같은 무일푼이 되자 넓은 낙양 안에서도 그에게 방을 빌려주는 집은 단 한 곳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니, 방을 빌려주는 건 고사하고 이제는 그릇에 담긴 물 한 잔마저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어느 날 저녁, 다시 한 반 낙양의 서쪽 문 아래로 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서있었습니다. 그러자 역시 과거처럼 한 쪽 눈이 사시인 노인이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내,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고 말을 걸지 뭡니까.
노인의 얼굴을 본 두자춘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대답도 하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그날도 친절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였기에 두자춘 또한 마찬가지로,
"저 말입니까. 오늘 밤에 잘 곳이 없어서 어쩌면 좋나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하고 머뭇머뭇 대답했습니다.
"그러냐. 그거 불쌍하구나. 그럼 내가 좋은 걸 하나 가르쳐주마. 지금 이 저녁놀 안에 서서 네 그림자가 땅에 드리우면 그 가슴에 닿는 부분을 새벽에 파보거라. 분명 수레를 한 가득 채울 황금이 묻혀 있을 테니까."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이번에도 인파 속으로 녹아내리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두자춘은 그다음 날부터 다시 천하제일의 부자로 돌아갔습니다. 또 동시에 여전히 제멋대로 사치를 시작했습니다. 정원에 핀 목란꽃, 그 안에 잠든 백공작, 그리고 칼날을 삼키는 천축에서 온 마법사――모든 게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차에 한가득 있던 그 엄청난 황금도 또 3년가량 지났을 때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셋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한 쪽 눈이 사시인 노인은 또다시 두자춘 앞에 와서 같은 말을 물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때도 낙양의 서쪽 문 아래에서 아지랑이를 깨는 초승달의 빛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저 말입니까. 오늘 밤에 잘 곳이 없어서 어쩌면 좋나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냐. 그거 불쌍하구나. 그럼 내가 좋은 걸 하나 가르쳐주마. 지금 이 저녁놀 안에 서서 네 그림자가 땅에 드리우면 그 배에 닿는 부분을 새벽에 파보거라. 분명 수레를 한 가득――"
노인이 거기까지 말하자 두자춘은 불쑥 손을 들어 그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아니, 돈은 이만 되었습니다."
"돈이 되었어? 하하, 그럼 이제 사치에도 질려버린 모양이구나."
노인은 의아한 눈초리로 두자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뇨, 사치에 질린 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정이 떨어졌어요."
두자춘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난폭하게 말했습니다.
"그거 재미있구나. 왜 인간에게 정이 떨어졌지?"
"인간은 다들 박정합니다. 제가 부자일 때는 아첨이 끊이지 않습니다. 헌데 한 번 가난해져 보십쇼. 부드러운 표정조차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다시 한 번 부자가 된들 무엇도 느끼지 못 할 거 같습니다."
노인은 두자춘의 말을 듣고는 불쑥 히죽 웃었습니다.
"허냐. 이거 참, 너는 젊은 녀석 답지 않게 세상을 이해하고 있구나. 허면 앞으로는 가난하더라도 편안히 살아 가겠느냐."
두자춘은 조금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 잡고 고개를 들고는 호소하듯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금의 저는 그마저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제자로 들어가 선술 수행을 하고 싶습니다. 아뇨, 숨기실 거 없으십니다. 당신은 덕망 높은 선인이시지요? 선인이라면 하룻밤만에 저를 천하제일의 부자로 만드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요. 부디 제 선생님이 되어 신비한 선술을 가르쳐주십시오."
노인은 미간에 힘을 준 채로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지만 이윽고 빙긋 웃으며,
"맞다. 내가 아미산에 사는 철관자라는 선인이다. 처음 네 얼굴을 보았을 때 어딘가 말을 잘 알아들을 거 같아 두 번 부자로 만들어주었는데, 그렇게나 선인이 되고 싶다면 내 제자로 받아주마." 흔쾌히 부탁을 받아주었습니다.
두자춘은 기뻐하느니 기뻐하지 않느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에 이마를 붙이고는 몇 번이나 철관자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고마워할 거 없다. 아무리 내 제자가 된다 한들 훌륭한 선인이 될지는 네게 달린 일이니 말야――허나 어찌 되었든 나와 함께 아미산 안쪽으로 가보자꾸나. 오오, 다행히 여기에 대나무 지팡이 하나가 떨어져 있구나. 그럼 이걸 써서 단숨에 하늘을 넘어보자꾸나."
철관자는 어린 대나무 하나를 주워 들고는 주문을 외우며 두자춘과 함께 그 대나무에 말이라도 타듯이 올라 탔습니다. 그러자 참 신기합니다. 대나무 지팡이는 곧 용처럼 기세 좋게 넓은 하늘을 향해 날아, 봄날의 맑은 저녁 하늘을 가르며 아미산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두자춘은 심장이 덜컹거려 머뭇머뭇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래에는 단지 푸른 산들이 저녁놀의 밑바닥에서 보일 뿐으로, 낙양의 서쪽 문은(진작 아지랑이에 가려졌겠지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사이 철관자는 하얀 옆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며 소리 높여 노래했습니다.
아침에는 북해서 놀고 저녁에는 창오서 노는구나.
소매 안 업구렁이 참 대담하지 않으냐.
세 번이나 악양에 왔는데도 아무도 알지 못 하니.
낭랑하게 읊으며 동저호를 날아보자.
넷
두 사람을 태운 어린 대나무는 머지않아 아미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깊은 협곡에 놓인 폭이 넓은 바위 위였습니다. 어찌나 높은 곳인지 하늘 중심에 걸린 북두성이 그릇처럼 크게 빛났습니다. 애초부터 인기척이 끊긴 산이었으니 주위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고, 겨우 귀에 들어오는 건 뒤편 절벽에 자란 굽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밤바람에 살랑살랑 우는 소리뿐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바위 위에 오르니 철관자는 두자춘을 절벽 아래에 앉히고는,
"나는 이제부터 천상에 가서 서왕모를 뵐 거다. 너는 그동안 여기 앉아서 내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거라. 아마 내가 사라지면 갖은 마성이 나타나 너를 흔들려 할 테지. 허나 어떤 일이 벌어져도 결코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만약 한 마디라도 했다간 너는 절대 선인이 될 수 없음을 각오하거라. 알겠느냐. 천지가 갈라져도 다물고 있어야 해."하고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결코 소리 내지 않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물고 있겠습니다."
"허냐. 그거 안심이구나. 그럼 나는 다녀오마."
노인은 두자춘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다시 대나무 지팡이에 올라 밤임에도 깎여나가는 듯한 산들의 하늘을 향해 단숨에 사라졌습니다.
두자춘은 홀로 바위 위에 앉은 채로 조용히 별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렇게 이래저래 반 시간 가량이 지나, 깊은 산의 밤기운이 얇은 옷에 스며들 즘. 불쑥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거기 누구냐."하고 화를 내지 뭡니까.
하지만 두자춘은 선인의 가르침을 따라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나 같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목숨은 없을 줄 알아라."하고 엄숙히 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두자춘은 물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디서 올라온 걸까요. 눈빛을 낭랑히 빛내는 호랑이 한 마리가 바위 위로 올라와 두자춘을 노려보며 소리 높게 짖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머리 위 소나무 가지가 크게 흔들리더니 뒤의 절벽에서 큼지막한 하얀 뱀 한 마리가 불타는 듯한 혀를 날름거리며 조금식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두자춘은 아무렇지 않게,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호랑이와 뱀은 먹이 하나를 두고 서로 틈이라도 노리는지 잠시 노려봅니다. 하지만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두자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호랑이 이빨에 찢길까, 뱀의 독에 삼켜질까. 두자춘의 목숨이 곧 사그라들 줄 알았던 순간, 호랑이와 뱀은 안개처럼 밤바람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 후에는 절벽의 소나무가 아까처럼 살랑살랑 울 뿐이었습니다. 두자춘은 한숨을 돌리며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바람 한 줄기가 검은 구름을 끌고 오더니 옅은 보랏빛의 번개가 어둠을 가르며 울렸습니다. 아니, 번개뿐일까요. 그와 함께 폭포와 같은 비도 대뜸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두자춘은 그런 날씨 속에서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람 소리, 거센 비, 그리고 끊일 줄 모르는 번개빛――잠시간은 이 커다란 아미산마저 뒤집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만, 그러는 사이 귀를 붙들고 싶어질 정도로 커다란 번개 소리가 울리더니 하늘을 휘감는 듯한 검은 구름 속에서 새빨간 불기둥이 내려와 두자춘의 머리를 향했습니다.
두자춘은 저도 모르게 귀를 부여잡고 바위 위에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곧 눈을 떠보니 하늘은 이전처럼 맑아져 있었고, 반대편에 자리한 산 위에도 찻잔 크기만 한 북두성이 역시나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분명 지금의 소란도 방금 전 호랑이나 뱀도 철관자가 말한 것처럼 마성의 장난임이 분명합니다. 두자춘은 그제야 안심하여 식은땀을 닦고는 다시 바위 위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한숨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가 앞은 곳 앞에 금색 갑옷을 입은 서른 척이나 될 법한 엄숙한 신장神将이 나타났습니다. 신장은 손에 삼지창을 들고 있었는데, 대뜸 그 창부리를 두자춘의 가슴에 들이 밀면서 성난 표정을 짓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니,
"이 자식, 이게 대체 뭐 하는 것이냐. 이 아미산은 천지개벽 때부터 내가 살던 곳이다. 그런 곳에 아랑곳도 않고 홀로 발을 들였다는 건 평범한 인간은 아닐 테지. 자, 목숨이 아깝다면 한 시라도 빨리 대답하거라"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두자춘은 노인이 말한 것처럼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대답 않느냐――하지 않는구나. 좋다. 하지 않을 생각이면 멋대로 하라지. 대신 내 권속들이 네놈을 조각조각 잘라 놓을 거다."
신장은 삼지창을 높게 들고는 반대편산의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그 순간 어둠이 갈라지더니 놀랍게도 무수한 신병이 구름처럼 하늘에 가득 차더니, 다들 창이나 도를 빛내며 당장이라도 공세를 펼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두자춘은 저도 모르게 악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철관자의 말을 떠올려 열심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신장은 그가 두려워 않는 걸 보고 보통 화를 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 벽창호놈.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약속대로 목숨을 받아가마."
신장은 그렇게 소리치자마자 삼지창의 끝을 빛내며 두자춘을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고는 아미산이 울릴 정도로 껄껄 높게 웃고는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물론 이때는 이미 무수한 신병도 불어오는 밤바람과 함께 꿈처럼 사라진 뒤였습니다.
북두성은 다시 바위 위를 쓸쓸히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절벽의 소나무도 여전히 살랑살랑 울고 있습니다. 두자춘은 숨이 끊겨 뒤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섯
두자춘은 바위 위에 누운 채로 쓰러져 있었습니다만 두자춘의 혼은 조용히 몸에서 나와 지옥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 세상과 지옥 사이에는 암혈도란 게 있습니다. 그곳은 항상 하늘이 어둡고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흉흉 부는 곳입니다. 두자춘은 그 바람을 받으며 한동안은 단지 나뭇잎처럼 하늘을 떠다녔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삼라전이라는 액자가 걸린 훌륭한 어전 앞으로 왔습니다.
어전 앞에 있던 수많은 도깨비는 두자춘을 보자마자 바로 주위를 둘러싸고는 층계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층계 위에는 새까만 옷에 금관을 쓴 한 임금님이 주위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이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 염라대왕임일 테지요. 두자춘은 어떻게 될까 싶어 머뭇머뭇 그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이 녀석, 네놈은 무얼 위해 아미산 위에 앉아 있었느냐."
염라대왕의 목소리는 번개처럼 층계 위에서 울렸습니다. 두자춘은 바로 대답하려 했습니다만 문득 "결코 입을 열지 말라"는 철관자의 경고가 떠올랐습니다. 단지 고개를 조아린 채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가지고 있던 철홀을 들고 얼굴의 수염을 거꾸로 세우며,
"네놈은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어서 대답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가책을 맞이하게 될 거다."하고 위세 좋게 매도했습니다.
하지만 두자춘은 여전히 입술 한 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걸 본 염라대왕은 곧 도깨비들을 보더니 소리 높여 무언가를 명합니다. 도깨비들은 명을 받들어 곧장 두자춘을 끌어 삼라전 하늘 위로 올랐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지옥에는 검으로 된 산이나 피연못 외에도 초열지옥이라는 불꽃 협곡이나 극한지옥이라는 얼음 바다가 하늘 아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깨비들은 그런 지옥 안에 차례대로 두자춘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러니 두자춘은 비참하게도 검에 가슴을 꿰뚫리고, 불에 얼굴이 타고, 혀가 뽑히고, 피부가 벗겨지고, 철공이에 으깨지고, 기름 냄비에 튀겨지고, 독뱀에게 뇌를 빨리고, 뿔매한테 눈을 먹히고――그 괴로움을 세었다가는 끝이 없을 정도로 갖은 책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두자춘은 참을성 강하게 이를 앙 다문 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도깨비들이라도 그 상황엔 어처구니가 없었을 테죠. 다시 한 번 밤 같은 하늘을 날아서 삼라전 앞에 돌아와서는 방금처럼 두자춘을 층계 앞으로 글고 가 어전 위의 염라대왕에게,
"이 죄인은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을 안 합니다."하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염라대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만 이윽고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이 남자의 부모는 축생도에 떨어져 있을 테니 어서 여기로 끌고 오거라"하고 한 도깨비에게 말했습니다.
오니는 곧 바람을 타고 지옥의 하늘로 올랐습니다. 그러더니 또 별이 흐르듯이 두 동물을 끈 채로 삼라전 앞에 돌아옵니다. 그 동물을 본 두자춘은 보통 놀란 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마리는 형태는 볼품 없이 마른 말이었지만 얼굴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죽은 부모님이었으니까요.
"이 자식. 무얼 위해 아미산 위에 앉아 있었느냐. 바로 자백하지 않으면 이번엔 네놈의 부모가 아픈 꼴을 보게 될 거다."
그렇게 겁을 주어도 두자춘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 불효자 녀석. 네놈은 부모가 괴로워도 자신만 멀쩡하면 그만이다 이거구나."
염라대왕은 삼라전이 무너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소리쳤습니다.
"때려라, 도깨비들아. 그 두 짐승을 뼈도 살도 남기지 말고 박살내라."
도깨비들은 일제히 "네"하고 대답하며 철채찍을 들어 사방팔방에서 두 마리 말을 미련이나 주저도 없이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채찍은 휙휙 바람을 가르며 불쾌한 비처럼 말의 가죽과 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말은――짐승이 된 부모는, 괴롭게 몸부림치고 눈에 피눈물을 머금은 채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어떠냐. 이래도 자백하지 않을 테냐."
염라대왕은 도깨비들에게 잠시 채찍질을 멈추게 하고 다시 한 번 두자춘에게 답을 재촉했습니다. 그때는 두 말도 살이 찢어지고 뼈가 박살 나 숨을 헐덕인 채로 층계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두자춘은 필사적으로 철관자의 말을 떠올리며 단단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귀에 거의 목소리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걱정 마려무나. 우리가 어떻게 되어도 너만 행복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으니까. 대왕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건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임이 분명했습니다. 두자춘은 저도 모르게 눈을 떴습니다. 그렇게 말 한 마리가 힘없이 쓰러진 채 슬픈 얼굴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괴로운 와중에도 아들의 마음을 생각하여 도깨비에게 채찍질 당하는 걸 원망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자가 되면 아첨을 하고 거지가 되면 말도 섞지 않는 세간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요. 얼마나 기특한 마음가짐일까요. 두자춘은 노인의 경고도 잊고서 구르듯이 그 옆으로 굴러가 두 손으로 죽어가는 말의 목을 부여잡고 뚝뚝 눈물을 흘리며 "엄마"하고 소리쳤습니다…………
여섯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보니 두자춘은 역시나 저녁놀을 받으며 낙양의 서쪽문 아래에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아지랑이낀 하늘, 하얀 초승달, 끊임없는 사람과 수레――모든 게 아미산에 가기 전과 같았습니다.
"어떠냐. 내 제자가 되어본들 선인은 되지 못 할 거 같지?"
사시눈 노인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못 할 거 같습니다. 도무지 못 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되지 못 한 것도 되려 기쁜 거 같습니다."
두자춘은 아직도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로 저도 모르게 노인의 손을 쥐었습니다.
"아무리 선인이 되어본들 저는 그 지옥의 삼라전 앞에서 채찍질 당하는 부모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 할 거 같습니다."
"만약 네가 다물고 있었다면――" 철관자는 대뜸 엄숙한 표정을 짓고는 두자춘을 보았습니다.
"만약 네가 다물고 있었다면 나는 그 자리서 네 목숨을 뺏을 생각이었다――너는 이제 선인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테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정이 떨어졌을 테야. 그럼 너는 이제부터 무엇이 되면 될 거 같으냐."
"무엇이 되어도 인간답게, 정직히 살아갈 셈입니다."
두자춘의 목소리에는 이제까지 없던 밝은 분위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말을 잊지 말거라. 그럼 나는 오늘부로 너와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게다."
철관자는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벌써 걷기 시작했습니다만 대뜸 발걸음을 멈추어 두자춘을 돌아보더니,
"그래. 다행히 지금 막 떠오른 건데 내가 태산 남쪽 기슭에 집 한 척을 지니고 있다. 그 집을 밭과 함께 네게 줄 테니 어서 가서 살도록 하거라. 지금쯤 마침 집 주위에 복숭아꽃이 한 가득 피어 있을 게다."하고 자못 유쾌하다는 양 덧붙였습니다.
'고전 번역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가지 보물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6.14 |
---|---|
오우가시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6.12 |
이이다 다코츠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6.10 |
근래의 유령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6.09 |
참마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6.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