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밤, 나는 오랜 친구 무라카미와 함께 긴자 거리를 걷고 있었다.
"요전 번에 치에코가 편지 보냈어. 너한테 안부 부탁하던데."
무라카미는 불숙 떠올랐다는 것처럼 지금은 사세보에 살고 있는 여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치에코 씨, 잘 지내나 보네."
"그래, 요즘에는 잘 지내나 봐. 그 녀석도 도쿄에 있을 때는 꽤나 신경쇠약도 심했으니까――그 당시는 너도 알지?"
"알고 있지. 그런데 신경쇠약이었는지는――"
"몰랐나 보네. 당시의 치에코는 꼭 미치광이 같았어. 우는가 싶으면 웃고 있지, 웃는가 싶으면――묘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묘한 이야기?"
무라카미는 대답하기 전에 어떤 카페의 유리문을 밀었다. 그렇게 거리가 보이는 테이블에 나와 마주 앉는다.
"묘한 이야기지. 너한테는 아직 이야기 안 했나? 그 녀석이 사세보에 가기 전에 내게 이야기해준 건데――"
너도 알다시피 치에코의 남편은 유럽 전역 중에 지중해 방면으로 파견된 "A――"의 승조 장교였지. 동생 녀석은 남편이 집을 비운 동안 내게 와있었는데, 전쟁이 마무리될 쯤부터 대뜸 신경쇠약이 심해졌지. 그 주된 원인은 이제까지 한 주에 한 번씩 반드시 오던 남편의 편지가 툭 끊긴 탓인지도 몰라. 그럴만하지. 치에코는 결혼하여 반 년도 되지 않은 새에 남편과 헤어져 버린 거니까. 그 편지를 기다리는 건 거리낌 없던 나마저 놀리는 게 지독하다 느껴질 정도였어.
마침 그때였지. 어느 날――그래그래, 그날은 기원절이었을 거야.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지독히 추운 오후였는데, 치에코는 오랜만에 카마쿠라에 놀러 간다고 말했지. 카마쿠라에는 어떤 사업가의 아내가 된 녀석의 학교 친구가 살고 있었어――그런 데에 놀러 간다잖아, 비까지 내리는데. 일부러 카마쿠라까지 놀러 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나는 물론이고 우리 아내까지 다음에 만나는 게 낫지 않겠냐 말했어. 하지만 치에코는 완고히 오늘 꼭 가고 싶다고 하더군. 끝내는 성을 내면서 준비를 해 나가버렸지.
어쩌면 오늘은 자고 와서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지 모른다――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나갔는데 얼마 안 지나니 어떻게 된 건지 비에 젖은 채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선 돌아왔어. 듣자 하니 중앙 정차장에서 호리타바의 전철 정류장까지 우산도 쓰지 않고 걸었다는군. 그럼 왜 그런 짓을 했느냐――그게 묘한 이야기였어.
치에코가 중앙정류장으로 들어가니――아니, 그전에 또 이런 일이 있었지. 그 녀석이 전철에 탔는데 아쉽게도 자리가 가득 차있었어. 그래서 손잡이를 붙들고 있자니 눈앞의 유리 창문에 희미하게 바다 경치가 비쳤다는군. 전철은 그때 신보쵸 거리를 달리고 있었으니 바다 풍경이 보일 리도 없어. 하지만 바깥 거리가 투명하게 보이는 데다가 물결이 움직이는 것도 보였지. 특히 창문에 비가 맺혀 수평선마저 희미하게 보였어――그런 말에서 생각해 보면 치에코는 이미 그때 신경이 어떻게 됐었던 거야.
그렇게 중앙 정류장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있던 짐꾼 하나가 대뜸 치에코한테 인사를 했다지. 그러고는 "남편분께서는 잘 지내시나요"하고 말했어. 이것 또한 묘했을 게 분명해. 하지만 더 묘했던 건 치에코가 그렇게 말하는 짐꾼을 별로 묘하게 여기지 않았단 점이야. "고마워. 근데 요즘 들어 어떻게 된 건지 편지가 안 와서 말야."――치에코는 그렇게 짐꾼에게 인사마저 했다지. 그러자 짐꾼은 다시 한 번 "그럼 제가 남편분을 찾아뵐까요"하고 말했어. 찾아 보니다 해도 남편은 먼 지중해에 있지――그렇게 생각한 순간 치에코는 이 익숙지 않은 짐꾼의 말이 미치광이처럼 들린다는 걸 깨달았어. 하지만 되물으려던 차에 짐꾼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인파 속으로 숨어 버렸지. 그 후로 치에코는 아무리 찾아도 두 번 다시 그 짐꾼을 찾지 못 했어――아니, 찾지 못 했다기보다도 그전까지 분명히 보았던 짐꾼의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떠오르지 않았다는군. 그러니 짐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동시에 어느 짐꾼이나 그 남자로 보였지. 그렇게 치에코는 어쩐지 그 수상쩍은 짐꾼이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 그런 마당이니 카마쿠라는 고사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마저 꺼림칙해지지. 치에코는 끝내 우산도 쓰지 않고 퍼붓는 비를 맞으며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정류장에서 도망쳐 온 거야――물론 그런 이야기는 치에코의 신경 탓일 테지만 그때 감기에 걸린 거겠지. 다음 날부터 이래저래 사흘 동안 줄곧 높은 열을 내며 "당신, 참아주세요"니 "왜 돌아오지 않는 거에요"니 어쩐지 남편과 대화하는 듯한 헛소리만을 했지. 하지만 카마쿠라행의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감기가 나은 후에도 짐꾼이란 말만 들으면 하루 종일 입조차 제대로 열지 않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한 번은 어딘가의 운송 업체 간판에 그려진 짐꾼을 본 적이 있었지. 녀석은 그 앞까지 가지도 않고서는 돌아가 버리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어.
하지만 이래저래 한 달쯤 지나니 녀석의 짐꾼 공포증도 많이 내려 간 듯했어. "언니, 쿄카의 소설 중에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한 짐꾼이 나오지요? 제가 이상한 꼴을 겪은 건 그 탓일지도 모르겠어요"――그때 치에코는 우리 아내에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는군. 하지만 삼월 며칠부터는 다시 짐꾼을 두려워했어. 그 후로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치에코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정류장에 가지 않았지. 네가 조선으로 갈 때에 그 녀석이 배웅 나오지 않은 것 역시 짐꾼이 무서워서 그랬다는군.
그 3월 며칠인가에는 남편의 동료가 미국에서 2년 만에 돌아왓지――치에코는 그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아침부터 집에서 나섰는데, 너도 알다시피 그 카이와이란 곳은 장소 탓에 낮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 그 쓸쓸한 거리에 풍차 팔이 수레 하나가 잊힌 것처럼 놓여 있었지. 마침 바람이 강하고 어두운 날이어서 수레에 꽂힌 알록달록한 풍차가 눈이 어지럽게 돌았어――치에코는 그런 경치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지나가는 길에 문득 눈길을 주니 짐꾼들마냥 붉은 모자를 쓴 남자 하나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지. 물론 그건 풍차 장수가 담배인지 뭔지를 피우던 걸 거야. 하지만 붉은 모자를 본 치에코는 어쩐지 정류장에 가면 또 이상한 일이라도 일어날 거 같은 예감 같은 게 들었다는군. 한 번은 발걸음을 돌릴 생각까지 했다나 봐.
하지만 다행히 정류장에 가서도 맞이하기 전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단지 남편의 동료를 앞에 둔 채 일동이 어두운 개찰구를 넘으려 하니, 누가 녀석의 뒤에서 "남편은 오른팔에 상처를 입으셨다 합니다. 편지는 그래서 못 쓰신다네요."하고 말을 걸었다는군. 치에코는 놀라서 돌아 보았지만 짐꾼은 찾아 볼 수 없었어. 있는 건 역시나 얼굴이 익숙한 해군 장교 부부뿐이었지. 물론 이 부부가 대뜸 그런 말을 할 리도 없으니, 목소리가 들린 건 확실히 묘하다 할 수밖에 없지. 어찌 됐든 짐꾼을 보지 못 한 게 치에코는 기뻤을 테지. 녀석은 그대로 개찰구를 나서서는 역시 다른 녀석과 같이 남편의 동료가 승강장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는 걸 보내주었지. 그러자 다시 한 번 뒤에서 "아내분, 남편께서 이번 달 중에 돌아오신다네요."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 그때도 치에코는 돌아 보았지만 배웅 나온 남녀 이외에 짐꾼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뒤에만 없을 뿐이지 앞에는 짐꾼 둘이 자동차에 짐을 옮기고 있었지――그 중 한 사람이 무슨 생각인지 대뜸 치에코를 돌아보며 히죽 웃어 보였어. 치에코는 그걸 봤을 때엔 주위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색이 달라졌다지. 하지만 녀석이 진정해서 보니 둘인 줄 알았던 짐꾼은 한 명 말고는 짐을 다루고 있지 않았어. 심지어 그 한 명은 방금 웃은 사람과 다른 사람이었지. 그럼 웃어 보인 짐꾼의 얼굴은 이번에야말로 기억했을까 하면 여전히 기억이 희미하다는군. 아무리 열심히 떠올리려 해도 붉은 모자를 눌러 쓴 눈코가 보이지 않는 얼굴 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이게 치에코의 입으로 들은 두 번째 묘한 이야기야.
그 후 한 달 가량 지나니――네가 조선에 간 전후일 텐데 정말로 남편이 돌아왔어. 오른팔에 부상을 입어 한동안 편지를 쓰지 못 했다는 것 역시 이상하게도 사실이었어. "치에코 씨는 남편을 사랑하니까 자연스레 알게 된 거예요"――우리 아내는 그 자리서 그 녀석을 골려 먹었지. 그로부터 또 반 달이 지나 치에코 부부는 남편의 부임지인 사세보로 가버렸어. 거기에 이른 후인지 이르기 전인지는 몰라도 그 녀석이 보낸 편지를 읽어 보니, 놀랍게도 세 번째 묘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지. 치에코 부부가 중앙 정류장을 찾았을 때, 부부의 짐을 옮겨준 짐꾼이 인사라도 하려는 건지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 창문에 고개를 내밀었다는군. 그 얼굴을 본 남편은 불쑥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반쯤 부끄럽다는 양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나 봐――남편이 마르세유에 상륙했을 때 몇몇 동료와 어떤 카페에 갔다지. 그러니 대뜸 일본인 짐꾼 하나가 테이블 옆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근황을 물었다는 거야. 물론 마르세유 길거리에 일본인 짐꾼이 배회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나면은 어찌 된 영문인지 별로 의아해하지도 않고 오른팔의 부상이나 귀국할 날 따위를 이야기해줬어. 그러는 사이 취한 동료 중 하나가 꼬냑잔을 뒤집어엎었어. 그에 놀라서 주위를 보니 일본인 짐꾼이 어느 틈엔가 카페에서 모습을 감춘 거야. 대체 뭐였던 걸까――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눈은 분명 뜨고 있었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거야. 그뿐 아니라 동료들도 짐꾼은 보지 못 했단 얼굴을 하고 있었지. 그렇게 누구에게도 그 일은 밝히지 않기로 했어. 하지만 일본에 돌아와 보니 치에코는 두 번이나 수상한 짐꾼을 만났다지. 그럼 마르세유에서 본 그 짐꾼인가 했는데 너무 괴담 같기도 하고, 또 명예로운 원정 중에도 아내 생각만 했냐고 비웃음만 살 거 같아서 오늘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지금 얼굴을 내민 짐꾼을 보니 마르세유의 카페에서 본 남자와 눈썹 하나 다르지 않은 거야――남편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어. 하지만 이윽고 불안하다는 양 목소리를 낮추고는 "근데 이상하지 않아? 눈썹 하나 다르지 않다는 건 아는데 왜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 거지? 단지 창문 너머로 얼굴을 본 순간에 그 녀석이구나 하고……"
무라카미가 거기까지 이야기한 차에 카페에 새로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 서너 명은 그의 친구인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볼게. 조선에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찾도록 하지."
나는 카페에서 나와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3년 전, 치에코가 두 번이나 나와 중앙 정류장에서 밀회하기로 한 약속을 깬 데다가, 영원히 정숙한 아내로 살고 싶다는 간단한 편지를 보낸 이유를 오늘 밤 처음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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