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오비쥬츠샤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
가보니 세 개의 방에 칠십여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다들 일본화였다. 하지만 단순한 일본화는 아니다. 하나같이 경영 참패의 여파 같은 서양화 같은 일본화였다. 무엇보다 비단이나 종이에 일본화 도구를 이용해 잘도 이만한 유화 같은 효과를 주었다고 그 점에는 작은 경의를 표했다.
아마추어가 생각해보기를,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에게는 자연이 이런 식으로 보이는 게 분명했다. 반대로 보이는 자연 그대로 그렸기에 이런 그림이 여기까지 와 걸려 있는 셈 아닌가. 일단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다. 하지만 아마추어는 이런 그림을 보면 왜 작가는 에노구자라 대신 팔레트를, 종이나 비단 대신 캔버스를 쓰지 않는 건지 묻고 싶어진다. 그 편이 작가에게도 편리하다면 우리 아마추어가 보기에도 고맙지 않을까 묻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런 그림의 작가는 "우리에게는 자연이 이렇게 보인다. 이렇게 보인다는 건 서양화풍으로 보인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일본화풍으로 보인다는 뜻이다"하고 훌륭한 대답을 할지 모른다. 좋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 중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서양화라 해도 지장 없을 그림이 잔뜩 있다. 이를 테면 요시다 하쿠류 씨의 "오우시우지", 엔도 케이조 씨의 "어린 잎의 숲", 내지는 아나야마 기헤이 씨의 "한여름" 같은 건 전부 그러한 작품들이다. 만약 '우리의 일본화풍'이 이런 거라면, 유감스럽게도 나는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다. 먼저 냉혹히 평가하자면 본래 면도날로 깎아야 할 수염을 나기나타로 깎는 재주에 감복할 따름이다. 그렇게 한 번 감복한 후에는 차라리 면도날을 쓰는 게 더 잘 잘리지 않냐고 묻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칠십몇 점의 그림이 모두 이런 종류라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타케야마 킨세이 씨의 "키미코" 같은 건 적어도 이런 서양의 병폐를 받지 않은 작품이다. 무언가 기발한 게 하다못해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으면 우리 아마추어의 눈에는 새로운 일본화의 존재가치가 의심스럽지 싶다. 좀 더 쓰고 싶은 말은 많지만 원고를 받으러 온 사람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번에는 이쯤에서 펜을 내려놓으려 한다. 나쁜 말은 제삼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 하고 관대하게 봐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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