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은 없다. 환관 둘이 이야기하며 나온다.
――이번 달도 출산이신 왕비가 여섯이나 되십니다. 아이를 밴 분은 몇 십 명이나 되시는지 알 수가 없어요.
――다들 상대를 알 수 없는 건가요?
――한 사람도 알 수가 없네요. 애당초 왕비 분들 저희 말고는 남자가 출입할 수 없는 후궁에 계시니 그런 일은 불가능할 텐데 말이죠. 그럼에도 다달이 출산하시는 왕비가 계시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누가 숨어드는 남자라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을 했죠. 그런데 아무리 보초 병사의 수를 늘려도 왕비들의 출산을 막을 수가 없네요.
――직접 여쭈면 어떻습니까.
――그게 묘해서요. 이래저래 물어보니 숨어드는 남자가 없는 건 아니랍니다. 그런데 목소리뿐이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가요. 그거 이상하군요.
――꼭 거짓말 같은 이야기군요. 어찌 되었든 일이 이렇게 큰데 유일한 단서라고는 그 수상한 남자뿐이니까요. 어떻게든 예방책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딱히 이렇다할 명안은 없군요. 어쨌든 그 남자가 오는 건 사실이지요?
――그건 그렇지요.
――그럼 모래를 깔아 보는 건 어떨까요. 그 남자가 하늘이라도 나는 거면 모를까 걸어온다면 발자국이 남을 테니까요.
――오, 그거 묘안이로군요. 그 발자국을 찾아 쫓으면 잡을 수 있겠지요.
――뭐든지 해보기 나름이라니까요. 어서 시도해보죠.
――그래야지요.(두 사람 모두 물러난다.)
×
시녀가 거창하게 모래를 뿌리고 있다.
――자, 다 뿌렸지요?
――아직 저 구석이 남아 있네.(모래를 뿌린다.)
――이제 복도로 가자.(다들 사라진다.)
×
두 청년이 촛불 아래에 앉아 있다.
B 거기에 가게 된지 벌써 1년이나 됐네.
A 빠르기도 해라. 1년 전까지는 실존이니 최고선이니 하는 말에 식상해져 있었는데.
B 이제는 아트만이란 말마저 까먹게 생겼어.
A 나도 진작에 "우파니샤드의 철학아, 안녕"이야.
B 그땐 잘도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걸 진지하게 생각했단 말이지.
A 뭐 그때는 단지 생각할만한 걸 말하던 거뿐이야. 생각이라면 요즘에 더 하고 있지.
B 그런가? 나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죽음 따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A 그럴 수 있다면 그래도 좋지.
B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걸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 아냐?
A 하지만 서로 죽을 때가 있으니 말이야.
B 아직 1, 2년 만에 죽을 거 같지는 않은데.
A 모르지.
B 그야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걸 걱정해서야 재밌는 건 무엇 하나 할 수 없게 되잖아?
A 그건 아니지. 죽음을 예상하지 않는 쾌락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잖아.
B 나는 무의미든 뭐든 죽음 따위를 예상할 필요는 없지 싶어.
A 하지만 그래서야 제 스스로 기만하며 사는 꼴 아냐?
B 그건 그럴지 모르지.
A 그럼 꼭 지금 같은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지. 너도 기만을 깨기 위해 이렇게 생활하는 거잖아.
B 어찌 됐든 나는 이제 사색할 생각이 없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이러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A (아쉽다는 양) 그렇다면 그래도 되지만.
B 되지도 않는 의논하다 날 지나겠다. 슬슬 갈까.
A 그래.
B 그럼 그 입으면 보이지 않는 망토 좀 집어줘.(A 집어서 B에게 건넨다. B 망토를 입자 모습이 사라진다. 목소리만 남는다.) 자, 가자.
A (망토를 입는다. 마찬가지로 사라져 목소리만 들린다.
밤서리가 내려온다.
×
목소리만 들리는 암흑.
A의 목소리 어둡네.
B의 목소리 잘못하다 네 망토 자락 밟을 뻔했다.
A의 목소리 분수 소리가 들리는군.
B의 목소리 그래. 노점 밑까지 온 거야.
×
많은 여자가 전라로 앉고, 서고, 누워 있다. 새벽.
――오늘 밤은 아직 안 왔네.
――벌써 달이 기울고 있어.
――빨리 오면 좋을 텐데.
――곧 목소리가 들려도 될 시간인데 말야.
――소리만 들리는 건 부족하단 말이지.
――그러게. 그래도 피부는 느껴지잖아.
――처음엔 무서웠는데.
――난 하루 종일 떨었는걸.
――나도 그래.
――그러고 있으니까 "떨지 마"라고 말하더라?
――그러니까.
――더 무서웠는데.
――그분은 낳으셨대?
――진작 낳으셨지.
――기뻐하시겠지.
――애가 귀엽더라.
――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
――어머 싫어라. 나는 그럴 생각 없어.
――그래?
――응, 싫잖아. 남자한테 사랑 받는 게 좋아.
――어머나.
A의 목소리 오늘밤은 아직 불이 들어와 있군. 너희 피부가 푸른 비단 안에서 움직여 아름다운걸.
――어머 오셨네.
――이리 오세요.
――오늘 밤은 이리 오세요.
A의 목소리 너는 금색 팔찌를 하고 있구나.
――네, 왜요?
B의 목소리 아무것도 아냐. 네 머리는 자스민 향이 나는군.
――네.
A의 목소리 너는 아직 떨고 있구나.
――기쁜 거예요.
――이리 오세요.
――아직도 거기 계세요?
B의 목소리 네 손은 부드러운걸.
――언제라도 귀여워해 주세요.
――오늘 밤은 다른 사람한테 가면 싫어요.
――꼭이에요, 알았죠?
――아, 아아.
여자 목소리가 점점 신음이 되어 끝내는 들리지 않게 된다.
침묵. 불쑥 수많은 병사가 창을 들고 어디선가 나타난다. 병졸의 목소리.
――여기 발자국이 있다.
――여기도 있다.
――저기다, 저기로 도망쳤다.
――놓치지 마라, 놓치지 마라.
소동. 여자는 다들 비명을 지른다. 병졸들은 발자국을 찾아 뒤를 쫓는다. 불이 꺼지고 무대가 어두워진다.
×
A와 B가 망토를 입고 나타난다. 반대 방향에서 검은 복면을 한 남자가 다가온다. 희미하게 어둡다.
A와 B 누구냐.
남자 너희도 내 목소리를 모르지는 않겠지.
A와 B 누구냐.
남자 나는 죽음이다.
A와 B 죽음?
남자 그렇게 놀랄 거 없다. 나는 과거에도 있었다. 지금도 있다. 앞으로도 있겠지. 어쩌면 '있다'고 할 수 있는 건 나뿐일지 모른다.
A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냐.
남자 내 볼일은 항상 하나밖에 없을 테지.
B 그 일로 온 거냐. 아아, 그 일로 온 거냐.
A 그래, 그 일로 온 거냐. 나는 너를 기다렸다. 지금이야말로 네 얼굴을 볼 수 있겠지. 내 목숨을 가져가라.
남자 (B에게) 너도 내가 오기를 기다렸나?
B 아니 나는 너 따위는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살고 싶다. 부디 내게도 조금 삶을 맛보게 해다오. 나는 아직 어리다. 내 핏줄에는 아직 따듯한 피가 흐르고 있어. 부디 내게도 조금 내 생활을 즐기게 해다오.
남자 너 또한 내가 부탁에 움직인 적은 없다는 걸 알 터이다.
B (절망하여)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거야. 아아, 왜 내가 죽어야 하는 거야.
남자 너는 철이 든 순간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태양빛을 본 것만으로도 내 자비인 줄 알라.
B 그건 나뿐만이 아냐. 태어날 때에 죽음을 짊어지는 건 모든 인간의 운명이지.
남자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 너는 오늘까지 나를 잊고 있었다. 내 호흡을 듣지 않았다. 너는 모든 기만을 깨려고 쾌락을 찾으면서도 네가 추구한 쾌락 그 자체가 역시 기만에 지나지 않는 걸 알지 못 했다. 네가 나를 잊었을 때, 네 영혼은 굶주려 있었다. 굶주린 영혼은 항상 나를 찾는다. 너는 나를 피하려 하여 되려 나를 불렀다.
B 아아.
남자 나는 모든 걸 없애는 게 아니다. 모든 걸 낳는다. 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인 나를 잊었다. 나를 잊은 건 삶을 잊는다는 뜻이다. 삶을 잊는 자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B 아아.(쓰러져 죽는다.)
남자 (웃는다) 멍청한 녀석 (A에게) 무서워할 거 없다. 좀 더 여기로 와라.
A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무서워하는 겁쟁이가 아니다.
남자 너는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했군. 곧 밤이 지날 테지. 내 얼굴을 잘 보라.
A 그 얼굴이 너인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군.
남자 나는 네 목숨을 받으러 온 게 아니다.
A 아니,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너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다. 나는 목숨을 가져 본들 쓸 곳이 없는 인간이다. 내 목숨을 가져가다오. 그리고 내 괴로움을 덜어다오.
세 번째 목소리 헛소리 마라. 내 얼굴을 잘 봐라. 네 목숨을 구한 건 네가 나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네 모든 행위를 인정한 게 아니다. 내 얼굴을 잘 봐라. 네 잘못을 알았느냐? 앞으로도 살 수 있을지는 네 노력에 달렸다.
A의 목소리 내게는 네 얼굴이 점점 젊어져 보이는군.
세 번째 목소리 (조용히) 동이 트는군. 나와 같이 커다란 세계에 오라.
여명의 빛 속으로 검은 복면을 쓴 남자와 A가 나가는 게 보인다.
×
병졸 대여섯 명이 B의 시체를 끌고 온다. 시체는 전라이며 곳곳에 상처가 보였다.
――용수보살에 관한 속전에서――
'고전 번역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5.06 |
---|---|
세 개의 반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5.05 |
흉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5.03 |
서양화 같은 일본화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5.02 |
어떤 연애 소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0) | 2021.05.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