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키치는 이제 막 서른이 되었다. 그런 데다가 여러 매문업자처럼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내일'은 생각하더라도 '어제'는 자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길을 걷거나 원고용지를 마주하거나 전차에 타고 있을 때에 문득 과거의 정경 하나가 선명히 떠오를 때가 있다. 후각 자극이 종래의 경험을 연상시켜 생기는 결과라고 한다. 또 그 후각 자극이란 것도 도심에 살고 있는 슬픔으로 악취라 불리는 냄새뿐이다. 이를테면 기차 매연 냄새를 맡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다. 하지만 어떤 아가씨의 기억――5, 6년 전에 만난 아가씨의 기억은 그 냄새만 맡으면 굴뚝에서 올라오는 불꽃처럼 금세 되살아 난다.
그 아가씨와 만난 건 피서지의 정차장이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그 정차장의 플랫폼이었다. 당시 그 피서지에 살던 야스키치는 비가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오전 여덟 시에 출발하는 하행 열차를 타고 오후엔 네 시 이십 분에 도착하는 상행 열차에서 내리는 일상을 보냈다. 그럼 왜 매일 기차를 탔는가――그런 건 무엇이든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매일 기차를 타면 순식간에 한 다스 정도의 익숙한 얼굴이 생기고 만다. 아가씨 또한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후에는 나나쿠사부터 삼 월 이십 며칠까지 한 번도 만난 기억이 없다. 오전도 아가씨가 타는 기차는 야스키치와 인연이 없는 상행 열차였다.
아가씨는 열여섯이나 열일곱이리라. 항상 밝은 회색 양복에 밝은 회색 모자를 쓰고 있다. 키는 외려 작은 편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얇고 길어 보인다. 특히 다리는――역시 밝은 회색 양말에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은 다리는 사슴 다리처럼 슬림하다. 얼굴은 미안이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야스키치는 아직 고금을 가리지 않고 근대 소설의 여주인공 중에서도 무조건적인 미인을 보지 못 했다. 작가는 여성을 묘사할 경우 대개 "그녀는 미인이 아니다. 하지만……"하고 어떻게든 구분을 두고 있다. 무작정 미인이라 인정하는 건 근대 사람의 면목에 걸리나 보다. 그러니 야스키치 또한 이 아가씨에게 "하지만"이란 조건을 더했다――혹시 몰라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얼굴은 미인이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조금 코끝이 높은 애교가 많은 둥근 얼굴이다.
아가씨는 소란스러운 인파 속에 멍하니 서있는 적이 있다. 인파서 벗어난 벤치 위에서 잡지 따위를 읽는 적이 있다. 혹은 긴 플랫폼 구석을 어슬렁어슬렁 걷기도 한다.
야스키치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아도 연애 소설에 쓸 법한 두근거림을 느낀 적은 없었다. 단지 역시나 얼굴이 익숙한 진수부 사령장관이나 매점 고양이를 볼 때처럼 "있네"하고 생각할 뿐이다. 어찌 되었든 얼굴이 익숙한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만은 품고 있었다. 그러니 이따금 플랫폼에서 아가씨를 찾지 못 하면 무언가 실망에 비슷한 걸 느꼈다. 무언가 실망에 비슷한 걸――그마저도 통렬히 느낀 건 아니다. 야스키치는 실제로 고양이 이삼일 정도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에도 똑같은 섭섭함을 느꼈다. 만약 진수부 사령장관도 어느 날 갑자기 급사하면――이 경우에는 조금 의문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고양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멋대로 아쉬워하기는 할 터이다.
그런데 삼 월 이십며칠, 미적지근하며 구름 낀 오후였다. 야스키치는 그날도 근무처에서 네 시 이십 분에 도착하는 상행 열차를 탔다.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조사하는 일에 지쳐 있던 탓인지 기차 안에서도 평소처럼 책을 읽거나 하지는 않은 듯하다. 단지 창가에 기대어 봄이 찾아온 산이나 밭을 바라보았던 걸로 기억했다. 언젠가 읽은 영문 소설에 평지를 달리는 기차 음을 "Tratata tratata Tratata"로 묘사하고, 철교를 건너는 기차 소리를 "Trararach trararach"로 묘사한 적이 있다. 확실히 멍하니 귀를 기울여 보니 그렇게 들리는 거 같기도 하다――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야스키치는 우울감에 젖은 채로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피서지 정차장에 내렸다. 플랫폼에는 조금 전에 도착한 하행 열차도 정차해 있다. 그는 인파에 뒤섞여 문득 기차를 내리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자――의외로 아가씨였다. 야스키치는 앞서 적은 것처럼 오후에는 이 아가씨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불쑥 눈앞에, 햇빛이 드는 구름처럼 혹은 갯버들꽃처럼 회색으로 덮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물론 "어라"하고 생각했다. 아가씨도 그 순간 야스키치의 얼굴을 본 듯했다. 또 동시에 야스키치는 저도 모르게 아가씨를 향해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은 아가씨는 깜짝 놀랐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아쉽게도 잊어버렸다. 아니, 당시도 그런 걸 확인할 여유는 없었으리라. 그는 "망했다"하고 생각하자마자 곧장 귀가 붉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다――아가씨 또한 그에게 인사를 했다!
겨우 정차장 밖으로 나온 그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분개했다. 왜 또 인사 따위를 해버렸는가? 그 인사는 완벽히 반사적이었다. 번쩍하고 번개가 빛나는 순간에 눈을 깜박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행위는 책임을 져도 되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아가씨는 무어라 생각했으랴? 확실히 아가씨도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건 놀라는 박자에 역시나 반사적으로 한 걸지 모른다. 지금쯤 야스키치를 불량소년 따위로 생각할 거 같다一그래, "망했다" 싶었을 때에 무례함을 사과해야 했다. 그런 것도 알아차리지 못 했다는 건………
야스키치는 하숙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기척이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으로 갔다. 드문 일은 아니다. 그는 한 달 5엔의 집세와 한 끼 50전의 도시락 탓에 세상이 싫어지면 꼭 이 모래 위에 파이프를 피우러 온다. 이날도 구름낀 바다를 바라보며 파이프에 성냥불을 옮겼다. 오늘 일은 이제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반드시 아가씨와 마주하리라. 아가씨는 그때 어떻게 할까? 그를 불량소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일도 오늘처럼 그의 인사에 답할지 모른다. 그의 인사에? 그는――호리카와 야스키치는 다시 한 번 그 아가씨에게 태연히 인사를 할 셈인가? 아니, 인사를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 번 인사를 한 이상 어떤 기회에 아가씨도 그도 인사를 나눌 법하다. 만약 인사한다면……야스키치는 문득 아가씨의 눈썹이 아름다웠던 걸 떠올렸다.
그로부터 칠팔 년이 지난 오늘. 당시의 조용한 바다만은 묘하게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야스키치는 이런 바다를 앞에 두고 한사코 그저 망연히 불이 꺼진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물론 그가 아가씨만을 생각한 건 아니다. 이를테면 곧 집필을 시작할 소설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혁명적 정신에 타오르는 어떤 영어 교사이다. 경골이라 이름 높은 그의 목은 어떤 권위에도 굴할 줄 몰랐다. 하지만 전후로 딱 한 번, 어떤 얼굴이 익숙한 아가씨에겐 실수로 인사를 해버린 적이 있다. 아가씨는 키가 작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얇고 길어 보인다. 특히 회색 양말과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다리는――어찌 되었든 자연스레 아가씨를 생각했던 건 사실일지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오 분 전이었다. 야스키치는 인파로 북적이는 플랫폼을 걸었다. 그의 마음은 아가씨의 만났을 때의 기대에 매달려 있었다. 만나고 싶지 않단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정말 만나지 않는 게 본의치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마음은 강적과 시합을 앞둔 격투기 선수의 구조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잊어서 안 되는 건 아가씨와 마주친 순간에, 무언가 상식을 초월한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묘하게 병적인 불안이었다. 과거에 장 리슈팽은 지나가던 사라 베르나르에게 안하무인히 키스를 했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야스키치는 설마 키스는 하지 않을지라도 대뜸 혀를 내밀거나 눈 밑을 잡아 당길지 모른다. 그는 내심 조마조마하며 찾는 듯 찾지 않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은 곧 유유히 걸어오는 아가씨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숙명을 맞이한 것처럼 똑바로 걸었다. 두 사람은 서서히 접근했다. 열 걸음, 다섯 걸음, 세 걸음――아가씨는 지금 눈앞에 섰다. 야스키치는 머리를 들어 올린 채 똑바로 아가씨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가씨 또한 침착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아무 일도 없다는 양 엇갈렸다.
마침 그 찰나였다. 그는 대뜸 아가씨의 눈에서 무언가 동요 비슷한 걸 느꼈다. 동시에 또 온몸에서 인사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아가씨는 그의 뒤에서 조용히 길을 지났다. 햇빛이 드는 구름처럼 혹은 갯버들꽃처럼………
20분가량이 지난 후, 야스키치는 기차를 타고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다. 아가씨는 꼭 눈썹만 아름다웠던 게 아니다. 눈 또한 청량한 흑색이었다. 위를 향한 코도……하지만 이런 걸 생각하는 건 역시 사랑일까?――그는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했는가. 이 또한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야스키치가 기억하는 건, 언젠가 그를 덮치려 한 희미한 우울감뿐이었다. 그는 파이프에서 올라오는 한 줄기 연기를 바라보며 잠시 이 우울 속에서 아가씨만을 생각했다. 기차는 물론 그동안에도 아침 햇살을 받는 산들 사이를 달리고 있다. "Tratata tratata tratata trarar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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