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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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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어두운 겨울의 오후였다. 나는 요코스카발 이등 객차 구석에 앉아 멍하니 발차 기적을 기다렸다. 벌써 전등의 불이 들어온 객차 안에는 보기 드물게 나 말고는 한 명의 손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밖을 들여다보니 어두운 플랫폼에도 웬일로 배웅하는 인기척마저 끊겨 있었다. 단지 우리에 갇힌 작은 개 한 마리가 이따금 쓸쓸하게 짖을 뿐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당시의 내 심정과 닮아 있는 광경이었다. 내 머리 위에는 말로 못 할 피로와 권태가 마치 눈구름 낀 하늘처럼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로, 그 안에 담겨 있던 석간을 꺼내 볼 기운마저 들지 않았다.
 이윽고 발차 기적이 울렸다. 마음이 살짝 안정되는 걸 느끼며 뒤쪽 창틀에 고개를 얹고서, 눈앞의 정차장이 뒤로 밀리기 시작하는 걸 저도 모르게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격한 게다 소리가 개찰구에서 들린다 싶더니, 곧 차장의 매도 소리와 함께 이등 객차의 문이 열려 열셋이나 열 네쯤 먹은 소녀 하나가 어수선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한 번 덜컹 흔들린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씩 뒤로 밀려가는 플랫폼의 기둥, 두고 가는 듯한 운수차, 그리고 차내의 누군가에게 축하 인사를 하는 붉은 모자――그런 모든 게 창문으로 불어오는 매연 속에서 잔상처럼 뒤로 쓰러져 갔다. 나는 겨우 마음이 조금 안정되어 궐련에 불을 붙이며 처음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기름기 없는 머리를 뒤로 모아 묶어 올리고, 옆으로 잡아 끈 흔적이 있는 갈라진 두 뺨을 불쾌할 정도로 붉게 상기시킨 참으로 촌뜨기 같은 소녀였다. 심지어는 때가 낀 황록색의 털실 머플러를 축 늘어 틀인 무릎 위에는 커다란 보자기가 놓여 있다. 또 그 보자기를 품은 동상 기미 있는 손에는 삼등 열차의 붉은 표가 소중히도 쥐여져 있었다. 나는 그 소녀의 볼품없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소녀의 복장이 불결한 것도 역시 불쾌했다. 마지막으론 이등과 삼 등을 구별하지 못 하는 우둔한 마음에 화가 났다. 때문에 담배에 불을 붙인 나는 이 소녀의 존재를 잊고 싶다는 심리도 더해져 이번에는 주머니 속 석간을 막연히 무릎 위에 펼쳤다. 그러자 석간의 종이 위로 내려오던 외광이 대뜸 전등 빛으로 바뀌어 인쇄질이 안 좋은 몇 란의 활자가 의외일 정도로 선명히 내 눈앞에 떠올랐다. 당연한 이야기로, 기차는 지금 요코스카선에 많은 첫 터널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전등 빛을 받게 된 석간의 지면을 훑어도 역시 우울함을 풀 수는 없었다. 세간은 너무나도 평범한 일로 가득했다. 강화 문제, 신랑신부, 비리 사건, 사망 광고――나는 터널에 들어선 순간 기차가 달리는 방향이 반대가 된 듯한 착각을 느끼며, 그러한 삭막한 기사들을 거의 기계적으로 읽어갔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역시 그 소녀가 마치 비속한 현실을 인간으로 꾸민 듯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해야만 했다. 이 터널 속 기차와 이 시골 소녀, 그리고 평범한 기사로 가득 찬 석간――이러한 게 상징이 아니면 무엇이랴. 이해하기 어렵고 하등하며 지루한 인생의 상징이 아니면 무엇이랴. 나는 모든 게 하찮아져 읽다 만 석간을 던지고는 다시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죽은 듯이 눈을 감고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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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몇 분인가가 지난 후였다. 문득 무언가에게 겁박 당한 듯한 심정이 들어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그 소녀가 건너편 자리서 내 옆으로 옮겨 와 창문을 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유리 문은 좀처럼 마음 같지 않은 듯했다. 갈라진 뺨은 이윽고 붉어져서 이따금 콧물을 흘쩍이는 소리가 작은 숨소리와 함께 바쁘게도 귀에 들어왔다. 그러한 모습은 물론 내게도 어느 정도의 동정심을 들게 했다. 하지만 기차가 터널에 들어가려 하는 건 저녁 놀 속에서 갈라진 풀만이 밝게 빛나는 양쪽의 산중턱이 근처 창문에 와있는 것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녀는 일부러 닫혀 있는 창문 덮개를 내리려 했다――나는 그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내게는 단순히 이 소녀의 변덕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여전히 배 밑바닥에 험악한 감정을 쌓으며 동상 걸린 손이 유리 창문을 막으려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마치 영구히 성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냉혹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굉음과 함께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는 동시에, 소녀가 열려던 유리 창문이 기어코 아래로 뚝하고 떨어졌다. 그렇게 열린 사각의 구멍에서는 석탄을 녹인 듯한 어두운 공기가, 살짝 숨쉬기 괴로운 연기가 되어 차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본래 목이 좋지 않았던 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을 새도 없이, 연기를 얼굴로 받은 덕에 거의 숨도 쉬지 못 하고 기침을 해야 했다. 하지만 소녀는 나를 신경 스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어둡게 부는 바람에 머리를 나부끼며 기차의 진행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매연과 전등의 빛 속에서 바라보았을 때, 창밖이 서서히 밝아져 그곳에서 흙냄새나 풀냄새, 물 냄새가 시원히 들어오지 않았다면, 기어코 기침을 해버린 나는 이 누군지 모르는 소녀를 무작정 혼을 내서라도 원래대로 창문을 닫게 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차는 이미 터널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와 산과 산에 둘러싸인 어느 허름한 외각의 건널목을 지나고 있었다. 건널목 근처에는 하나같이 볼품없는 초가집이나 기와지붕이 비좁게 세워져, 건널목지기가 흔들고 있을 마냥 하얀 깃발이 울적하게 저녁 하늘을 흔들고 있었다. 겨우 터널을 빠져나왔다――그때, 쓸쓸한 건널목 울타리 너머에서 나는 뺨이 붉은 세 남자아이가 밀치기 놀이를 하며 서있는 걸 보았다. 다들 이 어두운 하늘에 짓눌렸나 싶을 정도로 키가 작았다. 또 외각의 음험한 풍경과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이 기차가 지나는 걸 보자마자 일제히 손을 드는 걸로 모자라, 가녀린 목을 한없이 높이며 영문 모를 환성을 열심히도 질렀다. 그러자 그 순간이었다. 창문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던 그 소녀가 동상 걸린 손을 기세 좋게 좌우로 흔들더니, 곧 가슴이 뛰는 듯한 따스한 햇살 색으로 물든 귤이 대략 대여섯 개 가량 기차를 지켜보던 아이들 위로 떨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걸 이해했다. 소녀는, 아마 보공처를 찾아가는 이 소녀는 그 품에 담아두었던 귤 몇 개를 창문으로 던져 일부러 건널목까지 배웅 나온 동생들을 치하해준 것이다
 저녁 색을 두른 외각의 건널목과 아기새처럼 소리를 지른 세 아이, 그리고 그 위에 떨어진 선명한 귤의 색――모든 건 기차 창밖에서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내 마음 위에는 애달플 정도로 확실히 이 광경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 광경에서는 어떤 정체 모를 밝은 마음이 올라오는 걸 의식했다. 나는 감정이 격양되어 고개를 들고서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보듯이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는 어느 틈엔가 내 앞자리로 돌아가 여전히 갈라진 뺨을 황록색 털실 머플러에 묻으며, 커다란 보따리를 품은 손에 삼등 열차의 표를 쥐고 있었다 …………
 나는 이때 처음으로 말로 다 못 할 피로와 권태를, 그리고 또 이해할 수 없고 하등하며 지루한 인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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