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달과 메리메를 비교할 경우 스탠달은 메리메보다도 위대하지만 메리메보다 예술가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건 메리메보다도 작품 하나하나에 혼신을 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담을 재능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선 키쿠치 칸 또한 문단의 후배들과 비교할 경우 꼭 탁월한 예술가라고는 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 중에서 그림적 효과를 담아야 할 묘사는 이따금 파탄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향이 존재하는 한, 섬세한 효과를 즐기는 향락가에겐 어떠한 그의 걸작이라도 충분한 만족은 주지 못 하리라.
쇼와 골스워즈를 비교할 경우 쇼는 골스워즈보다도 위대하지만 골스워즈보다도 예술가가 아니라 한다. 그 대부분은 순수한 예술적 감명 이외에 작가의 인생관이나 세계관 같은 사상을 토로하는데 서두른단 의미리라. 이런 의미에서 키쿠치 칸 또한 문단의 후배들과 비교할 경우, 소위 순수한 예술가는 아니다. 이를테면 그가 세상에 나온 이후로 테마 소설이 일어선 게 그런 걸 말해주고 있다. 이런 경향이 존재하는 한, 그림에서 전설을 구축한 것처럼 문예에서도 사상을 구축하려는 예술상의 일신론에는 키쿠치의 작품 중 대부분은 충분한 만족을 주지 못 하리라.
이 두 점을 생각하면 키쿠치 칸이 예술가인지 아닌지 의문을 느끼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 두 "예술가"란 말은 제각기 한정된 말이다. 첫 번째의 "예술가"란 자격은 이를테면 멜리메와 비교할 경우 스탠달에게도 부족했다. 두 번째의 "예술가"란 자격은 좀 더 좁은 거처의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키쿠치 칸의 작품을 논할 때에 이러한 척도로만 재려는 건 타당성이 결여된 셈이니 비난을 면할 수 없으리라. 그럼 키쿠치 칸의 작품에는 이러한 걸 제한 후로도 무언가 현저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가치를 묻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점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무언가 현저한 특색?――세간은 분명 나와 함께 여러 특색을 셀 수 있으리라. 그의 구상력, 그의 성격 해부, 그의 페이소스 1――물론 그러한 것들이 그의 작품에 광채를 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배후에 또 하나――아니, 그보다도 훨씬 의미가 깊은 흥미로운 특색을 지적하고 싶다. 그 특색이란 무엇이랴? 그건 도덕적 의식에 뿌리내린 어떤 것에도 용서 없는 리얼리즘이다.
키쿠치 칸의 감상을 모은 "문예춘추" 속에 "현대 작가는 누구라도 인도주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누구도 리얼리스트이다."는 구절이 있다. 현대 작가는 그가 말하는 것처럼 대개 이런 경향을 가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 작가 중에서도 이 경향이 가장 현저한 게 바로 키쿠치 칸 본인이다. 그는 작가 인생을 시작할 때, 에고이즘 작가란 꼬리표를 받았다. 그가 곳곳에서 에고이즘을 보인 건 물론 이러한 리얼리즘을 뒷받침하기 위함이리라. 하지만 그를 리얼리스트로 만드는 건 명백히 도덕의식의 힘이다. 모래 위에 세워진 옛도덕을 부수고 바위 위에 새로운 도덕을 쌓으려는 내적 요구의 힘이다. 나는 이전에 그와 함께 선이나 아름다움 따위를 논할 때에, 이런 그의 풍모를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야 선은 아름다움보다 중대하지. 나한테는 무엇보다도 중대해."――그에게 선이란 아름다움보다 중대했다. 그 후, 그의 작가 인생은 이 선을 탐구하기 위한 창작 노력이라 칭해도 좋다. 이러한 도덕의식에 뿌리내린 리얼리틱한 소설이나 희곡――현대는 그 점에, 아마 그 점에만 그들의 대변자를 찾아내고 있다. 그가 곧 명성을 얻은 건 당연한 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는 제1고등학교 제학 중에 "웃는 입센"이라는 제목으로 버나드 쇼를 평론했다. 사람은 그의 희극 속에서 아일랜드 연극이 준 영향을 센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먼저 희곡이나 소설보다 그의 시야에 방향을 준 쇼의 영향을 세고 싶다. 쇼의 말에 따르면 "갖은 문예는 저널리즘이다." 이런 의식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문제로 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키쿠치는 쇼처럼 얇은 선을 고르기보다도 굵은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그림은 섬세한 효과는 부족하더라도 커다란 정열로 가득 차있었단 사실은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천하의 작가 동료만큼 까다로운 감상가가 있을까?) 이러한 사실이 있는 한, 아무리 발을 빼고 보더라도 키쿠치의 역량은 다툴 수 없다. 키쿠치는 Parnassus에 사는 신들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 역량과 풍채와 함께 태연히 Pelion에 사는 거인이다.
하지만 용서 없는 리얼리즘을 사용한 후, 키쿠치는 인간의 마음 어디에 신도덕의 기반을 쌓아 올릴까? 아름다움은 이미 버려버렸다. 하지만 진정한 선의 봉우리는 아직도 눈을 뒤덮은 깊은 협곡을 가로 막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키쿠치의 앞날은 결코 간단할 거 같지 않다. 파리나 런던을 보고 온 키쿠치――그건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가장 보고 싶은 그는 그 봉우리에 걸친 신비한 무지개를 올려다 본 키쿠치――우리가 알지 못 하는 지혜의 빛을 받은 키쿠치 뿐이다.
- 애조. 애수. 비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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