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먼저 "스물다섯이 되지 않은 사람은 소설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을 말해두고 싶다. 정말로, 열일곱에서 열여덟, 내지는 스무 살에 소설을 써본들 도리가 없지 싶다.
소설을 쓴다는 건 문장이나 기교보다도 먼저 어느 정도 생활을 알고 어느 정도 인생을 생각해 소위 인생관이란 걸 확실히 갖추는 게 필요하다.
어떤 것이나 먼저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을 지녀야 한다. 그전에 쓰는 소설이란 단순한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스무 살 전후의 청년이 소설을 가져와 "봐달라"고 말해본들 무어라 말할 도리가 없다. 어찌 되었든 인생에 자신만의 생각을 갖추게 되면 그게 소설을 쓰는데 제일 중요한 일이지, 그 이상으로 주의해야 할 일은 없다. 실제로 소설을 쓰는 건 훨씬 뒤의 일이다.
소설을 쓰는 연습이란 인생을 어떻게 보는가――즉, 인생을 보는 눈을 차례로 확립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소설을 쓸 때에는 머릿속으로 재료를 생각하는데 서너 달이고 걸리고 막상 쓸 때에는 이삼 일 만에 만들어지고 만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쓰는 수업도 여러 생각을 하거나, 혹은 세상을 보는데 칠팔 년을 들이고 여차 종이에 마주해 적는 건 가장 마지막의 반 년이나 일 년이면 충분하지 싶다.
소설을 쓴다는 건 결코 종이를 향해 펜을 움직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평생과 생활이 제각기 소설을 쓰는 셈이며, 또 그 안에서 소설을 만들고 있다고 해야 한다. 도무지 이러한 본말이 전도된 사람이 많아 곤란하다. 대략 일이 년 가량 문학에 친해지면 금방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소설을 쓴다는 건 종이에 마주하여 펜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일상생활이 소설을 스기 위한 수업이다. 학생이라면 학교생활을, 직공이라면 노동을, 회사원이라면 회사 업무를, 제각기 생활하면 된다. 그렇게 소설을 쓰는 수업을 하는 게 맞다 본다.
그럼 단지 생활만 하면 충분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생활하면서 여러 작가가 어떤 식으로 인생을 봐왔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역시 많은 걸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그러한 많은 작가들이 어떤 인생을 봐왔는지를 참고하여 자신이 새롭게, 자신이 생각한 인생을 보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아무리 작더라도, 아무리 굽어져 있어도 스스로 하나의 인생관을 구축해 올리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관――그런 게 만들어지면 소설도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표현의 형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내 생각으로는――그 작가의 인생관이 세상과 닿고 시대와 닿아 표현된 게 소설이다.
요컨대 소설이란 어떤 인생관을 가진 작가가 세상의 사상을 빌어 자신의 인생관을 발표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기 전에 먼저 스스로의 인생관을 쌓아 올리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아직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인생을 대하는 생각 따위가 또렷이 굳어지지 않고 독특한 걸 지니지 못 한 스물다섯 미만의 청소년이 소설을 써본들, 무의미하며 도리 없는 일이다.
그런 청년 시절에는 단지 여러 작품을 읽고 또 실제로 생활하여 스스로의 인생관을 정확시 쌓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놀이로서 문예를 가까이 두는 사람이나 또 취미로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열일곱, 열여덟에 소설을 쓰든 스무 살에 창작을 하든 그 사람 마음이다. 허나 정말로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은 조용히 참고 자중하며 머리를 기르고 눈을 살찌우고 때를 기다린다는 각오를 해야만 한다.
나 같은 경우도 처음 소설을 쓴 건 스물여덟 살 먹었을 때이다. 그전까지는 소설이란 걸 조금도 써본 적이 없었다. 종이에 마주하여 소설을 쓰는 연습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쓰고 싶은 것, 발표하고 싶은 것, 또 발표할 가치가 있는 것 따위가 머리에 생기면 표현의 형식은 마치 그림자의 형태를 따르듯이 자연스레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소설을 쓰는 데에 잔재주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단편 따위를 잘 정리하는 기교, 앞으로 그런 건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리라.
이만큼 문예가 발달하여 소설이 열성적으로 읽히는 이상, 상당한 문학 재능을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잘 쓰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디서 승부가 갈리는가. 기교 속에 숨겨진 인생관, 철학으로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고로 정말로 소설가가 되기 어려운 사람은 스물두세 살에 제법 괜찮은 단편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은 그러한 자그마한 문예상 놀이에 빠지는 걸 피하고 인생 수업에 전력으로 임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소설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건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옛말에 "귀여운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라 하지 않던가. 그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쓰는 데에는 젊은 시절의 고생이 제일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생활 속 진짜 고생을 아는 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젊은 사람은 인생의 쓴맛을 보는 게 중요하다.
작품의 배후서 생활 속 고생을 찾아 볼 수 없으면 인생미란 게 희박해진다. 그러니 그 사람이 과거에 생활을 했단 사실은 그 작가로서 성립하는 제일의 요소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정말로 작가가 될 사람은 괜한 단편 따위 쓰지 말고 생활에 전념하여 장래에 작가로서 서기 위한 재료를 수집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활하고 또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을 쓰기 위한 제일의 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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