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더운 프록 코트를 여름 양복으로 갈아입고 다른 녀석들과 함께 갑판으로 나가니, 젊은 기관 소위 셋이 다가와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야 신병이니 세 사람하고는 처음 만나지만, 다른 녀석들은 모두 교실에서 한 번은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사이였다. 그러니 나는 살짝 거리를 둔 채 얌전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아무개 소위가 요코스카에서 S와 S의 부인과 둘이서 산책하는 걸 만났더니 잘 사는 거 같아 그날 밤부터 속이 안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른 녀석들은 그 말을 듣고는 아하하 크게 웃었다. 단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S만은 그 안에 끼지 못 했다. 기쁜 얼굴로 히죽히죽 웃었던 것이다. 나는 저녁 햇살을 한가득 받은 군항을 바라보며 새신부를 집에 두고 온 S에게 연민에 가까운 동정을 느꼈다. 그러자니 어째서인지 갑자기 먼 곳에 뚝 떨어진 듯한 쓸쓸함이 들었다.
표적을 끌고 있는 배는 아까부터 두 척의 소증기에 함미를 끌린 채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려 하고 있다. 아마추어의 눈에는 소증기의 추진기가 일으키는 하얀 거품을 보아도, 그 힘이 이 2만 9천톤의 순양함을 얼마나 움직여내는지 알 수 없었다. 먼저 닻을 올린 하루나는 이미 연기를 내뿜으며 서서히 항구의 서쪽을 향해 멀어지고 있다. 그 모습은 장맛비가 그친 하늘 아래에 봉기한 산들의 선명한 녹색과, 눈부신 햇살을 반사하는 수은 같은 해면을 배경 삼아 아름다운 파노라믹한 경치를 만들고 있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내게는 간단히 출항하지 않는 콩고가 살짝 내키지 않아졌다. 때문에 다른 녀석들의 대화에 참여해 그런 마음을 풀려고 했다.
그러자 바로 옆의 해치 아래서 댕댕하고 저녁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렸다. 군함 안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스러운 소리다. 나는 그걸 듣는 동시에 하세에 위치한 고도구점을 떠올렸다. 그곳에선 붉게 칠한 봉과 함께 수상쩍은 징 하나가, 만년청 화분 위에 걸려 있다. 나는 불쑥 군함의 징을 보고 싶어져 다른 녀석들보다 먼저 해치를 내려 징을 치는 수병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막상 직접 보니 그 정체는 징이라 부르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평범하고 얄팍한 놋대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실망을 느끼며, 시무룩하게 사관실의 적갈색 커튼을 넘었다.
사관실에선 커다란 선풍기 몇 개가 머리 위에서 돌고 있었다. 그 아래에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긴 식탁 두 개가 줄지어 있고, 끝자락에 놓인 거울을 넣은 커다란 찬장에는 은색 화분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식탁에 앉으니 곧장 보이가 식사를 가져와주었다. 조용히, 심지어 빠르게 배식해주었다. 나는 생연어 접시를 가리키며 S에게 "군함 보이는 센스가 좋은걸요"하고 말했다. S는 "그러게"하고 맥아리 없이 대답했다. 어쩌면 이건 군함의 보이보다 아내 쪽이 센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녀석들은 다들 같은 식탁에 앉아 핫타 기관장을 상대하며 소림법운의 기합술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래 이 사관실에선 부장 이해 대위 이상의 장교가 모여 밥을 먹는다. 나는 이때 여러 얼굴을 익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다 남자의 얼굴에는 일종의 타입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둘
저녁을 먹은 후, 상갑판에서 최상갑판으로 오르자 어디선가 남자처럼 구는 걸 좋아하는 소위 하나가 와서 우리를 전부함교에 데리고 갔다. 군함 안에서 함수부터 함미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는 이곳밖에 없다. 우리는 사령탑 바깥에 서서 어느 틈엔가 항해를 시작한 함의 전후를 보았다. 눈으로 보기에 대략 15, 16척 정도 되니 갑판 위의 수병이나 장교가 꽤나 작게 보인다. 내게는 이 작은 수병 하나가 측연대 위에 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긴 밧줄의 끝에 달린 분동을 물 안에 던져 넣는 게 특히 재밌었다. 던진다고만 하면 잘 와닿지 않지만, 실은 마치 과거의 무예인이 쇠사슬이라도 쓰듯이 분동이 달린 긴 밧줄을 머리 위에서 붕붕 돌리며 배가 이동에 따라 되도록 멀리 기세 좋게 던지는 것이다. 위에서 보면 던질 때마다 그 얇은 줄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바다 위에서 꿈틀대는 것이다. 그 끝에 달린 분동은 아직 남은 햇살을 받고 빛나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흐음, 위험한 걸 하고 생각하고는 잠시 감탄하며 그 광경만 바라보았다.
그 후로 사령탑 내부나 해도실을 보고 다시 중갑판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좁은 통로에는 이미 해먹이 걸려서, 많은 수병들이 잠들어 있었다. 개중에는 어두컴컴한 조명에 의지하여 책을 읽는 자도 두어 명 가량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자세를 낮추어 해먹 밑을 기듯이 걸었다. 그때 나는 통렬히 '군함 냄새'를 맡았다. 이건 페인트 냄새도 아닐 뿐더러 취사장 냄새도 아니다. 그렇다고 기계기름 냄새도 아니고 인간의 땀내도 아니다. 아마 그 모든 게 혼합된――요컨대 뭐 "군함 냄새"이다. 이건 결코 고등한 냄새는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고개를 들자 한 수병이 읽는 책 표지가 대뜸 내 앞에 와있었다. 표지에는 "천지유정"이라 적혀 있었다――나는 순간 '군함 냄새"를 잊었다. 그렇게 묘하게 소설 같은 심정이 들었다.
그럼에도 해먹 아래를 지나 욕조에 들어가니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욕조는 해수로 끓이고 있다. 그게 하얀 자기 욕조 안에서 명반처럼 파랗게 보였다. T의 말을 빌리자면 "몸이 물들 것 같을 정도로 파랗지." 나는 욕조 안에서 손발을 뻗으며 T에게 교토의 욕실의 강좌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사쿠사의 뱀골탕 이야기를 해주었다――우리의 욕조는 그만큼이나 마음이 편해졌다.
탕에서 나오자 부장이 순찰을 마쳤기에 유카타로 갈아입고 다시 사관실로 갔다. 군함에서는 저녁 후에 한 끼가 더 나온다. 그날 밤은 소면이었다. 나는 거기서 술을 받았다. 유복하지 않은 탓에 술의 좋고 나쁨은 잘 알지 못 했다. 하지만 두세 잔 마시자 곧장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내 옆으로 다가와 "이십 년 전 일본과 지금의 일본은 굉장히 다르지요"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다 남자의 타입에 속하지 않는, 굉장히 좋은 느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듣자 하니 국방 계획인지를 논한다는 모양이다.
셋
나는 적당히 "그렇네요"하고 별지장 없는 대답을 했다. "그렇죠. 그건 제가 말이죠, 제가 확실히 보증합니다. 아시겠나요, 확실히요."하고 그 사람은 취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열정으로 내 잔과 자신의 잔에 번갈아 술을 따르며 꽤나 흐릿한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아까부터 취하지 않은 자에겐 알 수 없는 졸음기에 휩싸여 있었기에 듣는 동안에 점점 대답도 엉성해졌다. 그게 어떻게인지, 혹은 그래서인지 대화 다운 체재를 갖춘 채 진행된 건 전적으로 내가 Yes로도 No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대답으로 교묘히 상대의 이목을 속인 덕이다. 그렇게 속인 우국지사가 야마모토 대위 1라는 걸 알게 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입 다물고 있는 것도 우스우니 자백하는 것인데, 내게는 20년 전의 일본과 오늘날의 일본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사실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이건 췻기를 떨쳐낸 본인을 봐도 야마모토 대위 또한 잘 몰랐던 건지 모르겠다.
적당히 이야기를 끊은 나는 다른 녀석들과 같이 사관실을 나왔다. 그렇게 M과 둘이서 상갑판으로 나와봤다. 밖에서는 어두운 하늘과 바다 사이에 하루나의 탐조등이 혜성 같은 광망을 하얗고 희미한 꼬리를 흘리고 있었다. 함은 아마 상모탄을 항해하고 있으리라. 나는 손잡이를 잡고 저 먼 아래의 해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결이 파랗게 빛나는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아래를 보고 있으면 훌쩍 뛰어들고 싶어져."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M은 그에 대답하지 않고 안경을 걸친 얼굴을 내 옆으로 가지고 와 "야, 하이쿠 하나 지었다."하고 말했다. "어떤 건데?" "멀리 나온 배 울음을 터트리는 밤과 두견새, 어때. S군의 이야기에서 따온 거야."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바다를 보고 해를 보고, 조용히 캐빈으로 자러 갔다.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싶었더니 아까 와있던 핫타 기관장이 밖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열린 문 사이로 기관실 안을 보았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실낙원'의 첫 1장을 떠올렸다. 그렇게 말하면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눈앞에는 무서울 정도로 큰 보일러가 몇 중으로 겹쳐져 분화산 같은 소리를 내며 줄지어 있었다. 보일러 앞의 통로는 굉장히 좁았다. 그 좁은 곳에 매연으로 새까매진 기관병이 유리 안경을 쓴 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어떤 기관병은 삽으로 보일러 안에 석탄을 던져 넣었다. 또 어떤 기관병은 석탄 수레에 석탄을 쌓아 밀었다. 하나같이 보일러에서 나오는 뜨거운 빛을 받으며 무서운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나온 우리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석탄가루가 부딪혔다. 그런데다 여간 더운 게 아니다. 나는 반쯤 어처구니를 잃고 인간이 해내는 게 믿기지 않는 굉장한 노동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가운데 기관병 하나가 내게 그 유리 안경을 빌려주었다. 눈에 걸치고 보일러 입구를 보자, 유리의 녹색 너머에는 태양이 녹아내린 듯한 불덩어리가 폭풍 같은 기세로 불타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유가 불타는 것과 석탄이 불타는 건 아마추어의 눈으로도 구별할 수 있었다. 단지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불기운이었다. 여기서 일하는 기관병이 세 시간의 교대 시간 사이에 제각기 몇 통의 물을 마시는 것도 이해가 갔다.
넷
그러자 기관장이 우리 옆으로 와서 "이게 석탄고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더니 대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잘 보니 측면의 철판에 사람 하나가 겨우 기어갈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마루를 핥다시피하며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높은 곳에 전등이 하나 걸려 있는 게 고작이니 거의 밤처럼 어두웠다. 탄갱 밑바닥에 자리한 듯한 심정이라 생각하면 틀리지 않다. 나는 데굴데굴 구르는 석탄을 밟고서 높은 곳에 놓인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빛의 고리 안에 벌레 같은 게 붕붕 검게 움직이고 있다. 눈이 내리는 날에 하늘을 보면 눈이 재처럼 검게 보인다――그런 느낌이다. 나는 곧장 그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석탄가루란 걸 알아차렸다.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기관장을 생각하면 나와 같은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때에도 두세 명, 그 어두운 석탄고 안에서 석탄을 삽으로 파내는 기관병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묵묵히 운명처럼 움직이고 있다. 바깥에 바다가 있고, 바람이 불고, 해가 닿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일하고 있다. 나는 묘하게 불안해졌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보일러 앞으로 다시 기어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엄청난 노동이, 철과, 석탄과 그 불기운 속에서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거듭되고 있다. 바다 위의 생활은 육지 위의 생활과 다를 바 없이 괴롭다.
엘리베이터로 함 밑바닥에서 올라 중갑판에 위치한 내 캐빈으로 돌아와, 카키색 작업복을 벗는다. 서서히 제대로 된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배 안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있다. 포탑, 수전실, 무선전신실, 기계실, 기관실――검정만 하는 것뿐이지만 간단하지 않다. 어디를 가더라도 공기가 답답할 정도로 뜨뜻미지근하고 여러 기계가 맹렬히 움직이며 철마루와 손잡이가 기름으로 반질반질하여, 나처럼 노동하고 거리가 먼 자는 5분쯤 거기에 있으면 신경이 닳고 만다. 하지만 그 사이에 끊임없이 어떤 생각이 내 머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건 유럽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나 정도의 연령이면 대부분 생각하게 된 어떤 이상적인 생각이다. 지금 이 캐빈의 침상 위에 누워 지친 다리를 뻗으며 가져온 오베르만의 머리를 뒤집어쓰고 있는 동안에도 역시 그런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그 후의 일인데, 저녁을 마치고 사관실 제군과 이야기하고 있지나, 상갑판에서 우왓하는 목소리가 들린 적이 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해치를 열어보니 제4포탑의 뒤에 함내의 수병이 검은산처럼 모여 있었다. 그리고 다들 커다란 입을 맞추며 "용맹한 수병" 군가를 노래하고 있었다. 켑스턴 위에 갑판 사관이 올라가 있는 건 박자를 맞추기 위함이리라. 내가 보기에는 그 사관과 함미의 군함기 같은 게, 천 명 가까이 되는 수병의 머리 위에 구름이 낀 채 저녁놀로 물든 하늘을 가르는 꼴이 먹을 칠한 것처럼 검게 보였다. 아래에서는 다들 괴로운 목소리로 "연기도 보이지 않고 구름도 없고"하고 노래하고 있으리라. 나는 이때도 그 어떤 생각에 휩사였다. 용맹한 군가의 목소리가, 내게는 되려 처량하고 비장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오베르만을 집어 던지고 눈을 감았다. 배가 조금 흔들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다섯
주계장의 안내를 받아 흘수선 아래의 스무 몇 척 되는 창고에 가거나, 군의장의 안내를 받아 찌는 듯한 전시 치료실을 보는 등하니 다리가 꽤나 지쳤다. 그렇게 상갑판으로 나와 수병의 유도를 보고 있으니 기관장이 기합술인지를 보여준다길래 사람을 나누었다.
그 후, 사관차실에 초대받아 다 같이 나가니, 유카타를 입고 소파에 앉아 있던 녀석들이 다들 일어나 우리의 건강과 S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이 캐빈에 있는 건 중소위들이었다. 그러니 굉장히 기운이 좋다. 개중에서도 색이 검고 눈이 크며, 코가 높은 칸사이벤 선생님 따위는 아카기 코헤이 군을 연상시키는 기세로 성대히 몇 미터나 뛰었다. 내게 지라이야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이 선생이었다. 그건 내 머리가 백일발 같았기 때문이라는데, 정작 인상만으로는 본인이 더 지라이야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건 결코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다. 거울만 보면 본인도 바로 알 일이다.
그 선생은 내게 햄이나 파인애플 등 여러 물건을 주었다. 그리고 그 틈틈이 "지라이야 시"하고 부르며 내 컵에 무작정 맥주를 부었다. "오늘 신발도 안 신고 장루 톱에 오른 게 그쪽이랬나요." "저입니다. 저하고 이 사람이죠." 나는 U를 가리켰다. 그와 나는 오늘 아침 비가 개는 틈에 전부 함교에서 마스트를 올라 장루 위로 오른 것이다. "하아, 그쪽이셨군요. 신발도 안 신고 재밌네요. 역시 지라이야라니깐."――대강 이런 느낌이다. 나는 선생과 그런 이야기를 하며 니코틴과 알콜을 뒤섞었다. 그러자니 서서히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아픔은 사관차실을 뒤로한 후로도 집요하게 명치 아래에 머물렀다. 나는 T에게 인단을 받아 그걸 씹으며 캐빈의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렇게 잠들었다. 내가 머스트 위로 모자를 쓴 군함의 꿈을 꾼 게 그날 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밝은 아침, 아침도 먹지 않고 상갑판으로 올라보니 바다색이 확 달라져 있어 놀랐다. 어제까지는 짙은 남색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은 어디를 보아도 아름다운 녹청색을 하고 있다. 거기에 진한 안개가 한가득 내려앉아 있고, 그 안갯속에 둥근 산 형태가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떠올라 있다. 나는 마침 같이 있던 기관장에게 물어 배가 이미 분고수도를 통해 세토 내해에 들어온 걸 알았다. 그렇다면 늦어도 오후 두 시에서 세 시에는 야마구치현 유우마치의 정박지에 들어갈 게 분명하다.
나는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작 며칠의 항해 생활이 내게 지루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육지에 가까워졌다는 건 어쩐지 유쾌했다. 나는 포탑 가까이서 기관장과 법화경의 이야기를 했다.
이윽고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자, 눈앞에 놓인 40인치의 포신에 노란 암끝검은표범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나는 말 그대로 헉하고 생각했다. 놀란 듯, 기쁜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사람한테 전해질 리는 없다. 기관장은 여전히 어려운 경의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그저 나비를 보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육지를, 밭을, 인간을, 거리를, 또 그 모든 것들의 위에 있는 초여름의 나비와 함께 떠올리고 있었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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