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매결혼으로 충분합니다.
중매결혼과 자유결혼의 득실이란 결국 두 종류의 결혼 양식이 결혼 후의 생활에서 어떠한 행복을 이끌어내고, 어떠한 불행을 가져오는 지로 귀결된다. 하지만 결혼 생활의 행복이란 과연 무슨 뜻이랴. 그것도 생각해야 한다. 굵고 짧게 즐길 것인가. 가늘고 길게 즐길 것인가. 또는 부부간에 충돌이 있는 생활인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또 연애라는 게,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만한 청초고결한 연애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에도 나는 회의를 품고 있다.
실제로 그런 생활이 존재할 수 있는지는 별개로 치부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굵고 길면서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부부 생활을 이상이자 행복으로 생각한다면, 총명한 남녀에게는 자유 결혼이 적합하며 그렇지 않은 남녀에게는 중매결혼이 적합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단 총명이니 청년이니 하는 건 대다수의 경우 일치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경우엔 중매결혼이면 충분하지 싶다.
홀리데이 러브
앞선 내용은 대부분의 경우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무지한 어른이 중매를 서는 결혼은 총명하지 않은 청년 남녀가 자유 결혼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여기서 무지라는 건 이해라는 말의 뜻을 넓게 해석하여 이해하지 못 했음을 뜻한다. 즉 지금 두 사람이 어떠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가, 그게 장래에 어떤 변화를 이룰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일이다. 결혼이 인생에 커다란 시기를 만든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결혼 전의 인물이나 사상이란 건 결혼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으며, 결혼 전의 사랑은 결혼과 동시에 사라진다, 적어도 변형은 하기 마련이다.
결혼 후에 올라오는 새로운 부부애란 인생의 반려로서 배우자를 보는 사랑이지 결혼 전에 느끼는 연애하고는 별개의 것이다. 나는 사랑의 내구성이나 순결성을 의심한다. 사랑의 변화 소멸이란 점에서는 염세적이다. 연애에 도취한다는 게 영원히 계속될 거 같지 않다. 결혼하여 환멸의 비애를 느끼는 건 흔히 듣는 일이지만, 결혼만 아니라 인생이란 게 통틀어 환멸의 연속이지 싶다. 결혼 전에 도취해 있던 연애라도, 그 과정 안에는 여러 환멸이 있을 테고, 결혼 후의 영원한 생활에도 수없는 환멸을 느끼리라. 환멸 하지 않는 내구성의 사랑이란 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홀리데이 러브. 즉 일주일에 한 번의 연애를 주장한다.
또 결혼 후에 환멸을 느낀다면 불쾌한 생활을 계속하기보다는 이혼하는 게 낫다. 상업 계약을 할 적에 해약하면 권리도 의무도 사라져 완전히 무관계해지는 것처럼, 결혼이나 이혼 또한 좀 더 쉽게 생각했으면 한다. 이혼이나 재혼을 죄악시하는 건 너무나 딱딱한 생각이지 싶다. 하물며 맞선 따위를 했을 때, 어느 한 쪽이 환멸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의 의리나 체면 따위를 생각해 유야무야 묻어둔 채 결혼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중매와 자유의 조화
자신이 얼마나 인자한 군주인가. 자신이 얼마나 하늘의 뜻을 받아 군주의 제위에 앉았는가. 그런 걸 어떻게 국민에게 알려야 하냐며 고심한 제왕은 동서를 가리지 않고 잔뜩 있었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 부부 사이에는 허위의 생활, 속이는 생활이 적지 않다. 아이들이 사랑에 빠지고, 나아가서는 결혼하려는 소위 자유 결혼을 믿는 동안에 중매결혼의 갇은 장점을 들려주지 않는 부모는 바보인 동시에, 자신들의 자유 결혼을 형식상의 중매인을 세워 부모를 시작으로 한 주위 사람들의 눈에 훌륭한 결혼처럼 꾸미지 못 하는 아이들, 말을 바꾸자면 부모들이 정식 결혼이란 믿음을 가진 동안에 자유 결혼의 갖은 장점을 들려주지 않는 아이들은, 이 또한 총명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진 부모 자식이 모이면 그게 이상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또 그런 부모 자식만 있어서야 세상이 평화롭게 재미있지 못 하니, 실제로 이렇게 영리한 부모들과 자식들은 드문 편이다.
영국의 희곡 중에 이런 게 있다. 어떤 재산가의 아들이 고용인(메이드) 출신인 한 시골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다 할 말 한 마디 없이 그 소녀와 혼약을 나누게 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화려한 사교계에 내보냈다. 북적이는 사교계에 발을 들여보니, 이제까지 아름다운 줄 알았던 시골 소녀도 아름다운 아가씨, 부인들에게 굉장히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예법, 인품, 언어 사용 등 여러 문제 탓에 결혼 후에 불편해질 게 보였던 아들 쪽이 파혼을 요구한다. 읽는 동안에는 지독한 수단이지 싶었는데, 잘 생각해 보면 그 결과는 아들을 위해서도 소녀를 위해서도, 또 주위를 위해서도 행복――당장은 불행했을지 몰라도――했을 게 분명하다. 할망구가 지독한 짓을 했구나 싶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이만한 준비성을 갖춘 부모는 굉장히 찾아보기 어렵다.
연애를 너무 띄우지 마라.
지금의 젊은이들은 지나치게 연애를 띄어주는 경향이 있다. 연애에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어 있지 않나 싶다. 여자들이 특히 심한 거 같다. 물론 남자들처럼 사회적 생활을 하는 경우가 적으니, 여자들의 성의식이 남자보다도 무겁고, 그만한 귀결로서 연애를 높게 사는 걸지도 모르지만 실로 바보 같은 일이다. 연애라는 건 그렇게 고결하지도 않으며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는다. 서로 '달라지지 않는 거예요', '달라지지 않을 거야'하고 약속한 사이라도 항상 우여곡절이란 게 있으며, 환멸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홀리데이 러브를 주장한다. 혹여 그 연애가 도중의 지장 없이 순조롭게 싹을 틔운다 해도, 결혼으로 소멸되어 전부 형태를 바꾸어 버릴지 모르는 것이다.
자유 결혼이든 중매결혼이든 결혼 생활에는 환멸이 따르기 마련이니,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결혼이란 건 결코 행복한 게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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