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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소세키 공방의 가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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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추위가 매섭게 스며드는 오르막 거리를 오르자 낡은 판잣집 문 앞에 이른다. 문에는 전등이 들어 와 있지만 기둥에 걸린 명패는 거의 존재 여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문을 넘자 모래와 돌이 깔린 길이 나온다. 또 그 돌과 모래 위에는 정원수의 낙엽이 난잡하게 떨어져 있다.
 모래와 낙옆을 밟고 현관으로 향하니 역시나 낡은 격자문 이외에는 벽이라고 할 게 못 됐다. 하나 같이 덩굴에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안내를 구하려면 먼저 마른 덩굴 잎을 치우며 벨 버튼을 찾아야만 한다. 그렇게 겨우 벨을 누르면 불이 들어와 있는 문이 열리고 머리를 묶은 여종 하나가 바로 격자문의 잠금쇠를 풀어준다. 현관 동쪽으로는 복도가 있고 그 복도 난간 밖에는 겨울을 모르는 목적색이 정원을 한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객실의 유리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전등불도 지금은 거기까지 비춰주지 않는다. 아니, 그 빛이 들어 오는 만큼 반대편 건물에 걸린 풍경의 그림자도 되려 짙어져 어둠 속에 숨어버렸을 정도이다.
 유리문으로 손님방을 들여다보니 비가 샌 자국이나 쥐가 좀 먹은 구멍 따위가 하얀 종이를 붙인 천장에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열 첩 가량 되는 바닥에는 붉은 오학선 융단이 깔려 있어 다다미의 상태를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손님방의 서쪽(현관 쪽)에는 경시 당지 두 장이 있고 그중 한 장 위에는 색이 바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마지에 노란 백합 같은 꽃을 누빈 것은 츠다 세이후 씨의 도안인 듯하다. 이 당지의 좌우 벽 쪽에는 썩 질이 좋지 않은 유리문 책장이 있어 서양 서적으로 빼곡했다. 또 복도에 접한 남쪽에는 살풍경한 철격자 서양 창문 앞에 커다란 자단 책상이 놓여 있다. 그 위에는 벼루나 펜이 종이나 법첩과 같게 의외로 깔끔하게 늘어져 있다. 창문이 달린 남쪽벽과 반대된 북쪽 벽에는 항상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조타쿠의 묵죽이 황흥의 "문장천고사"와 인사하던 적도 있다. 목암의 '화개만축국'이 오창석의 목련과 마주한 적도 있다. 하지만 손님방을 장식한 서화는 비단 이 정도가 아니다. 서쪽 벽에는 야스이 소타로 씨의 유화 풍경화가, 동쪽 벽에는 사토 요리 씨의 유화 꽃그림이, 그리고 또 북쪽 벽에는 메이게츠 센지의 무현금 같은 그림이 항상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그런 액자나 그림 밑에는 동병에 담긴 매화나 청자에 담긴 국화가 이따금 꽂혀 있는 건 물론 사모님의 풍류임이 분명하다.
 만약 먼저 온 손님이 없다면 이 손님방을 본 눈을 바로 안방으로 옮겨야 한다. 안방이라 해도 손님방의 동쪽에는 당지도 무엇도 없으니 사실상 한 방이나 다름없다. 다만 여기는 판자가 깔려 있고 중앙에 펼쳐진 낡은 융단 외에는 한 장의 다다미도 깔려 있지 않다. 그리고 동쪽과 북쪽 두 벽에는 서양과 중국, 일본의 신간과 구간이 큰 책장 안에 가득 담겨 있다. 그럼에도 책장이 부족한지 아래 바닥에 깔려 있는 수도 적지 않다. 그런 데다가 남쪽 창가에 놓인 책상 위에도 그림이니 법첩이니 화집 같은 게 난잡히 쌓여 있다. 그러니 중앙에 갈린 낡은 융단도 사방에 줄지은 서적 덕에 화려한 붉은색이 조금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한가운데에는 자단 책상이 놓여 있고 또 그 책상 반대편에는 방석 두 장이 깔려 있다. 동으로 된 도장이 하나, 돌로 된 도장이 둘이나 셋, 펜받침으로 쓰는 대나무 찻잔, 그 안에 만년필, 그리고 옥으로 된 문진을 둔 한 뭉텅이의 원고용지――책상 위에는 그 외에도 돋보기안경 같은 게 놓여 있는 경우도 보기 드물지 않다. 그 바로 위에선 전등이 빛을 내뿜고 있다. 옆에는 세토 각로가 벌레 우는소리처럼 타닥거리고 있다. 만약 밤 추위가 심하면 조금 떨어진 가스난로에도 붉게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책상 뒤편, 두 장을 겹친 방석 위에 어딘가 사자를 방불케 하는 키가 작고 머리가 반쯤 하얗게 변색된 노인이 때로는 편지지에 붓을 놀리고 때로는 시집을 훑으며 홀로 앉아 있다……
 소세키 공방의 가을 밤은 그렇게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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