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라니 참 놀라울 따름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이 그런 대단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잖아. 뭐, 진짜 호박 이야기냐고? 농담은 적당히 좀 해라. 호박은 별명이야. 호박 이치베라고 해서 말야. 요시와라의 말단――좀 더 정확히는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는 호우칸 1이야.
그런 걸 묻는 거 보면 너는 그 녀석을 보지 못 한 모양이네. 그건 좀 아까운걸. 이제는 붉은 옷 2을 입고 있을 테니 보고 싶어도 쉽게는 못 볼 거야. 머리 큰 난쟁이라 해야 하나? 그런 녀석이 프록 코트에 우단 조끼 같은 걸 입고 있으니 우습지. 더군다나 일자로 이마를 훤히 드러낸 머리에 촌마게를 하고 있지. 그것도 순 사기꾼 같아 보이는 걸 말야. 그래서인지 처음 만난 손님은 누구나 독기가 빠져 버려. 그러면 호박 녀석은 부채로 이마를 드러낸 머리를 툭 치면서 "어떠십니까. 신기교파 호우칸도 가끔은 괜찮지요." 썩 좋은 재간은 아니지.
재간하니 하는 말인데, 호박은 이렇다 할 재주가 없었어. 그저 손님을 붙들고 되는대로 떠들 뿐이지. 그게 또 "가만히 들어 줄" 정도도 못 되니 불쌍하지. 물론 손님도 되는대로 맞장구쳐주면 괜찮게 웃어 주지. 말하자면 제 말재간이 통한 게 기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인 셈이지.
그 녀석도 처음에는 그런 게 꽤나 자랑스러웠겠지. 내가 안 이후로도 꽤나 신이 나있는 게 낯간지러울 지경이었지. 근데 말야, 아무리 호박이라도 시종 입만 놀리는 건 아냐. 가끔은 분위기를 잡고 진지한 소리를 할 때도 있지. 하지만 손님 쪽은 호박은 여느 때나 웃기려는 줄만 아니까 아무리 진지한 소리를 해도 역시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트리지. 그 녀석은 요즘 들어 그런 게 부쩍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 거야. 그 녀석이 보기보다 신경질적인 면이 있는 남자거든. 아무리 프록코트에 우단 조끼를 입고 촌마게를 튼 머리를 부채로 때린다 해도 모든 말이 농담이란 건 아니니까. 진지할 때는 역시 진지한 소리를 하지. 경우에 따라서는 손님보다 훨씬 진지한 말을 했을지 몰라――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말이지. 그래도 뭐 녀석이 말하기를 "웃는 사람이 이상한 거야"하는 생각 정도는 옛날부터 있었다는군. 이번 일도 요는 그런 불평이 쌓인 탓이었을 거야.
그야 신문에 나온 것처럼 호박이 우스구모타이후라는 오이란한테 반한 건 사실일 테지. 그리고 그 나라모라는 졸부 또한 타이후한테 반한 것도 사실일 거야. 하지만 그 녀석이라고 그런 사랑 싸움 따위로 사람을 죽일까? 그보다도 그 녀석이 안타까운 건 누구도 그 녀석이 우스구모타이후한테 반했다는 걸 진지하게 받아 들인 사람이 없다는 점이야. 졸부 손님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우스구모타이후마저 그런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하고 있지.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불쌍하지만 무리는 아냐. 상대는 거리에서 손에 꼽히는 오이란이고, 한 쪽은 장애를 가진 땅딸보 호박이니 말야.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들어봤어 봐, 나라도 거짓말이지 싶을걸? 그 녀석은 그게 힘들었던 거야. 반한 상대인 우스구모타이후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걸 괴로워했다지――그래서 벌어진 게 이번 살인이야.
듣자 하니 녀석은 그날 밤도 술에 취해 우스구모타이후에게 다가가 결혼해달라는 소리를 했다는군. 타이후는 평소처럼 농담이지 싶어 웃기만 하지 상대해주지 않았어. 상대해주지 않은 게 전부라면 차라리 양반이지 모종의 박자로 "정말로 나를 반했다면 목숨을 걸어봐요."하고 말한 거야. 더군다나 나라모가 뒤에서 "그럼 나하고 너는 원수지간이구만. 지금 당장이라도 목숨 걸고 싸워야겠어."하고 말했으니 계기부터 글러 먹은 셈이지. 그러자 호박은 이제까지 웃고 떠들던 게 갑자기 혈색을 바꾸어 자세를 고치고는――자네가 보기에 뭘 어쨌을 거 같나? 그 녀석이 탁해진 눈을 깔고는 햄릿 대사를 쓴 거야. 그것도 영어로 했으니 놀랄 지경이지.
다들 황당해 했지――황당할만도 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오이란이든 호우칸이든 영어의 영자도 모를 테니까. 키카쿠도 '오쿠노호소미치' 3의 해석은 할 수 있을 테지만 햄릿은 이름도 듣지 못 했을 테지.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졸부 손님만이 알아 들었지――그 손님은 미국에서 설거지인지 뭔지를 하고 온 덕에 일본의 연극은 지루하다며 오페라의 미스 아무개를 거들던 양반이었으니까. 단지 단순한 농이라 생각한 탓인지 호박이 묘하게 굴며 우스구모타이후를 붙들고 "You go not till I set you up a glass, Where you may see the inmost part of you."같은 소리를 해도 여전히 껄껄껄 웃기만 했다지만――거기까지는 뭐 별 문제 없었어. 그게 햄릿 대사처럼 녀석이 서서히 타이후를 몰아붙일 적에 나라모 대장이 한껏 불쾌하게, 타이밍마저 안 좋게 어디서 들은 건지 "What, ho! help! help! help!"하고 폴로니어스의 대사를 썼다더군. 호박 녀석은 그걸 듣자마자 갑자기 죽은 사람 같은 얼굴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목소리를 높여 "How, now! A rat? Dead for a ducat, dead!"하고 말하자마자 대뜸 나라모의 옆에 놓여 있던 사메자야의 와키자시를 뽑아 상대의 가슴을 찔렀지. 만약 그게 폴로니어스였다면 "Oh! I am slain."라고 말했을 테지만 칼날은 날카로웠고, 급소였지. 손님은 찍소리도 못 하고 죽어버렸어. 피마저 흐르지 않았다는군.
"잘 보라고. 나라고 헛소리만 하는 건 아냐."――호박은 그렇게 말하며 와카자시를 휘둘렀다지. 피도 튀었을 테지만 조끼가 우단이라 거의 눈에 띄지 않았어. 사람을 죽이든 죽이지 않았든 겉보기엔 역시나 땅딸보이자 촌마게에 프록코트를 입은 그 호박 이치베지만, 그래도 그곳에 있던 녀석들에겐 다르게 보였을 거야――아니, 보인 게 아닌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꼴이지. 그러니 그 녀석이 체포되어 끌려 나올 적에는 밧줄로 묶인 손 위로 오동에 봉황자수가 된 옷을 덧입고 있었다는군. 누구 거겠어? 물론 우스구모타이후 거지.
지금도 요시와라에는 그 녀석의 소문이 돌고 있다지. 어찌 됐든 이것만 봐도 알듯이 뭐든지 농담이라 생각하는 건 위험해. 웃으면서 말하든, 혹은 아예 말하지 않든 진지한 건 역시 진지한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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