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잘 받았습니다. 몸 건강 조심하세요.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집니다.
저는 이번 달 초부터 잠시 작업에 임했습니다.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수명이 깎여도 좋지 싶습니다. 지금 하는 작업은 존재 그 자체의 허무성(지금은 존재 그 자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만)을 지성을 통해 극단으로 쫓아보려 합니다. 이 소설을 마치면 제 생활에 비약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이 소설 뒤엔 행동만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사회적 실제 운동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데 모든 건 이 소설을 다 쓴 후에 자신의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허무는 깊어질 대로 깊어진 듯합니다. 그 끝에 처박히나, 빠져나오는가. 이젠 둘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로렌스는 그 끝없는 허무를 육체를 통해 해결한 듯한데 그건 해결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그 소설 속에서 차탈레 부인은 구원받습니다만 메로즈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지성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성이 허무를 끊어낸 후에 문학을 통해 무언가를 건설할 수 있는가, 문학을 버리고 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가. 제가 택할 길은 그 결과를 따라 나아갈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작업은 가을 느즈막쯤에 끝날 테지요. 저는 이제 마냥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알뿐이죠. 그리고 지금 필요한 건 서재뿐입니다. 세간엔 매력이 없습니다. 여러 병 때문에 몸이 꽤나 약해져 있지만 정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건강한 듯합니다. 그리고 소위 세간적인 비애가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 존재를 지금 제가 쓰는 작업 안에서만 발견해 주세요. 제 육체는 당신 앞에선 이미 죽으려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작업도 전부 죽으려 하고 있습니다.
안고
츠세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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