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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3엔에 쿠와테이의 산수화를 사와 서재의 토코노마에 걸어두었더니 놀러 온 남자가 그 앞에 서서 "위작 아닌가."하고 경멸했다. 타키타 쵸인 군도 위아래로 훑고는 "이건 아니죠."하고 한 소리 해버렸다. 하지만 나는 본래 수상한 그림을 찾아내는 걸 무명의 천재에게 경의를 다 하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나는 쿠와테이라 걸어둔 게 아냐. 그림의 완성도가 좋아서 걸어둔 거지."하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산수화를 위작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지기 싫어서 하는 소리라 맹단했다. 그뿐 아니라 몇몇은 "그래, 무명 천재는 싸게 먹혀서 좋지."하고 말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이래서야 아무리 나라도 3엔의 쿠와테이를 위해 조금은 변호를 할 수밖에 없다. 애당초 감정가란 양반들은 흔히 돋보기를 들이밀며 우리 아마.. 2021. 2. 24.
겨울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겨울밤의 기억 중 하나. 평소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자니 12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12시에는 반드시 잠들기로 하고 있다. 오늘 밤도 먼저 책을 덮고, 내일 앉자마자 바로 일할 수 있도록 책상 위를 정리한다. 정리라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원고지와 필요한 서적을 하나로 뭉쳐두는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각로의 불을 정리한다. 항아리병에 주전자의 물을 붓고 그 안에 불을 하나씩 넣는다. 불은 점점 검어진다. 잿소리도 점점 울린다. 수중기도 모락모락 올라온다. 어쩐지 즐거워진다. 무언가 덧없는 느낌도 든다. 잠자리는 작은방에 깔아두었다. 작은 방도 서재도 2층에 있다. 자기 전에는 반드시 아래로 내려가 소변을 본다. 오늘 밤도 조용히 2층에서 내려간다. 가족들의 눈에 들지 않도록 되도록 조용히 2층을 .. 2021. 2. 23.
사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는 잠자리에 누워도 무언가 책을 읽지 않으면 잠들지 못 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는 아무리 책을 읽어도 잠에 들지 못 하는 경우마저 자주 있다. 그런 내 머리맡에는 항상 독서용 전등이나 아달린병 따위가 놓여 있다. 나는 그날 밤도 여느 때처럼 두세 권의 책을 모기장 안으로 들고 가 머리맡의 전등을 밝혔다. "몇 시야?" 옆에서 먼저 자고 있던 아내의 목소리였다. 아내는 아이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 시." "벌써? 난 한 시 밖에 안 된 줄 알았지."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는 그 말에 어울려주지 않았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조용히 자." 아내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작은 목소리로 쿡쿡 웃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머리에 코를 묻고는 조용히 잠들었다. 나는 .. 2021. 2. 23.
미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내가 대학을 졸업한 해의 여름, 쿠메 마사오와 함께 가즈사 이치노미야의 해안가에 놀러 갔다. 놀러 간다고 해도 책을 읽거나 원고를 쓴 건 매한가지였지만, 뭐 바다에 들어가고 산책을 하는 게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어느 저녁. 우리는 이치노미야의 거리를 산책하여 사람 얼굴도 보이지 않게 됐을 적에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이르기 위해서는 통보리사초나 방풍 등이 자란 모래산 하나를 넘어야 했다. 마침 그 모래산 위에 올랐을 때, 쿠메가 무어라 외치더니 모래산을 달려 내려갔다. 나는 왜 저러나 싶었지만 어찌 되었든 무언가 달려야 하는 이유라도 있겠지 싶어 역시나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인기척 없는 모래산 위에 홀로 남겨지는 게 꺼림칙했단 사실도 등을 떠밀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쿠메는 중학생 때 야구.. 2021. 2. 23.
히라타 선생님의 번역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국민 문고 간행회의 '세계 명작 대관'의 제1부 16권의――말하고 보니 조금 길다. 어찌 되었든 국민 문고 간행회의 '세계 명작 대관'의 제1부 16권의 대다수는 히라타 토쿠보쿠 선생님이 번역을 맡으셨다. 히라타 선생님은 아직 한 번 밖에 뵙지 못 했다. 하지만 호탕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는데――요컨대 참으로 왕년의 '문학계' 사람다운, 아직도 산뜻한 선생님이시다. 이런 산뜻한 선생님께서 국민 문고 간행회의 '세계 명작 대관'의 제1부 16권의 대다수를 번역했단 사실은 적어도 내게는 신비하게 비쳤다. 본래 산뜻하단 말에서는 저력을 떠올리기 어렵다. 하지만 히라타 선생님의 번역을 보면 디킨스, 새커리, 램, 메러디스, 제임스, 하디, 와일드, 콘래드 등을 망라하고 있다. 나는 번역은 고사하.. 2021. 2. 23.
눈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겨울날 오후. 나는 중앙선 기차의 창밖 너머로 산맥 하나를 바라보았다. 산맥은 물론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눈보다도 산맥의 피부에 가까운 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산맥을 바라보며 문득 어떤 작은 사건을 떠올렸다. 벌써 4, 5년은 된 역시나 어느 겨울날 오후. 나는 어떤 친구의 작업실에서――허름한 철제 스토브 앞에서 친구나 그의 모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작업실에는 그의 유화 말고는 어떤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다. 담배를 물고 있던 단발 모델도――모델은 혼혈아 같은 일종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자연스레 자랄 속눈썹을 한 올도 남김없이 뽑고 있었다. 대화는 어느 틈엔가 그쯤의 험악한 추위로 옮겨가 있었다. 친구는 정원의 흙이 어떻게 계절을 느끼는지 이..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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