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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928

타바타 일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8월〕27일 아침에 침소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더니 여섯 시가 되었다. 무언가 꿈을 꾼 거 같았는데 떠오르지 않았다. 일어나 얼굴을 씻고 주먹밥을 먹고 서재 책상 앞에 앉았는데 도무지 무언가를 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읽다 만 책을 읽기로 했다. 어쩐지 이상한 논의가 주구장창 적혀 있다. 귀찮아져서 그마저도 내려놓고 배로 누워 소설을 읽었다. 익사할 뻔한 사람의 심정을 조금 공상적으로 과장해 재밌게 표현했다. 이건 읽어 볼만하다 싶었더니 불쑥 요전부터 쓰고 싶었던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발자크인지 누구인지가 소설을 구상하는 일을 '마법 담배를 피우다'라 형용한 적이 있다. 나는 그렇게 마법 담배와 진짜 담배를 섞어 피웠다. 그랬더니 곧 낮이 되었다. 점심밥을 먹고 나니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럴 때에 .. 2021. 7. 24.
나가사키 작품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두컴컴한 유리 찬장 안. 그림, 도자기, 당피, 갱묘, 상아조각, 주금 등등 여러 나라의 사료가 빼곡히 놓여 있다. 초여름 오후. 멀리서 차르멜라의 소리가 들린다. 긴 침묵 후, 시바 코우칸이 그린 네덜란드인, 대뜸 슬픈 탄식을 내쉰다. 코이마리 찻잔에 그려진 카피탄, (네덜란드 인을 보면서) 왜 그런가? 얼굴색이 안 좋은데―― 네덜란드인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금 두통이 있어서―― 카피탄 오늘은 묘하게 푹푹 찌니 말이야. 당피 꽃 사이에 멈춰 선 앵무 (옆에서 카피탄에게)거짓말이에요 카피탄! 저 사람은 두통 같은 게 아니에요. 카피탄 두통이 아니라니? 앵무 사랑인 거죠. 네덜란드인 (앵무를 위협하며) 괜한 말하지 마! 카피탄 (네덜란드인에게) 가만히 있어보게. (앵무에게) 그래서, 누구에게.. 2021. 7. 23.
점귀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하나 우리 어머니는 미치광이였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께 어머니 다운 친근함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항상 머리를 위로 올린 채로 시바에 자리한 집에 홀로 앉아 긴 담뱃대로 뻐끔뻐끔 담배만 피웠다. 얼굴도 작을뿐더러 몸도 작다. 또 얼굴은 어떻게 된 건지 조금도 생기가 없는 회색을 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서상기를 읽고 토구에서 나는 악취란 말과 만났을 때 바로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마른 옆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어머니는 한 번도 나를 돌봐주신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의붓어머니와 일부러 2층까지 올라 가 인사를 했더니 대뜸 담뱃대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대개 조용한 미치광이였다. 나나 누나가 그림을 그려달라 다가가면 네 번 접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주셨다. 그릴 때 .. 2021. 7. 22.
소묘삼제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하나 선조님 선조님은 머리숱이 많지 않아 결혼은 못 하겠다고 각오하였다. 하지만 머리숱이 많지 않은 것 자체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선조님은 피부가 드러난 머리에 이런저런 탈모약을 발랐다. "하나 같이 광고만 못 하네요." 그렇게 말할 때도 목소리만은 좋았다. 때문에 일을 하는 틈틈이 잇츄부시를 연습해 만약 실력이 좋아지면 스승이 되는 것도 괜찮겠지 싶었다. 하지만 잇츄부시는 쉽지 않았다. 심지어 술버릇이 안 좋은 스승은 이따금 선조님을 붙잡고 잔소 이상의 잔소리를 하곤 했다. "넌 거름통이라도 두드리며 진쿠라도 부르지 그러냐." 스승도 맨정신일 땐 결코 선조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들은 잔소리는 선조님을 울적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제가 뭐 단나슈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선조.. 2021. 7. 21.
프롤레타리아 문학론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험담하는 게 아니다. 되려 변호해보려 한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작가로 구분되는 걸 보면 네가 변호할 필요는 없단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란 무엇이랴. 여러 사람이 제각기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는데 나는 프롤레타리아 문명이 낳은 문학으로 부르주아 문명이 낳은 부르주아 문학과 대비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엔 프롤레타리아 문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문명에 따라 만들어진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터이다. 그럼 달리 해당하는 게 없는가 하면, 같은 부르주아 문명이 낳은 문예 중 하나를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봐야 하리라. 그럼 같은 문명 아래에 있어도 작가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문학도 되고 부르주아 문학도 되는 셈이다. 즉 프롤레.. 2021. 7. 20.
유유장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0월의 어느 오후, 우리 세 사람은 대화를 하며 소나무 안의 작은 길을 걸었다. 작은 길에선 인기척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단지 이따금 소나무 가지서 직박구리의 울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고흐의 시체를 얹은 당구대야. 그 위에서는 지금도 공을 튕기고 있지……" 서양에서 돌아온 S 씨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우리는 희미하게 이끼가 낀 화강암 문앞에 이르렀다. 돌에 꽂힌 푯말에는 "유유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문 안쪽에 자리한 집은――초가지붕의 서양관은 고요히 유리창문을 닫아두고 있었다. 나는 요즘 들어 이 집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집이 너무나도 깔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황폐하기 짝이 없는 주위 경치에――제멋대로 법은 정원의 풀이나 물이 마.. 2021.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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