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각자의 밭이 존재하며 나는 자신의 일을 자신에게 맞는 범위에서 해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신극'이란 일반적인 입장에서 제각기의 편향을 초월해 공통된 문제를 문제시하는 것 또한 내게 주어진 역할 중 하나라 생각한다.
문학 영역에서도 작가 간에 자신의 '경향' 내지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이를 표준 삼아 상대가 하는 일의 가치를 운운하곤 한다. 그것도 '옳다'고 할 수 있을진 몰라도 과연 서로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인가 싶다. 무엇이 개개인의 특색이며 무엇이 공통된 과제인지를 확연히 구별하여 서로 침범하지 않은 채 항상 좋은 자극을 주는 것이 예술 수행에 빠져선 안 될 우정적 결속이다.
우리는 현재 '신극'의 운명을 두고 나란히 고심하며 혼돈한 시대에 맞서 새로운 연극 문화 부문을 지키고 기르련 결심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는 과거 30년의 역사를 가져온 '운동'의 성과에도 공평한 판단을 내릴 기회에 부딪히고 있다.
아마 누구라도 '신극'이 연극으로서의 새로운 매력을 얻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통감하고 그 때문에 그 '매력' 분석에 몰두하기 시작한 오늘날의 경향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예술이 겨우 예술의 위치를 발견한 셈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바는 작가든 배우든 또 그 외에 무대 관련 예술가든 무엇보다도 '연극의 생명'을 존중한단 의미에서 자신의 재능을 겸손한 노력을 통해 보충해 줬으면 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자면 적당히 일하는 걸 엄금하고 충분한 연습을 거듭하여 관객들이 이 극단은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만족'을 느끼게 하는 점에 있다. 그런 만족 속에는 꼭 극단이 바라는 결과는 따라오지 않을지 모르나, 그 이외의 수단을 통한 일시적 성공의 환영은 결코 '신극'을 크게 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츠키지 극단이 나아가려는 방향을 이론적으로 이해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으나 연극이란 게 도무지 이론처럼 되지 않는 법인지라 의도나 포부가 아니라 훌륭해도 그걸 실현하기 위한 방법과 재료가 갖춰지지 않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본래 일정한 예술적 주장은 있어 나쁠 건 없으나 그 주장에 기반을 두어 극단의 모든 기능이 온전히 협력해 타협과 자기변호를 배제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연극의 문화적 사명'이란 건 꿈에도 달성할 수 없으리라 본다. 의리로 봐주는 관객이나 부화뇌동의 관객을 팬으로 부르는 동안에는 신극단의 존재도 굉장히 위태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신츠키지 극단은 역사도 오래되었고 많은 배우를 두었으며 질 좋은 협력자 이름도 볼 수 있다. 그러니 신극협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해도 하지 못할 일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보는데 장르나 이데올로기에 무관하고 새롭고 순수한 '연극미'의 엄숙한 창조를 위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역할을 해내줬으면 한다.(193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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