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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키시다 쿠니오

극작에 뜻을 둔 젊은이에게 - 키시다 쿠니오

by noh0058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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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극작가라 칭해도 될 자격이 있을지 모를 제가 극작가 되는 법을 논하는 게 굉장히 우습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를 일개 극작가로 봐주며 이런 과제를 준 본지 편집자의 표면적 책임 뒤에 숨어서 제가 믿는 바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애당초 '극작가가 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어떤 비평가가 말하길 '극작가는 날 때부터 극작가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전기 기술사나 소설가가 수행을 통해 그 길에 이르는 것하고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큰 모순을 품고 있지요. 우리가 항상 하늘이 내려준 소질 앞에 고개만 숙이고 있어야 한다면 팔짱 긴 채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비평가가 왜 극작가만이 특별하게 '날 때부터' 극작가여야 한다 주장하는가. 그건 극작가만이 현재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풍조를 야유한 것이라 봅니다.

 어떤 비평가는 또 극작 상의 art와 métier을 구별해서 작가의 소질을 논합니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술이며 후자는 기술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전자는 영감에 속하고 후자는 '발상'에 속한다 해야 할까요. 혹은 또 전자는 선천적 재능의 비중이 크고 후자는 직업적 숙련에 의지한다 할 수 있겠죠.

 확실히 이렇게 생각하면 고금 극작가의 소질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일본 현대 작가에게도 흥미로운 비평을 줄 수 있겠지요.

 "극작가는 날 때부터 극작가여야 한다'는 논의도 결국은 기술만을 생명으로 삼는 극작가란 진정한 극작가라 할 수 없는 주장이 뒤에 깔려 있다 봐도 될 테지요.

 그렇다면 진짜 극작가가 갖춰야 하는 것――요컨대 극작 상의 art란 무엇인가. 그건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그건 어떤 형태로 작품 속에 드러나는가. 이 난문제를 해결하여 어떻게 해야 제군이 이 art를 터득하고 감탄할 만한 걸작을 만들 수 있는가――하는 결론을 내는 게 이 문장의 역할이라면 저는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런 건 조금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아무도 모를 테지요.

 예로부터 극작술(드라마트루기)라 칭해지는 서적이 가르치는 점은 사실 이 art 자체에는 관계가 없으며 단지 métier의 일부에 닿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드라마트루기란 문법서와 별다를 바가 없지요. 아뇨, 문법은 차라리 예외를 인정합니다. 드라마트루기는 이런 예외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이전부터 예외를 만드는 일이라 하지 않던가요. 극작에서도 예외를 낳는 궁리를 해야만 합니다. 예로부터 명작 희곡이라 칭해지는 건 대개 모종의 형태로 어느 정도의 예외를 품고 이 예외를 살린 누군가의 손으로 영원성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저는 단지 이것만을 알뿐입니다. 때문에 저는 세상의 젊은 극작가 지망 제군에게 다음의 권고를 해두고 싶습니다.

 첫째로 고금동서의 희곡을 읽고 또 그 무대를 보면서 그 희곡이 품은 사상과 형식 또는 내용과 표현을 분석적으로 고찰해 비판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그 이상으로 그 작품의 매력이 art와 métier의 어떠한 교착 융합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어떤 부분이 예술이고 어떤 부분이 기술인지 딱 잘라 나눠지는 건 아닙니다. 또 그 양쪽이 혼연 일치한 경우에야 비로소 궁극의 매력을 발휘하는 법인데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하며 희곡을 관람하면 저절로 작가의 '마음'과 '손'이 다른 질량과 열도로 제군의 감각에 전달될 터입니다. 여기서 단언해둬야 하는 건 소위 '기교'란 말입니다. 일본 문단에선 '기교 편중'이라는 것 자체가 '기교 편경'을 의미한단 비평이 돌곤 하는데 제가 앞서 말한 métier은 결코 모든 기교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기교 중에선 훌륭히 art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기교는 아무리 중시해도 '편중'이 되지는 않습니다.

 둘째로 여러 희곡의 완성도 요컨대 자신만의 가치로 판단하는 동시에 그 작품의 내용과 형태를 만드는 어떤 '특수성'을 두고 문학사적 진화의 법칙과 과정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비평단이 거의 주의하지 않는 점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문학상의 '양식'(genre)에 대해 하나의 관점을 가지자는 당연한 태도입니다.

 이를테면 여기에 비극 한 편이 있다고 치죠. 그 비극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한 편의 희극을 평가할 수는 없을 터입니다. 또 여기에 사회극 하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신비극입니다. 이 두 작품을 동일한 방법으로 논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일본 문단에선 아무렇지 않게 이뤄지죠. 따라서 희극에 엄숙함이 요구되고 신비극에 혁명 정신을 따지게 됩니다. 이래서야 곤란해요. 물론 극작계에 분업 제도가 존재하는 건 아니니 비극을 쓰는 옆에서 희극을 쓰고 사회극을 쓰는 사이 신비극을 써도 되지만, 비평가 쪽에서 좀 더 신경 써주지 않으면 희극을 쓰면서 비극의 특징을 주는데 몰두하고 신비극을 쓰면서 사회극의 효과를 얻으려 고심하는 작가가 나타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이래서야 아무리 기다려도 우수한 작품은 쓸 수 없을 테죠. 여러분이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저는 장르의 혼합을 인정하지 않는 고전주의자이진 않습니다. 비희극이란 양식 내지 신비적 사회 풍자극의 존재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문화적 관점으로 정리되어야 비로소 권위 있는 비평을 줄 수 있으니 그 가치를 측정하는데 걸맞은 척도를 준비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개중에선 각본을 쓸 때에 어떤 양식의 각본을 쓸지 정해야만 하는가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것과 이는 별개 문제로 정하고 나서 써도 되고 정하지 않고 써도 된다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영감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주의점과 연관 지어 현대에서 이뤄지는 '희곡의 새로운 걸음'을 아는 게 중요하지 싶습니다. 저는 앞서 예술은 하나의 예외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지요. 헨리크 입센이 무대에서 처음으로 '생활의 단편'을 제시하고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훌륭히 '투쟁'이 없는 드라마의 형태를 쌓아 올린 정도의 화려함은 없을지라도 과거 삼십 년의 극계는 문학적으로도 무대적으로도 현저한 진화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현대는 이제 예외가 하나의 규칙인 것처럼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 시대에 표면에 드러난 경향에만 눈을 빼앗겨 이 뿌리 부분에 있는 하나의 흐름, 요컨대 희곡의 전통적 본질을 보지 않는다면 그 새로움은 단순히 métier 위의 새로움, 그것도 기술까지 닿지 못하는 우스운 '아마추어의 흉내내기'에 끝날 테지요.

 세 번째로 저는 '무대를 투과해 희곡을 보지 마라. 인생을 투과해 희곡을 보라'는 주의점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어떤 말인가 하면 희곡의 맛이란 그 정신에 닿고 그 희곡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선 무대만을 보는 눈으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직접 인생을 본 눈이 아니고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인 듯하나 이게 작가 수행의 요령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수업은 이윽고 자신이 펜을 들어 희곡을 쓰려 할 때 허투루 무대적 인습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우며 대담하게 극적 영감을 백지 위에 살리는 힘이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극작가가 그 상상력을 한정된 무대 위에서만 살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상연될 극을 만들어야 한다 말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현재의 극장 사람들이 상연이 가능하네 마네 이야기하는 건 어떠한 기준도 되지 않습니다. 오늘 무대에 올리지 못할 것이 내일은 무대에 오를 수 있죠. 이게 연극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건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극작가는 인생을 무대 안에 넣는 걸로 그치지 않고 무대를 인생 속에 가져가야 한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인생이란 현실의 인생, 있는 그대로의 인생, 당신이나 제게 보이는 인생이 아닙니다.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인생입니다. 현실과 꿈을 초월한 인생입니다. 이러면 재밌겠다 싶은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무대 위에 넣을 때, 그 인생은 종종 빛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 인생 속에서는 각가의 인물이 이제까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잊어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어려워지는 건 작가입니다. 지켜봐 줄 수 없는 건 관객들입니다.

 인생 속에 무대를 가져와 보세요. 인생은 들판의 꽃처럼 뻗으며 인물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연극을 하게 됩니다. 작가는 관객과 함께 느긋하게 무대를 바라볼 수 있죠.

 이야기는 이쯤 해둘까요. 원고지 열 장은 읽는데 십 분의 시간이 들지요. 십 분의 해설로 '극작가 되는 법'을 터득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극작가 되는 법'을 배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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