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나는 신감각파이다'하고 자칭한 적이 없다. 또 사람들이 '그들은 신감각파를 세우려 노력한다'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한 적도 없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문인지 어딘지서 아마 '신감각파'가 정리되어 있는 걸 보고 '나는 과연 신감각파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문예 시대의 동인은 대부분 신감각파였음으로 정평이 나있는 듯하다. 대부분이란 건 예외도 있는 걸 테지. 나는 그 예외 중 한 명임에 분명하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신쵸의 합병회 기사를 보면 우수한 문단 지식인들이 나를 신감각파로 취급한다.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정말로 신감각파란 말뜻을 이해하고 있는가. 스스로 그렇게 물어서야 비로소 아니, 실은 그렇지 않다 자백하는 자신이 살짝 거슬렸기에 문예시대 1월호에 실린 요코미츠 군의 권두 논문이나 언젠가 지지신보에 나온 카타오카 군의 글을 끌어내 다시 한번 읽어보라 말한 것이다.
나는 본래 사람들의 논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며 금세 말꼬리를 잡고 싶어지는 성미가 있기에 정말 질이 나쁜데, 두 작가의 말은 참으로 일목요연하여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조리 있었다.
신문학파가 이런 거니 너도 한 번 껴보지 그러냐. 그런 권유를 받는 것만 같아서 신감각파를 공격하는 쪽을 하나나 둘쯤 봐볼 생각인데 그 상대는 무사도에 정통하지 않은 듯해서 '작품을 보여라', '작품을 보여라'하고 멀리서 소리만 지르는 격이었다.
문학이란 좋아하지 않으면 즐겁지 않다. 특히 경향이 뚜렷한 것일수록 그렇다. 부족한 것만 뒤적이면 뭐가 재밌겠는가. 부스러기만 못한 근성으로 문학을 하는 게 잘못이다.
아니, 재밌으니 좋아하는 거라고 잘 말할 자신이 있다면 그건 자신이 문학의 아마추어임을 고백하는 거나 다름없다.
자신은 제쳐두어야 비로소 무언가를 통틀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론에 이론을 끌어올 수 있는 것이다. 신감각파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걸 타파할 주장을 세우라. 신감각파의 작품을 공격할 거라면 그 결점을 당당히 지적하라. 단 그 결점이 신감각파의 주장으로 만들어진 결함인가. 작가의 재능 부족으로 만들어진 결함인가. 그걸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더욱이 신감각파의 작품은 볼품없다, 자신이라면 더 좋은 걸 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된소리 그만하고 무언가를 써보면 된다. 마음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신감각파와 다른' 같은 주석이라도 붙여보라.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신감각파'란 말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적어둔다. 상식적 관찰보다 초상적 관찰로――인습미보다 독창미로――도의적 가치비판보다 현상적 관심으로――설명적 논리적 서술보다 암시적 종합적 사상 환기로――말의 뜻보다 말이 가진 이미지로, 내용보다 효과로――이 비약, 진전, 추이, 돌입을 목표로 삼는 문학적 노력. 이는 신감각파이든 무엇이든 신시대의(백 년 전에도 신시대가 있었다), 신작가의 피폐된 구시대의(백 년 후에도 구시대가 있으리라) 기반을 깨기 위한 하나의 모색이다.
"문학을 문학답게 하라". 이 외침은 오늘날까지 몇 번이나 있었는가. 그리고 그때마다 구시대의 천재는 그 시대를 제멋대로 활보하는 평범한 작가를 죽인 손에, 젊은 신시대의 천재의 손에 우정과 경의를 담은 손을 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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