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평화"의 작가 조르주 쿠르틀린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근대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이름은 파리에서 굉장히 유명했다. 우리 키쿠치 칸 씨가 도쿄에서 유명한 것처럼. 그의 예술이 가진 특징은 우리 야나기야 코산, 그리고 우리 마츠모토 잇페이 씨와 닮은 점이 있다. 경묘하고 신랄하며 어딘가 우스운 구석이 있으며 통쾌함과 온정이 적절하게 뒤섞여 파리 생활 속 다양한 감정 뉘앙스를 미울 정도로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이 "우리 집의 평화"는 그의 걸작 중 하나로 국립 극장 코메디 프랑세주의 상연 목록에도 올라 있어 나도 그 무대를 본 적이 있다.
단지 우리의 배우는 이런 극본을 연기하기엔 그 소질이 너무나 다른 듯하나 당 협회의 이시이 칸 군은 비교적 희극에 적합하며 하나야나기 하루미 군도 이 배역이라면 가지고 있는 발랄함을 살릴 수 있으리라 본다.
어찌 되었든 이 작가의 작품은 아직 일본 무대에 오른 적이 없다. 신극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물론이고 경향의 관점으로 이제까지 신극을 멀리한 사람은 부디 이번 연출을 보러 와줬으면 한다.
이번 익살극 연출에 나는 물론 책임을 질 생각이나 본래 '보는 연극'의 요소보다 '듣는 연극'의 요소를 많이 가진 이 작가 작품(최근 파리 라디오계 소식에 따르면 라디오 드라마로서 방송된 극본 중 이 작가 게 제일 많다고 한다)――개중에서도 인물이 단둘뿐인 이 극본의 내용은 주로 대사의 묘미에 집중되어 있다. 만약 연출상의 결점이 존재한다면 그건 내 부주의함과 미숙함의 문제이나 반대로 이 무대가 성공한다면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배우의 공적이다.
슬슬 일본에서도 '청년 문학'만 아니라 '장년 문학'이 요구되고 있다. 신극 방면에서도 그런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장년 문학'은 생활의 탄력이 결여되거나 공상의 날개가 꺾여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쿠르틀린은 청년과 함께 웃고 장년과 함께 쓴웃음 짓고 노년과 함께 미소 짓는 등 정말로 '고생이 많은 사람'이다. 그 자유분방한 판타지는 인생의 비통한 반면을 그릴 때에도 늘 밝은 심경과 풍부한 생활력을 반영시키고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생을 비판하는 관심'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의 작품에 경도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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