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거에 본란(지지신보)에서 '상연목록'이란 제목으로 신극단체존립의 주요 조건으로 상연 극본 선정에 들여야 하는 주의를 논했다. 또 '예술적인'이란 신조 이외에 '문득 든 관심'으로 호의를 품은 무대를 보러 오도록 궁리해야 한다는 말도 해두었다. '문득 든 관심'――이는 결코 예술과 따로 노는 게 아니다. 영리 본위 극장에 맞서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고 그 존속을 이뤄내기 위해선 결코 '연극연구자'만을 상대해선 안 된다――그런 점도 암시해두었다.
나는 결국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다룬 작품', '사색을 사색의 형태에 얹은 작품' 더욱이 '인생의 엄숙함만을 가르치고 또 느끼게 하는 작품'……이러한 작품은 설령 예술로서 최상위에 위치하더라도 '무대 관객'에겐 '가끔 먹는 특식'으로 머물러줬으면 한다고 늘 생각한다. 소위 '교양 있는 관객'을 위해 '밝은 것', '몽실몽실한 것', '장난스러운 것', '별거 아닌 것'이 왜 '예술적 무대'에서 모습을 감춰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예술가는 왜 무대 인물에게 '재미없는 이야기'만을 하게 해야 하는가. '저런 인물만이 충만한 인생이란 참으로 어둡고 갑갑하겠다' 싶은 인물만을 즐겨 그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이런 사람이 있으면 유쾌할 텐데, 우스울 텐데, 밝을 텐데, 세상에 여유가 생길 텐데'하는 인물을 많이 그리지 않는가. 무대 관객은 교양 정도에 따라 그 관심도가 다르다 해도 대다수의 경우 그런 인물을, 그런 인물의 생활을, 그런 인물의 활기찬 인생을 무대 위에서, 극장 안에서 보러 가는 것이다. 또 더 들어가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특색 없고 평범하며 갑갑하고 어둡고 단조로운 생활, 그 생활에서 벗어나 한 시라도 무대 위의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황당하고 때로는 엉뚱하며 때로는 그럴싸하며 때로는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고 때로는 흐뭇하며 때로는 눈물겨운 어찌 됐든 그런 '재미난' 생활을 생활하러 가는 것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쓰고 싶은 걸 쓴다. 그렇게 호언하는 예술가는 어찌 되었든 관객이 한 명이라도 많이 혹은 조금이라도 이 정돈 와줬으면 하는 극장은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이다.
나는 요즘 어떤 신극단을 통솔하는 아무개 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럼 현대 일본극 중에선 어떤 작품이 그 요지에 맞는 각본인가'하는 문제에 잠시 망설였다.
이 일을 외람되나 독자와 함께 당대 일본 극작가들에게 호소해두고 싶다.
'고전 번역 > 키시다 쿠니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38년의 여성은 이렇게 살라! - 키시다 쿠니오 (0) | 2022.09.23 |
---|---|
'고생 많은 사람' 조르주 쿠르틀린 - 키시다 쿠니오 (0) | 2022.09.21 |
여성 풍속 시평 - 키시다 쿠니오 (0) | 2022.09.19 |
신극협회의 공연을 앞두고 - 키시다 쿠니오 (0) | 2022.09.18 |
그 얼굴 그 목소리 - 키시다 쿠니오 (0) | 2022.09.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