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좌 3월 공연은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로 정해져 내가 연출을 맡게 되었다.
진자이 키요시 씨의 번역이 완성되는 걸 기다려 연습에 들어간다. 병상에서 막 일어난 나로선 매일 오다와라서 나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연습장 옆에 숙소를 잡는다.
마음을 크게 먹어 신인들을 기용했기에 어떤 결과가 될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이 '연극'은 일본에서도 자주 상연되었다. 오래된 사례는 별개로 쳐도 츠키지 소극장 이후로 두세 명의 연출가가 제각기의 방식으로 '밑바닥에서' 일본판을 만들어냈다. 나도 그중 하나를 보았는데 도무지 30년 전에 파리에서 본 모스크바 예술좌의 '밑바닥에서'가 눈앞에서 어른거려 떠날 줄 몰랐다.
이 완벽하다 해도 좋을 러시아 근대극 무대는 나의 새로운 목표임에 분명하다.
나 홀로 그렇게 마음을 크게 먹어도 배우 한 명 한 명이 그런 마음을 먹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다행히 마침 좋은 연줄이 있어 '모스크바 예술좌의 명배우들'이란 기록 영화를 다 같이 견학할 수 있었다. 모두가 감탄사를 질렀다. 말은 모르지만 카차로프 남작을 지속으로 한 명배우들의 명연기는 그야말로 신들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겸사겸사 프랑스서 만든 영화판 '밑바닥에서'도 낡은 필름을 빌려와 봤다. 이쪽은 쥬베가 남작을 연기하고 가반이 페펠역을 맡는데 정말 지루한 영화였다.
연습장으로 돌아와 다 같이 감상을 나눴는데 내가 모두에게 주의를 준 건 모스크바 예술좌의 '밑바닥에서'가 상상 이상으로 밝은 인상을 주었다는 점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여러 원인이 있으나 무엇보다 이런 생활 속에도 존재하는 러시아 민중의 탁월한 낙천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 민족적 특징은 역시 러시아 배우가 아니면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또한 그 점을 염두에 둔 채 제각기 인물을 그려야 한다. 연출 면에서도 이 점을 잊어서는 중요한 걸 잃게 되리라. 애당초 일본인인 우리는 생활의 불행한 면, 이를테면 빈곤함, 병, 분노, 다툼 특히 죽음 같은 장면을 무대 위에 그려낼 때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일종의 감상주의다. 지나친 감상은 항상 히스테릭한 표정이 된다. 이게 무대를 알게 모르게 '묘한 어둠'으로 감싸게 된다. 요컨대 '어두운 현실'이란 건 분명하나 이걸 말할 적에 '어두운 말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리키는 이 희곡 '밑바닥에서'를 통해 말하자면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려냈으나 작가 본인은 이런 사람들과 함게 살고, 슬퍼하고, 노래하고, 절망하고, 분개하고 그러면서도 내일의 광명을 기다리고 있음이 또렷이 느껴진다.
적어도 작가는 자신들의 불행과 고난을 이야기하기 위해 마냥 흥분만 하는 게 아니다. 되려 '재밌는 이야기'로서 들려주어 상대를 즐겁게 하는 걸로 자신 또한 웃고 싶다며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 특유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연출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진자이 키요시 씨의 새 번역과 맞아떨어질 거 같았기 때문이다. 늦지는 않았지만 교열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해 작가에게나 역자에게나 미안해질 법한 볼품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완벽한 번역을 부디 햐쿠미즈샤 세계 희곡 선집에서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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